신애론(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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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을 사랑하려는 우리의 자연적 경향도 무익하지는 않다

만일 우리가 본성적으로는 하느님을 만유 위에 사랑할 수 없다면, 사랑하려는 그 자연적 경향은 왜 있겠느냐? 본성이, 우리에게 줄 수 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자극함은 무익하지 않겠느냐? 만일 그 값진 물을 우리가 마실 수 없도록 하셨다면 왜 우리에게 그 물에 대한 갈증을 느끼게 하셨겠는가?

테오티모여, 하느님은 우리에게 얼마나 착하게 대하시는고! 우리가 하느님을 거역한 그 배신을 생각하면, 정말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당신의 모든 선의의 표적을 다 빼앗으시어, 당신의 빛으로써 하느님의 거룩한 모습을 우리에게 박아 주실 때 우리 본성에 입혀 주신 그 은혜를 마땅히 거두셔야 했으나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선하심을 사랑하는 우리의 경향을 깨닫고 느끼는 데서 맛볼 수 있는 기쁨을 우리의 마음에 부어주셨으므로(시편 4,6) 천사들마저 이 가련한 인생을 가엾게 여기게까지 될 것이니, “아름다움의 극치요 온 누리의 기쁨”(애가 2,15) 하고 한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무한하신 자비는 당신이 손수 지으신 이 작품에게 그리 심한 처벌은 아니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육체를 입고 있음과 한번 불어가면 되돌아오지 않는 바람에 에워 쌓여있음을 보셨으므로(참조. 시편 78,39; 제2권 4장) 당신 마음 그윽히 자리 잡은 그 자비를 따라, 우리를 아주 소멸시키려 하시지 않고 당신의 잃은 은총의 표를 우리에게서 아주 없애지 않으셨다. 그리하여 우리 안에 있는 그 계약을 느낌으로써, 즉, 하느님을 사랑하려는 그 경향을 느껴 우리가 노력하게 하심으로써 감히 아무도 “누가 우리에게 좋은 일을 보여주랴?”(시편 4,7)라고 말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비록 이런 자연적 경향만으로는 하느님을 충분히 사랑하는 행복을 지지할 수 없다 할지라도, 만일 우리가 그 경향을 충실히 이용한다면 자비로우신 하느님은 어떤 도우심을 베푸실 것이며,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진보할 수 있고, 또 우리가 만일 이 첫 도우심을 잘 따른다면 자부적이고 지선하신 하느님은 우리에게 보다 큰 은총을 베푸실 것이다. 그리하여 선에서 더욱 맛스러운 선에로 우리를 이끌어 자연적 경향이 재촉하는 저 최고 정상의 사랑에로 우리를 드디어 도달케 할 것이다. 그래서 작은 일에 충실한 자와 자기 힘껏 노력하는 자들을 하느님은 반드시 도와주심으로 더욱 앞으로 전진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을 만유 위에 사랑하려는 그 자연 본성적 경향이 우리 마음속에 전혀 아무것도 남겨 놓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의 편에서 볼 때, 거기에는 조그마한 손잡이가 될 수 있는 것이 남겨져 있어서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잡으시고 우리를 붙들어 당신께로 이끌어주신다. 그리고 어지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마치, 끈으로 새를 잡아매는 것처럼, 우리가 지닌 경향으로써 우리 마음을 매어주시고, 당신이 자비를 베푸시고 싶으실 때 그 끈으로 우리를 당신께로 당겨주신다. 그리고 우리 쪽에서 볼 때 그 경향은 우리의 근원이며 창조주가 되시는 하느님의 기호가 되고 그것이 우리를 하느님의 사랑으로 밀어주며 또 우리가 착하신 하느님께 예속되도록, 아주 넌지시 상기시켜 준다.

제후들은 때때로 사슴을 잡아, 문장이 달린 목걸이들 걸어 준 뒤 다시 숲속으로 자유로이 놓아 주는데 그 후에 누구든지 그런 사슴을 만나면, 그 사슴이 전에 어느 공작이나 제후에게 잡혔다가 목걸이를 받은 것임을 알게 된다. 그런데 어느 역사가의 말에 의하면(보쑤에Bossuet가 바로 이 구절을 꼬집어서, 본서의 저자를 반半 펠라지아니스트라고 비난하였었다. 그러나 보쑤에는 저자의 깊은 신비신학과 명상에 대한 실천지식에 관하여 좀 덜 이해한 데서 나온 오해였다고 많은 학자가 지적하였다. 상세한 것은 본서의 이탈리아어 역본, Don Eugenio Ceria 번역, S.E.I, 1996년 판, I권 132면의 주해를 참조할 것), 아주 늙은 사슴이 잡힌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카이사르의 것으로서, 카이사르가 죽은 지 삼백여 년 후에 잡힌 것이라 하며, 그 사슴 목걸이에는 카이사르의 이름과 함께 “카이사르가 나를 놓아주었다.”라고 쓰여 있었다 한다.

확실히 하느님이 우리 영혼에 박아 주신 드높은 경향성은, 우리 벗들과 원수들에게 한가지 알려주고 있는 사실이 있으니, 그것은, 일찍이 우리가 창조주께 속해 있었을 뿐 아니라 비록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을망정 어쨌든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존재이며(Mattioli, In discors. II, 52), 또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 자신에게로 다시 취해 가실 권리가 있으시니,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 거룩하시고 자비하신 안배는 이 권리를 다시 가지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대한 예언자가 이 경향을 일컬어, “빛”이라고 하였으니, 빛은 우리로 하여금 보고 듣게 하기 때문이고, 또 “기쁨”(시편 4,8)이라고도 불렀으니, 이 기쁨이 길 잃고 헤매는 우리를 위로해 주기 때문이며, 또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데, 이것은 우리 안에 우리 근원의 확실한 표를 새겨 남겨주신 그분께서 우리를 다시 당신께로 이끄시기를 바라시는 데 대한 희망이며, 또 하느님의 그 선하심으로써 우리가 다시 하느님께 돌아갈 수 있는 행복을 바라는 희망인 것이다.(제1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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