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0주일 ‘다’해(루카 12,49-53)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루카 12,49)
오늘 복음 말씀은 몇 가지 부분에서 상당히 엄하다고 할 수 있는 표현을 담고 있어서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또한 말씀을 해설하는 이들이 이 말씀을 자기 본위의 그리스도교적인 생각에 근거하여 인위적으로 그릇되게 활용하기까지 한다. 주님의 말씀 자체가 담고 있는 권위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대로 『성경은 스스로 해석한다.(Scriptura sui ipsius interpres)』라는 원칙에 의하여 예수님의 다른 말씀으로 오늘 말씀을 해석하려고 노력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남녀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오르고 계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오르시는 예루살렘을 두고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루카 13,33-34)라고 하신다. 예루살렘은 예수님께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루카 9,31 참조. 요한 13,1)이 이루어지는 곳,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가시는 탈출이요 출애굽이다. 루카는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예수님께서 높은 목소리로 강조하신 예수님의 몇 가지 고백이자 예언을 증언한다.

1.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그중 한 가지인 오늘 복음은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루카 12,49)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하느님으로부터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불을 지르기” 위함이라 하신다. 이 표현이 모든 것을 태워 버리고 삼켜버리는 두려움의 불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번져 사람들 안에 타오르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하느님의 힘에 관한 비유적인 표현임이 분명하다. 예수님께서 체험하신 하느님의 현존과 하느님의 행하심은 모든 것을 비추시며 타오르시고 따뜻하게 하는 “불”이었으므로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상징적인 표현과 내용을 자주 기억하셨고 사용하셨을 것이다.

외경인 토마스 복음에서도 『내가 세상에 불을 놓았고, 이제 나는 그 불이 타오를 때까지 지킨다.(10)』 하면서 복음의 말씀을 거의 똑같이 수록한다. 다른 예로서 정경의 기록으로 남지는 않지만, 오리게네스의 기억(예레미야 20,3에 관한 강론)과 토마스 복음(82) 역시 『나에게 가까이 있는 사람은 불에 가까이 있는 사람, 나에게서 멀리 있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남긴다. 이러한 내용과 함께 우리는 예수님께서는 ‘불에 삼켜지신 분, 타오르시는 분, 열정으로 타오르시는 분, 하느님의 현존이 세상에 효과적으로 불타오르게 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으신 분’,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 정열은 저승처럼 억센 것, 그 열기는 불의 열기 더할 나위 없이 격렬한 불길”(아가 8,6) 하는 말씀 그대로 사랑으로 활활 불타오르시는 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루카복음에 따를 때 “불”은 표징, 무엇보다도 성령의 표징이다. 루카는 일찍이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두고 그분의 신적神的인 현존 앞에서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루카 3,16)이라 증언했다고 기록하였으며, 사도행전에서 교회의 탄생 장면을 기록하면서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기다리며 “한자리에 모여” 있을 때 “불꽃 모양의 혀들”이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로 온 집 안을 가득 채웠으며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고 기록한다.(참조. 사도 2,1-11)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도 모세가 보았던 불타는 떨기 안의 하느님 현존의 “불”로부터 시작한다.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시기 위해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지키신(참조. 탈출 13,21.22;14,24 민수 14,14 느헤 9,12.19 지혜 18,3) 그 불은 부활하신 주님과 제자들과의 만남에서 제자들의 “가슴을 뜨겁게 타오르게 하는”(루카 24,32) 말씀의 불이 되시고, 마침내 제자들 머리 위에 불꽃으로 내렸던 성령(참조. 사도 2장) 이시다. 그 불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기도의 불이고, 영혼 안에 타오르는 사랑의 불이며, 내 영혼 안에 불 질러 주시기를 간청하는 불이고, 신망애 삼덕의 세 횃불이고, 불꽃 같은 삶의 불이며, 제대 위에 타오르는 촛불이고, 조용히 감실을 지키는 성체불이다.

예수님은 한없고 깊은 갈망으로 북받쳐 오르는 당신의 열정을 토로하신다. 아버지로부터 이 땅에 가져오신 그 성령의 불, 사랑의 불이 마땅히 이 세상에 타올라야만 하고 모든 인간의 마음 안에 타올라야만 한다. 이것만이 예수님의 유일한 바람이었다. 공생활 동안 이 땅에서 그것만을 원하셨고, 오늘 이 순간에도 오직 그것만을 원하시는 분이 우리 주님이시다. 굳이 이 말을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지피시어 활활 타올라야 할 이 불이 오늘날 어떤 의미에서 교회라는 재(재 회灰)에 덮여 불꽃이 보이지 않는 일도 있어서이다. 물론 그리스도교 신앙의 역사 전체를 볼 때 이따금 재로 덮인 불을 휘젓는 사람들이 있어서 복음의 불꽃이 개인 안에서나 공동체 안에서나 여기저기서 맹렬하게 타오르게 된다는 것을 안다. 그렇지만 그러다가도 어느새 그 불은 다시 죽은 듯이 재로 덮여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 그 불은 살아 있고 뜨거운 “불”인 것이 사실이지만 확실히 타오르지는 않는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들이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 24,32) 하였던 것처럼, 또 오순절에 교회가 탄생할 때 맹렬하게 성령의 불꽃이 일었던 것처럼,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생길에서, 또 우리 신앙인들의 마음에도 불이 타오르기를 바라신다.

2.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불이 타올랐으면…”이라는 말씀에 직접적으로 연관된 또 다른 예수님의 말씀이 이어진다.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루카 12,50) 하신다. 예수님의 또 다른 고통의 갈망이요 바람이다. 장차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받으실 때의 시련을 염두에 두신 수난과 죽음의 예고이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십자가에, 세례 때 물에 잠기는 것처럼 극도의 고통이라는 물에 잠겨야 할 세례이다. 예수님의 수난은 고통 그 자체가 어떤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다. 사랑에, 오직 사랑만을 아시는 아버지의 뜻에 충실하고 순명하기 위해서 마땅히 그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권력을 쥔 사람들과 정치·종교 지도자라는 사람들, 또 백성들 자체의 거부와 배척은 십자가 밑에서 백인대장이 예수님을 보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 하고 말하였다.”(루카 23,47) 한 것처럼 예수님께서 “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못된 이들은 “의인”을 절대 봐주지 않을 것이며 덫을 놀 것이고, 보는 것만으로도 짐이 되고 유별나서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고 덤벼들어, 끝내 죽음을 내리자 할 것이다.(참조. 지혜 2,10-20)

우리는 지금 아직도 주님의 상징적인 언어의 공간에 자리 잡고 있다. 여기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세례”는 성사聖事와 전례에서 말하는 세례가 아니라 실제적인 피와 죽음의 세례이다. 주님께서는 이 세례를 목전에 내다보시면서 괴로워하시지만, 어서 이루어지기를 바라시며 영원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신다. 당신 편에서 이 죽음과 고통을 즐기고자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뜻이면서 하느님의 뜻이기도 한 이 뜻이 어서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바라시면서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하신다.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650~750년)은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진 세례성사가 성경에 기록된 모든 세례의 절정이라면서 ‘여덟 번째의 세례’를 설파한다. 『첫 번째 세례는 죄에서 갈라져 나오게 하는 홍수에 의한 세례였습니다. 두 번째 세례는 구름과 바닷속에서 이루어졌는데(1코린 10,2 참조), 구름은 성령을 상징하고 바다는 물을 상징합니다. 세 번째 세례는 율법의 세례로서, 모든 부정한 사람은 물로 자기 몸과 옷을 깨끗이 씻은 다음 진영으로 들어갔습니다.(레위 14,8 참조) 네 번째 세례는 사람들이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도록 준비시키는 요한의 세례입니다. …요한은 사람들이 성령을 맞을 수 있도록 물로 그들을 정화했습니다. 다섯 번째 세례는 우리 주님께서 받으신 세례입니다.…죄와 옛 아담의 모든 것을 물속에 묻어버리고, 세례 주는 이를 성화하며, 율법을 완성하고, 삼위일체의 신비를 드러내고, 세례받는 본보기를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그리스도께서 불꽃 모양의 혀로 사도들에게 성령의 은총을 부어주셨기에 그분의 세례를 불세례라고 합니다.…주님께서 불로 세례를 베푸신다고 하는 것은 장차 징벌하는 불의 세례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여섯 번째 세례는 회개와 눈물의 세례로서, 참으로 아픈 세례입니다. 일곱 번째 세례는 피와 순교로 이루어지는 세례인데, 그리스도께서도 우리를 위해 이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이 세례야말로 어떤 얼룩도 더럽힐 수 없기에 지극히 숭고하고 복된 세례입니다. 여덟 번째이자 마지막 세례는 구원의 세례가 아닙니다. 죄와 악을 완전히 박멸하는 이 세례는 그것들이 더는 힘을 쓰지 못 하게 하고 영원히 징벌하는 세례입니다.(교부들의 성경주해-루카복음서, 분도, 2011년, 330쪽)』

3. “평화를 주러 왔다고분열을 일으키러

“불이 타오르기를”, 그리고 “당신께서 받아야 할 세례”가 어서 “다 이루어지기를” 바라시는 두 가지 바람에 이어 예수님께서는 세 번째 바람을 말씀하신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31) 하신다. 예수님께서 사람들 사이를 갈라놓고 공동체의 분열을 바라셔서 하는 말씀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질서 안에 이러한 “분열”이 꼭 필요한 사실이라는 점을 잘 알고 계셨다. “의로운 분”이 나타나셨고, 모든 이가 해방되며 진정한 평화의 가능성이 주어지자마자 그 의로우신 분의 탄생 시점부터 한편에서는 즉시 무장한 사람들의 폭력이 등장하며 아예 그 싹을 없애버리려는 시도 속에 크나큰 분열이 생긴다.

베들레헴에서 “천사 곁에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라고 하는 바로 그 순간에 “화가 난” 폭군 헤로데는 베들레헴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순진무구純眞無垢한)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학살하였다).”(마태 2,16-18) “평화가 없는데도 ‘평화롭다, 평화롭다!’ 하고 말하며”(예레 6,14), “거짓을 이야기하고 속임수 환시를 보며”(에제 13,8), “먹을 것이 있으면 평화를 외치지만 저희 입에 아무것도 넣어 주지 않는 이들에게는 전쟁을 선포”(미카 3,5) 하는 이러한 이들의 작태요 행태는 모두 거짓 예언이다. 제자들이 공동체 안에서 더욱더 복음적으로 살려고 하면 할수록 다른 한편에서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루카 12,52-53) 하신 대로 더욱더 거센 분열과 반발이 일어난다.

이 말씀 역시 당시의 제자들과 함께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이 되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써 나타나게 된 “사람의 아들의 표징”(마태 24,30),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표징이 인생 안에서, 세상 안에서, 또 다른 공현公顯으로 계속 드러나는 과정에서는 “평화”보다 “분열”이라는 불협화음이 늘 발생한다. 교회의 삶 안에 조화롭고 아름다운 “평화”의 모습만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바로 이 부분에 부정적인 열정과 욕망으로 가득 찬 우리의 마음에 자리 잡은 속임수가 있다. 교회 안에도 “세상 풍조에 따라, 공중을 다스리는 지배자, 곧 지금도 순종하지 않는 자들 안에서 작용하는 영을 따라 살아가는”(에페 2,2) 사람들이 있고, 그런 이들이 지도자와 권위권자로 있는 상황을 살아야만 하는 시대가 있다. “우리의 전투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권력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들입니다.”(에페 6,12) 하는 말씀대로 교회 안에는 언제나 성령의 인도를 받아분열을 일으키는아름다운 불꽃의 삶을 추구하는 이들이 있어 교회의 아름다운 생명을 유지해 간다. 교회의 기나긴 역사 안에서 감히 교회의 개혁을 추구하지 않은 시대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회가 개혁을 위해 나아갈 때 개혁의 강도가 세면 셀수록 교회 안에는 크나큰 반대와 반발이라는 거센분열이 일어나기도 한다. 어떤 면에서는 이것이 진정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이기도 하다.

지난 십수 년간 프란치스코 교황님과 함께했던 우리 교회 안에서 우리는 이러한 좋은 실례를 목격하기도 했다. 교회 안에는 그리스도인으로 고백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제대로 살아보려 애쓰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는 복음의 음성에 귀를 닫은 그리스도인이 있고, 복음에 최우선권을 두면서 사는 그리스도인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 그런 이들을 속없이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이들이며 겁쟁이라고 멸시하면서 본질이 아닌 인간적이거나 종교적인 전통 따위를 고집하는 그리스도인이 있고, 복음이 아닌 교회의 높은 종탑 위에 고고하게 올라앉아 있기만 좋아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예수님의 평화는 세상의 논리만을 살아가려고 하는 현대인들에게 자칫하면 정신 분열을 일으킬 수도 있다. 현대인들의 논리는 성과주의, 업적주의, 실적주의, 끝없는 경쟁으로 무한경쟁을 위해 사람들을 내몰고 치닫게 하는 세상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평화는 그런 세속주의에 있지 않다. 예수님의 평화는 “열매”를 추구한다. 세상이 구하는 평화는 ‘척도’와 ‘평가’ 그리고 ‘새로움’을 기준으로 하고, 예수님의 평화는 진정으로 자기 자신이 죽어 누군가를 열매 맺게 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는다.(참조. 요한 12,24) 예수님은 “평화의 군왕”이시며 그분의 승리는 영원하시지만,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사도 14,22) 하는 말씀대로 시련, 시험, 분열과 같은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께 일어난 일이다. 그분의 제자들인 우리가 그분께 충실하고, 타오르는 복음의 불꽃이요 성령의 불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고야 만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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