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8주일 ‘다’해(루카 12,13-21)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루카 12,21)

사람들은 예수님을 율법서인 토라를 비롯하여 성경 말씀을 권위 있게 풀이할 수 있는 라삐요 스승으로 생각했다. 그러므로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나 청중들이 예수님께 당시 유다이즘의 논란거리나 일상의 문제들에 관하여 질문을 드리곤 하였다.

1.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탐욕을 경계하여라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여정 동안에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제 형제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루카 12,13) 한다. 어떤 이가 두 형제 사이의 유산 분배라는 아주 구체적인 요청을 예수님께 해 온 것이다. “맏아들…에게 자기의 모든 재산에서 두 몫을 주어야 한다.”(신명 21,17)라는 구절에 따라서 율법은 토지나 집과 같은 부동산의 소유주가 사망할 때 장자에게 우선권을 두고, 부동산이 쪼개지지 않게 하면서 동산의 일부를 다른 자녀들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당시의 법이었다.

예수님께 자기의 권리가 인정받을 수 있도록 요청하고 있는 것만 보아서는 장자가 아닌 다른 아들로서 장자가 그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은 상황으로 추정된다. 사실 이는 얼마든지 가능한 주장이었으며, “보라, 얼마나 좋고 얼마나 즐거운가, 형제들이 함께 사는 것이!”(시편 133,1) 하는 말씀처럼 형제들이 유산을 적당하게 서로 잘 분배하여 우애 좋게 살아가는 것이 이상적인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항상 그렇지만은 않은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요청이라기보다는 아예 그렇게 해야만 된다는 듯이 강압적으로 예수님께 말씀드린 사람을 맞아 예수님께서는 이를 거절하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요청 자체를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거침없이 사람아(Ἄνθρωπε, ánthrope, =man),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루카 12,14) 하는 반문으로 대답을 시작하신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요청에 직접적으로 대답하기를 거부하신다. 우리는 적대적인 상대방을 만나거나 누군가와 싸움에 말려들 수 있는 상황에서 그 누군가의 질문이나 요청을 받을 때 비유나 은유, 혹은 수수께끼 같은 또 다른 질문으로 대답하시는 예수님의 모습 역시 그분의 스타일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토라에 의해서 확립된 재판관이나 중재인의 권위를 당신께서 대신하지 않으신다는 뜻을 내비치신 것인지(참조. 신명 16,18-20;21,15-17), 아니면 하느님의 율법이 명시하는 정의와 사랑의 요구에 따라 각자가 양심껏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앞뒤 문맥을 고려해 볼 때,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일까? 재산 분배와 같은 경제적인 문제에 관심이 없으며, 당신의 사명이 오로지 영적인 성격을 띠고 있음을 강조하시려던 것이었을까? 두 형제의 갈등과 분쟁을 형제간에 서로 책임지고 알아서 하라는 것이었을까? 나로서는 아마도 예수님께서 문제를 제기한 사람의 요청이 정의의 실현을 요청하는 모양새를 취하고는 있으나 내심 욕심에서 비롯된 소유에 대한 요청이었음을 간파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답변하시지 않았을까 하고 추론해 본다. 예수님께서는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루카 6,29) 하셨고, “너희는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풀어라.”(루카 12,33) “너에게 아직 모자란 것이 하나 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라.”(루카 18,22) 등과 같은 말씀을 하신 분으로서 어떻게 유산 분배와 같은 상속 문제를 규정하시는 분이 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예수님께 요청을 드린 당사자가 법적이고 경제적으로 온당한 결정을 얻고자 했다면 자기에게 우호적이고도 합법적인 특정인을 내세워서 자기의 몫을 제대로 챙기려는 노력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정당한 유산 분배의 문제가 아니라 더 많은 소유를 위한 자기의 욕심에서 시작한 문제임을 감추고, 예수님과 다른 사람들이 있는 앞에서 근본적인 문제를 떠나 표면적인 문제로 문제를 호도하면서 자신을 은근히 표출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예수님께서는 탐욕이 인간의 마음에 차게 되면 주변에 갈등을 부추기고 눈을 멀게 하여 이웃이나 형제도 볼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을 아신다. 요청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요청한 사람을 비롯한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πλεονεξία, pleonexía)경계하여라.(Ὁρᾶτε, horâte=see *우리 말에서는 ‘경계하여라’라고 한 마디로 번역하였으나 희랍어 원문에서는 Ὁρᾶτε라는 말과 ‘삼가라φυλάσσεσθε, phylássesthe=to guard, watch’라는 두 마디로 구성되어 있어서 직역하면 ‘보고 살펴라’ 하는 말이다)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모든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 하신다.

소유와 재산이라는 우상 중의 우상에 사로잡혀서 그러한 것들이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각자가 살아내야 하는 온전한 인생을 제대로 사는데 장애가 되지 않도록 계속 경각심을 가지고 깨어 있어야 한다고 하시는 경고 말씀이다. 우리 인간은 곧잘 우리 인생의 충만함이 우리 자신의 본래 모습을 추구하는 데서가 아니라 우리가 소유하는 것이나 재산으로 채워질 수 있다고 여기는 환상의 먹이가 되곤 한다. 에리히 프롬Erich Seligmann Fromm(1900~1980년)은 오랜 세월 전에 『현대의 인간 사회는 존재의 참 본질이 소유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되면 누군가가 아무것도 지니지 못할 때 그는 아무것도 아닌 게 되고 만다.』라고 말한다.

2.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에 가르침을 더 깊이 새겨주시려고 비유 하나를 말씀하신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생각지도 않게)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현재 가지고 있는 곳간들이 너무 작아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루카 12,16-19)

비유의 전반부라고 할 수 있는 내용에서는 “내가 수확한…내 모든 곡식과 재물…나 자신에게…네가…” 하면서 오로지 ‘나’라는 자신에게만 집중되어 있다. ‘나’가 인생의 유일한 목표요 주체로서 ‘내가 헐고, 내가 짓고, 내가 나에게 말하고, 내가 쌓아두었으며, 내가 먹고 마시며 즐긴다.’ 비유는 순전히 ‘나’와 ‘나의’라는 말들로 구성되어 있다. ‘어리석은 부자’는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하고 스스로 말한다. ‘rest, eat, drink, enjoy’ 전형적인 인간 욕구의 4가지 동사이다.

사실 이는 우리 모두에게 그리 낯설지 않은 인생 설계요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설령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각자의 마음 깊숙이 잠복하고 있으면서 부富와 재산의 증가가 우리 자신의 안전을 확실히 담보해 줄 수 있다고 믿는 내용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내용이 우리를 지배하게 되면 내가 소위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이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었는지 읽어낼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또 내가 운 좋고 풍요롭게 수확하고 가지게 된 것이 가지지 못한 가난하고 운이 없었던 이들과 나누고 공유해야만 하는 기회라는 생각조차 못 할 수가 있다. 자신의 재화에만 눈이 멀어 그것만 바라보면서 그 재화가 지닌 의미를 볼 줄 모르는 이러한 고독한 인간상은 우리 모두의 각자 안에 어느 정도씩은 존재한다.

3. “어리석은 자야

이런 이에게는 어느 순간 불현듯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 존재인지를 알려 주는 놀라움이 찾아든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루카 12,20-21) 어리석은 자에게 인생의 종말이 다가오고 그가 애써 축적한 것을 자신과 함께 지니고 갈 수 없다는 비유의 후반부이다. 인생의 끝에 가서야 나의 재산이 나를 행복하게 할 수 없으며 나의 참다운 인생을 담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자기가 가진 것에 취해 진실로 보아야 할 인간 실체를 보지 못한 눈먼 자이다.

“사람은 영화 속에 오래가지 못하여 도살되는 짐승과 같다. 이것이 자신을 믿는 어리석은 자들과 그들을 따르며 그 말을 좋아하는 자들의 운명이다.…영화 속에 있으면서도 지각없는 사람”(시편 49,13.21), “누가 부자가 된다 하여도, 제집의 영광을 드높인다 하여도 불안해하지 마라. 죽을 때 그 모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으며 그의 영광도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한다.”(시편 49,17-18) “그들은 양들처럼 저승에 버려져 죽음이 그들의 목자 되리라.”(시편 49,15) 부富와 재산, 그리고 소유가 우리를 구원할 수 있고 우리 인생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은 실로 치명적致命的인 환상임이 틀림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알게 모르게 우리 인생의 많은 선택에 이런 기준을 들이대곤 한다.

사실 예외 없이 누구에게나 찾아오게 마련인 죽음은 소유와 권력, 그리고 쾌락의 한계를 드러내면서 인간 각자에게 근본 존재를 맞닥뜨리게 한다. 각자가 자신의 죽음을 의식하고 살아갈 수만 있다면 도대체 우리 인생이 무엇인가 하는 깊은 질문을 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우리 인생의 한계와 허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를 물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야고보 사도께서 부자들에 대한 경고를 서술하기 전에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야고 4,14) 하고 말씀하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개미나 벌, 혹은 다른 동물들도 가끔 자기들의 양식을 축적한다. 그러나 인간은 양식뿐만 아니라 부질없는 잡동사니까지 축적하고 그에 묻혀서 자신을 잊고 마는 존재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무엇도 비축하거나 저축하지 말고, 대책 없이 그저 오늘 먹을 것에 만족하고 주저앉아 있으라는 것, 혹은 부유함이라는 것이 그저 사악하고 못된 것일 뿐이라는 것이 오늘 복음 말씀의 가르침은 아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다음 날을 준비하고 대비해야 하는 것이 우리 인간들의 근면성실이라는 미덕이다.

그러나 내가 모든 것을 이루어낼 수 있고, 그렇게 이루어낸 모든 것으로 내가 누리고 있는 풍요로움이 그저 내 것인 줄만 알고, 하느님 앞에 알몸으로 선 인간만이 참인간임을 잊을 때, 모든 것이 허무한 것이고 부질없는 것이며 일장춘몽이고 emptiness요 nothing이 되고 만다. 생각을 약간 비틀어서 부자가 가난한 이들을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자기만을 생각한다고 해서 그게 누구에게 피해를 준 것도 아니므로 뭐 그리 나쁠 것이 있느냐고 말할 수도 있다. 이때 ‘가난한 이’들을 보는 근본적인 시각이 두 가지 있을 수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가난’을 개인적인 노력과 근면의 부족이라고 보는 시각사회적 구조 탓으로 보는 시각이다. 많은 경우에 부유한 사람들은 가난이 개인의 노력 부족 탓이라고 보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헤어날 수 없는 구조 안에서 처절한 가난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은 것이 오늘 이 세상의 현실이기도 하다.

우리 죽음의 시간은 또한 우리 각자가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우리의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에 대해서 심판자이신 하느님과 만나 셈해야 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 시간에는 우리 각자 살았던 ‘지금, 여기’의 모든 진실이 드러나고야 말 것이다. 곧 ‘지상의 부’라는 식탁에 서로 형제자매가 되어 둘러앉아 가난을 물리치기 위해 나눔으로써 하느님의 뜻에 맞는 정의를 실천했는지를 물어야만 할 것이다. 이기심으로 오직 자신만을 위해 축적하고 다른 이와 그것을 나누지 않은 이, 하느님의 뜻을 좇아 자신을 풍요롭게 하지 않은 사람은 영원한 외로움에 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비유의 끝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루카 12,21) 하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많이 잊어버리고 살지만, 사람의 인생이 이 지상의 삶만으로 끝나지 않으며, 이 땅에만 재물을 쌓을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진정으로 구해야 할 것이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체사레아 지역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모든 것을 버리고 주교가 되었던 성 바실리오(330~379년)께서는 『과연 네 것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네가 네 생명의 시작에서부터 지금까지 어디에서 그것들을 얻었는가? 가끔 보면 부자들이란 여러 사람이 들어갈 수 있도록 마련된 극장에 혼자 자리를 잡고 앉아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하는 사람처럼 보일 때가 있다. 조금 먼저 왔다고 모든 자리를 사재기하는 것처럼 말이다.…네가 네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올 때 벌거숭이로 나오지 않았더냐? 이 세상을 떠날 때에는 역시 벌거숭이로 떠나가지 않을 것이더냐?

너의 것이라는 그 재화들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들이냐? 우연히 얻었다 하면,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결여된 것이고,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모르고 너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모르는 것이다. 한편 너의 모든 재화가 하느님에게서 온 것임을 안다고 하면, 어떤 이유로 그 재화를 얻었는지도 알아야 할 것이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차별하여 재화를 허락하신다고 해서 하느님께서 불공평하신 분이라고 생각하느냐? 어떤 이유로 어떤 이가 부자이고 어떤 이유로 어떤 이가 가난한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부자인 네가 착하고 정직하게 이 재화들을 사용하여 그 재화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한다면 그로 인하여 너에게 주어질 상급이 클 것이 아니겠느냐? 그러나 네가 결코 만족할 수 없는 탐욕의 자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헤매면서 많은 것을 가로채며 움켜쥐고만 있다면 과연 네가 그 누구에게도 불의한 적이 없다 할 수 있겠느냐?…

지금 너의 빵이라고 들고 있는 그 빵이 굶주린 다른 사람의 것일 수도 있고, 네 옷장에 보관해 둔 그 옷이 벌거벗은 누군가의 옷일 수도 있으며, 네 신발장에 넣어둔 그 신발이 누군가의 먼지투성이 맨발에 신겨져야 할 신발일 수도 있고, 땅 속에 묻어둔 너의 금화가 이 순간에 절실하게 필요한 누군가의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네가 도와줄 수도 있었던 누군가를 도와주지 않은 불의를 하느님이 아닌 네가 저지르고 있다.』 한다. 아멘!

One thought on “연중 제18주일 ‘다’해(루카 12,13-21)

  1. 내것이 없음을…
    나눔의 삶이
    참 쉬운듯 어려운듯
    기꺼이 내줌이 왜이리 어려운지
    생각해봅니다.

    불의를 저지르지 않도록 마음 챙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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