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시면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마태 6,12)라고 기도하라 하신다. 그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다음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우리말 번역 “잘못”을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마태 6,14-15)라고 하시면서 “잘못”을 “허물”이라는 말로 바꾸며 강조하듯 거듭 말씀하신다. 우리는 자칫 ‘잘못’이나 ‘허물’을 누군가가 나에게 실수하거나 기분 나쁘게 한 것을 용서하고 한 번 넘어가 주며 봐주라는 말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아야 하는 내용이 있다.
예수님께서 주님의 기도에서 말씀하시는 “잘못”이라는 말은, 성경의 언어인 희랍말 복수형으로서 ‘오페이레마타(ὀφειλήματα, opheilēmata)’라는 말인데, 이 말을 영어로 옮기면 ‘빚, 부채, 채무’라는 뜻의 ‘debts’가 되고 실제 현대 영어 번역에서도 이를 그대로 옮겨 “forgive us our debts, as we forgive our debtors”라고 한다. 또한 뒤에 오는 절에서 예수님께서 “잘못”과 거의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는 “허물”이라 하신 말씀은 희랍말로 ‘파랍토마타(παραπτώματα, paraptōmata)’인데, 이를 영어로는 ‘transgressions(혹은 trespasses, offenses, sins, 한계를 넘어 무엇인가를 저지르고 죄를 범한다는 뜻에서 ‘죄’라는 개념으로까지 나아간다)’이라고 옮긴다. 그래서 우리 가톨릭교회의 ‘주님의 기도’에서는 「…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라고 하면서 예수님께서 ‘잘못’을 ‘허물’로 대치하신 것을 ‘죄’로 다시 대치한다. 이는 결국 “잘못·허물·죄”라는 말들이 모두 같은 말로 사용되고 있으며, 인간이 서로 간에 짓는 “잘못·허물·죄”들이 모두 뜻으로 보아서는 하느님 앞에 진 ‘빚이며 부채요 채무’라는 말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마태 18,23-35(매정한 종의 비유)에서도 “빚진 사람”을 말할 때 6장에서처럼 역시 ‘오페이레마타’라는 똑같은 말이 사용된다. 다시 말하여, “저희에게 잘못한 이”(마태 6,12)는 ‘저희에게 빚진 사람’이나 ‘저희에게 죄지은 사람’, ‘저희에게 허물을 끼친 자’라는 뜻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는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품삯이 선물이 아니라 당연한 보수로 여깁니다.”(로마 4,4)라는 구절에서 “품삯”이라는 말을 할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허물’에 해당하는 ‘파랍토마타’라는 단어를 똑같이 사용하는데, 이는 ‘잘못·허물·죄·부채·품삯(=지급해야 할 돈이라는 뜻)’이 적어도 성경의 언어에서는 모두 동의어라는 말이 된다.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의 ‘잘못·허물·죄·부채·품삯’을 모두 깨끗하게 탕감해주실 뿐만이 아니라 오직 사랑 때문에 그것을 스스로 갚느라고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을 희생 제물, 속죄 제물로 삼으시고 몸소 인간을 위한 제물이 되신다. 그래서 하느님의 인간 구원에는 몸값을 받고 종의 신분을 풀어 주어 양민이 되게 하던 일을 가리키는 ‘속량贖良’(재물을 바치고 죄를 면제받음)이라는 말이 사용된다. 이처럼, 하느님의 은총을 입고 또 입은 인간이라는 존재는 이웃 간에도 이웃의 ‘잘못·허물·죄·부채·품삯’을 면제해주어야만 한다. 하느님께 빚진 존재로서 면제해주지 않을 수가 없다.
인간관계에서 벌어지는 각종 ‘잘못·허물·죄·부채·품삯’은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이 하느님께 그대로 고스란히 보상하고 갚아야 할 ‘잘못·허물·죄·부채·품삯’이다. 마태오복음 제18장은 온통 이 이야기이다. 인생을 살다가 내 이웃 형제의 ‘잘못·허물·죄·부채·품삯’을 만나면, 그 형제의 ‘죄’를 슬기롭게 깨우쳐 주고(마태 18,15-18), 그 형제와 함께 기도하며(마태 18,19-20), 그 형제를 몇 번이고 용서해야만 한다.(마태 18,21-22) 내가 하느님에게서 말도 안 되는 엄청난 은혜와 자비를 입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내 형제에게 은혜와 자비를 베풀고 내 형제의 ‘잘못·허물·죄·부채·품삯’을 탕감해주지 않는다면, 나는 “매정한 종”이어서 고문 형리에게 넘겨져 고통받을 것이고, 마지막 한 푼까지 내 빚을 다 갚다가 영원한 죽음에 이르고 말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출발점이자 귀결점은 이처럼 하느님 앞에 인간이 저지른 ‘죄’이다.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이 얼마나 큰 은혜를 입었는지, 또 얼마나 큰 빚을 탕감받고 면제받았는지,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러한 인간을 되사기 위해서 어떤 대가를 치렀는지, 그리고 이 모든 ‘인간의 구원사’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아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이다.
하느님 앞에 저지른 인간의 ‘죄’는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이사 1,18) 하였으니, 씻어야 할 더러움이다. ‘죄’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하였으니, 벗어야 할 짐이다. ‘죄는 “하느님께서 값을 치르고 여러분을 속량해 주셨습니다.”(1코린 7,23) 하였으니, 하느님께 갚아야 할 빚이다.
※참고: <Sin: a History> by Prof. Gary Anderson, *우리말 번역본: <죄의 역사> 크리스채너티, 201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