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2장
영혼의 이 두 부분에는 네 단계의 이성이 있다
솔로몬의 궁전(성전)에는 안마당이 셋이 있었다. 첫째 것은 외교인과 타국인들을 위한 것으로서 하느님을 흠숭키 위하여 예루살렘에 오는 이들을 위한 것이었고, 둘째 것은 이스라엘의 남정들과 부녀자들을 위한 것이었으며(솔로몬은 남녀를 분리하지 않았었다), 셋째 것은 사제들과 레위 족속들의 반열을 위한 것이었다. 끝으로 제일 깊숙한 최고 중심인 곳에는 지성소至聖所라는 데가 있었다.(참조. 히브 9,3) 그리고 거기에는 일 년에 꼭 한 번씩, 대사제만이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참조. 히브 9,7)
그런데 우리의 이성, 또는 더 잘 알아듣게 말해서, 우리의 영혼은 이성적인 성질의 것이니만큼, 위대하신 하느님의 참다운 궁전이 되며, 또 하느님께서는 매우 특이한 방법으로써 영혼에 머무시는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노께서는 “나는 당신을 내 밖에서 두루 찾았사오나, 영영 당신을 찾지 못하였사오니, 이는 당신이 내 안에 계셨기 때문이로소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신비로운 성전, 즉 사람의 영혼에도 세 가지의 안마당이 있다. 즉 이성의 세 가지 서로 다른 단계가 있는 성전이 있다. 첫째의 것은 감각의 경험에 의한 것이고, 둘째의 것은 인간적 지식에 관한 것이고, 셋째의 것은 신앙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거기에는 이성적이며 영신적이며 추리의 광명에 의해 인도되지 않고, 이성에 의해서도 인도되지 않고 오로지 지성의 아주 단순한 직관으로 이루어지는 기능의 가장 훌륭하고 탁월한 최고의 지점이 있으니, 이것은 의지에 단순한 감정에 의해서 움직여지며 이 기능의 힘으로 진리에 동의하게 되고 하느님의 뜻에 복종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영혼의 이 최고 절정, 또는 정수頂首, 또는 정신의 최고 지대는 바로 옛날 성전의 지성소로써 아주 잘 상징되어 있다.
왜냐하면 첫째로 지성소에 광선이 들어오는 창문이 없다. 따라서 여기서 해당하는 정신의 단계에는 빛을 비추어 주는 추리 작용이 없다. 둘째로, 지성소에는 모든 광선이 정문(출입문)을 통하여 들어온다. 그리고 여기에 해당하는 정신의 단계에는 신앙을 통해서만 무엇이 들어오는데, 신앙은 마치 광선과 같이 하느님의 기뻐하시는 뜻과 아름다움과 좋으심을 드러내 감득하게 한다. 셋째로, 대사제가 인도하지 않으면 아무도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다. 그리고 영혼의 이면에 해당하는 정점에는 추리 작용이 접근치 못하므로 오로지 위대하고 보편적이며 최상의 직관만이 들어오는데, 이것은 하느님의 의지가 최고로 사랑을 받아야 하고 인정되어야 하며 포옹 받아야 하되, 어떤 일을 위해서만 특별히 그러해야 할 뿐 아니라, 모든 일을 위해서 일반적으로 다 그러해야 하며, 또 만사에 있어 일반적으로 다 그러해야 할 뿐만 아니라, 만사에 있어 아주 개별적으로 그러해야만 하는 것이다. 넷째로, 대사제는 지성소에 들어가면서, 출입문으로 들어오는 광선을 가려 버리며, 향로에 향을 넣어 피움으로써 향연이 문으로 들어오는 빛을 막게 한다. 이처럼 영혼의 최고 절정에도 모든 광명은 그 영혼이 행하는 자아 포기에 의해서 좀 어두워지고 가리워진다. 그래서 자기에게 제시되는 선의 진리와 진리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러한 것을 소유하고 흠숭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보기 시작하자마자, 영혼은 자기 눈을 감아버리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는 하느님의 뜻을 살펴보는 데에만 열중치 않고 오히려 보다 더 효과있고 완전하게 그 뜻을 받아들일 수 있기 위하여 눈을 감게 되며 나아가서는 끝없는 절대적인 동의로써 일치하고 따르기로 힘쓰게 된다.
마지막으로 다섯째는, 그 지성소에 계약의 궤가 있다. 그리고 그 궤 속에는 적어도 십계판과, 황금 그릇에 담은 만나 가루와 하룻밤 새에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은, 아론의 지팡이가 들어 있다.(참조. 히브 9,4) 또 이와같이 정신의 최고 상봉에도, 첫째, 그릇에 감추어진 만나가 상징하는 신앙의 빛이 있으며, 이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신비의 진리를 따르게 되며, 둘째로, 아론의 꽃피고 열매 맺는 지팡이가 상징하는 망덕의 유익성이 있으니, 이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선에 대한 약속을 따르게 되며, 셋째로, 하느님의 계명 속에서 상징되는지 극히 거룩한 애덕의 감미로움이 있으니, 이 안에 계명이 이해되고 내포되어 있으며, 이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가 거의 느끼지 못하는 일치, 즉 하느님의 정신과 우리의 정신과의 일치를 승인한다.
왜냐하면 비록 신덕과 망덕과 애덕이 하느님의 여러 활동을 영혼의 모든 기능에 미치게 할지라도 그것은 이성적이며 또한 감각적인 것이니, 그 정당한 권위 밑에 귀납시키고 거룩히 예속시키기 때문이며, 또 만일 그 특수한 내재(內在)나 진정하고 자연 본성적인 머무름이 있을 경우, 그것은 영혼의 이러한 최상지점 안에 있는 것으로서, 마치 생수生水의 근원에서처럼, 내적 부분과 여러 기능 위에 갖가지 분수를 뿜어 시내처럼 흐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테오티모여, 이성의 윗부분에는 이성의 두 가지 단계가 있다. 그중의 하나에는 신앙과 초자연적 광명에 의거한 논리가 이룩되고, 다른 하나에는 신덕과 망덕과 애덕의 아주 단순한 동의가 이루어진다. 성 바오로의 영혼은 스스로가 두 가지 열망에 의하여 쫓기고 있음을 알게 되었으니, 하나는 육체로부터 빠져나와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늘에 가고자 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 세상에 남아 있으면서 뭇 영혼들의 회개를 위하여 일하고자 하는 것이었다.(참조. 필리 1,23-24) 이 두 가지 열망은 의심 없이 다 영혼의 상부에 있는 것들이었으니, 그것은 둘 다 애덕에서 나온 것이었고, 후자를 따르려는 결심은 추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주님의 뜻을 아주 단순히 직관하여 직감한 데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위대한 종의 정신의 절정은 추리에서 생기는 온갖 결론을 물리치고 주님의 의지만을 수락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만일 신덕과 망덕과 애덕이 정신의 최고 절정에 있는 이 거룩한 승낙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라면, 신앙의 빛에 의존되어 있는 추리 작용이 어떻게 영혼의 하부에서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우리는 법정에서 변호사들이 어떤 사건이나 당사자 쌍방의 권리에 대하여 많은 추리를 해 가며 토론하는 것을 본다. 또 법원에서는 온갖 난관을, 한 마디 판결로써 일단락을 짖는다. 그리고도 변호사들과 방청객들은 권위의 판결이 내려진 동기에 대하여 함께 따지고 캐기를 그치지 않는다.
이와 꼭 같이, 테오티모여, 추리가 끝난 후에도, 또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 정신의 최고 정상부를 설복시켜 동의케 한 후에, 즉, 일종의 판결문 발표와 같은 신앙 행위를 형성케 한 후에, 우리의 지성은 이미 받아들이고 생각해 버린 신앙에 대하여 새로이 그 이유와 동기를 고찰키 위하여 다시 추리하고 따져 보기를 그치지는 않는다. 그러나 신학적인 추리가 영혼의 상급부에서 될지라도, 그 동의는 최고로 드높은 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 거기에 우리 정신의 최고 의결구조가 있는 것이다. 우리 이성의 이 네 가지 다른 차이, 또는 단계를 앎은 여러 가지 영신적인 것을 다루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므로, 나는 그것을 되도록 충분히 설명하고자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