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토요일 밤에 파스카 성야를 지낸 교회는 ‘사흘 때 되는 날’에 이르러 주님의 부활을 맞는다. 참으로 죽으셨던 분이 되살아나시어 “살아 계신 분”(루카 24,5)이 되셨다. 그저 우리가 늘 하는 말로 ‘산다’라고 하는 말대로 그저 ‘사는 분’이 아니다. 진정 ‘살아 계신 그분(The Living)’, ‘우리의 주님’이시다.
파스카 성야를 통하여 교회는 인류의 창조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신 인간의 구원사 전체를 거행한다. 창조주께서 피조물 가운데 피조물, 인간들 가운데 인간이 되고자 원하셨고, 우리와 똑같은 몸과 살이 되고자 원하셨다. 감히 우리가 이해하는 인간의 용어로 그렇게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인간의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가 다른 이를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한 여인 마리아에게서 몸을 취하시고자 원하셨고, 성령으로 나신 예수 안에서 몸을 취하고자 원하셨으며, 보고 식별할 줄 아는 눈이 되고자 원하셨고, 우리와 대화하고 우리의 언어를 말하는 입이 되고자 원하셨으니,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오로지 “모두 훌륭”(마르 7,38)하고, “좋은 일”(사도 10,38)이 되기만을 하고자 원하신 것이다. 실로 그분께서 ‘말씀’과 ‘기쁜 소식’뿐만 아니라 당신의 몸과 피,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기억하여 선포하고 거행하는 성체성사, 언제까지라도 결코 다함이 없는 성체성사를 남겨주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참조. 루카 22,19-20)
그러므로 복음을 가리게 될 뿐인 어쭙잖은 우리 인간의 말을 더하려는 유혹에 빠지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온전히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루카가 전해주는 복음을 따라간다.
※ ‘주님 부활 대축일’의 낮 미사 전례복음은 ‘가, 나, 다’해 모두 공통으로 요한 20,1-9를 취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각각 해당하는 전례력의 해에 따라 마태 28,1-10 / 마르 16,1-7 / 루카 24,1-12를 선택할 수도 있다. 올해는 루카복음의 해이므로 이미 ‘파스카 성야’에서 전례복음이었던 루카 24,1-12를 다시 따라간다.
1. “주간 첫날 새벽 일찍이 그 여자들은…”
“주간 첫날 새벽 일찍이 그 여자들은 준비한 향료를 가지고 무덤으로 갔다.”(루카 24,1), 안식일 다음 날, 마침내 드러난 주님의 날, 갈릴래아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 예수님을 동행하여 “예수님과 함께 온 여자들”(루카 23,49 참조. 루카 8,1-3), 성금요일에 예수님의 “무덤을 보고 또 예수님의 시신을 어떻게 모시는지 지켜본”(루카 23,55) 예수님의 여성 제자들이 “준비한 향료를 가지고 (예수님의) 무덤으로 갔다.” 이는 예수님의 죽음이 있었던 오후 3시에 이미 해가 지면서 안식일이 시작하고 있었고, 따라서 장례를 치를 시간만 있었으며 시신에 기름을 바르는 의식을 치를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참조. 루카 23,56)
그러나 자기들이 모시던 랍비요 예언자이셨던 분의 몸에 변치 않는 사랑으로 기름을 발라 드리려고 온 여인들이 “보니 무덤에서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다.”(루카 24,2) 예수님의 시신을 보존하기 위해 돌로 봉해놓은 무덤이 열려 있었고, “그래서 안으로 들어가 보니 주 예수님의 시신이 없었다.”(루카 24,3) 무덤이 비어있었다. 이어서 루카는 “여자들이 그 일로 당황하고 있는데…”(루카 24,4)라고 기록한다. 여인들이 “ᾰ̓πορῐ́ᾱ(아포리아)”, 당황하며 어찌할 바를 몰라 놀라고 난감하여 실망하면서 허둥지둥하였다. 그들이 보고 따랐으며 모셨던 분의 시신, 마지막으로 기름이라도 발라 드리고 안아드리고자 했던 분의 시신이 거기에 없었다. ‘당황스러운 부재不在’이다. 도대체 예수님을 어디에서, 누구에게 물어 되찾아야 한단 말인가? 당황한 여인들을 그 당황에서 구해줄 이들이 누구일까? 아무도 없었고, 그 어떤 실마리도 없었다. 오직 하느님 편에서의 계시, 하느님의 말씀만이 빈 무덤에 대한 의미와 중요성을 주실 수 있으며, 인간 편에서는 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 갔을까, 혹시라도 정말 돌아가신 것이 아니었을까, 제자들 편에서 뭔가 일을 꾸민 것은 아니었을까, 예수님을 해친 자들이 그 시신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다시 모여들 것을 우려하여 치운 것은 아닐까 하는 식의 온갖 상상과 추측, 가설만이 존재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2. “눈부시게 차려입은 남자 둘”
당황하고 있는 여인들에게 “눈부시게 차려입은 남자 둘이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때처럼 선포해야 할 말씀을 가지고) 그들에게 나타났다.”(루카 24,4) “천사들의 발현”(루카 24,23)이었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때에 “두 사람이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루카 9,30-31)라고 했던 것처럼, 두 천사가 여성 제자들에게 나타났다. 성경의 언어를 이해하는 이들에게 두 남자는 구약의 언약에서 하느님을 말씀을 계시하는 모세와 엘리야, 곧 율법과 예언이다. “예수님께서 올라가시는(승천) 동안 그들(사도들)이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는데, 갑자기 흰옷을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사도 1,10) 하느님의 오른편에 계시는 예수님의 현존을 계시하여 주었던 것처럼 천사들이 여성 제자들에게 나타나자,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으로 숙이자 두 남자가 그들에게 말하였다.”(루카 24,5) 여자들은 예수님께서 이미 “(주님의 날에)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루카 21,28) 하셨음에도 아직 두려움에 눌려 얼굴을 땅으로 숙인다.
그러자 모세와 엘리야가 여인들에게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루카 24,5ㄴ)라고 말한다. 여인들이 주님을 찾고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시신을 찾아 그분의 시신이 부패하지 않도록 기름을 발라 드리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아질 분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진정 살아계신 분’으로서 살아계신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찾아야 할 분이었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파견된 이들이 겁에 질린 여인들에게 천둥 번개 같은 계시를 전한다. “어찌하여…찾고 있느냐?” 하는 꾸지람 같은 질문은 모두가 거듭해서 새겨야 할 질문이다. 여성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 헤맸으나 잘못된 길에서 찾고 있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루카 20,38)이라고 밝혀주셨으므로 예수님도 그분이 진정 살아계신 분이심을 발견할 때까지 “산 이들” 가운데에서 찾아야만 한다.
복음사가 루카는 이미 자기 복음의 서두 부분에서 예루살렘에서 갈릴래아로 돌아가던 길에서 예수님을 잃었다가 예수님을 찾아 헤매는 성모님과 요셉의 이야기를 전해주면서(참조. 루카 2,43-45) 마침내 사흘이 지나서야 성전에서 예수님을 찾아내고 무척 놀란 부모에게 예수님께서 마치 책망이라도 하듯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 하셨다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해준 바 있다. 예수님을 찾고 싶다면 마땅히 “아버지의 집”, 참으로 ‘살아계신 분’과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찾아야만 한다. 살아계시는 예수님께서 살아계신 분과 함께 계신다.
두 천사는 질문에 이어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루카 24,6ㄱㄴ) 하고 선포한다. 부활 선언이자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고백이다.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모두 그 증인입니다.”(사도 2,32;3,15) 한 그대로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성령의 힘으로 다시 살리셨다.(참조. 로마 1,4) 이어지는 천사들의 세 번째 계시는 “그분께서 갈릴래아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기억해 보아라.”(루카 24,6ㄷ)이다.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루카 24,7) 하며 천사가 여인들에게 기억해 보라고 한 내용은 이미 예수님께서 4번이나(참조. 루카 9,22.44;17,25;18,31-33) 거듭하여 말씀하셨음에도 이해하기 어려웠던 그 말씀이다. 여인들은 천사에게서 그 기억을 되살리라고 초대받는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던 두 번째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루카 9,44)라고까지 하셨던 말씀이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계시가 당신 제자들에게 그렇게도 간곡하게 거듭 반복되었음에도, 제자들은 하나같이 이 말씀을 잊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그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치기까지 했었고, 예수님을 지극정성으로 곁에서 따랐던 여성 제자들마저 그 말씀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으며, 심지어 베드로는 불신의 늪에 빠져 예수님 곁에 있어 본 적도 없었노라고 배반하기까지 했었다.
3. “여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내었다.”
그러나 천사가 기억해 보라고 초대하자마자 “여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내었다. 그리고 무덤에서 돌아와 열한 제자와 그 밖의 모든 이에게 이 일을 다 알렸다.”(루카 24,9)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자 여성들 안에 믿음이 되살아나 그들은 ‘사도(파견받은 자)’가 되고 ‘선교사’가 되어 무덤을 떠난다. 당황과 몰이해가 극복되고 여인들 안에 부활 신앙이 살게 된다. 여인들은 이제 예수님 부활의 첫 번째 증인들이 된다. 이에 복음사가는 “그들은 마리아 막달레나, 요안나, 그리고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였다. 그들과 함께 있던 다른 여자들도 사도들에게 이 일을 이야기하였다.”(루카 24,10)라면서 몇몇 이름과 함께 첫 선교사 그룹 여인들을 알려준다. 이 여성 그룹이 사도들의 전통에서 부활 증인으로 더는 거론되지 않지만, 모든 복음서는 부활 증인의 첫째 그룹이 예수님의 여성 제자들이었다는 점에서는 하나같이 일치한다.
여성들이 사도들에게 전해준 부활의 증언을 두고 “사도들에게는 그 이야기가 헛소리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사도들은 그 여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루카 24,11) 한다. 사도들이 여인들이 전하는 소식을 그저 말하기 좋아하는 여성들의 수다나 뭔가에 홀려 착각한 미친 소리, “헛소리(λῆρος, lêros, nonsense, idle talk, folly)” 정도로 여겼으므로 여성들의 부활 증언이라는 첫 번째 사명 수행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수포가 되고 만다. “그러나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으로 달려가서 몸을 굽혀 들여다보았다. 그곳에는 아마포만 놓여 있었다. 그는 일어난 일을 속으로 놀라워하며 돌아갔다.”(루카 24,12) 베드로에게 자신이 목격한 사실은 “속으로 놀라워함”으로 남는다. 긴가민가 불확실함과 혼란이다. 빈 무덤을 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스스로 설명을 찾아보려 애쓰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주님께서 몸소 베일을 걷어 올려주시고 수수께끼처럼 여겨지는 것들의 의미를 계시해주셔야만 한다.
사실,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루카 24,34) 하고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확인한 대로, 몸소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을 찾아가 그들을 만나시고 당신의 부활을 또다시 거듭거듭 확인해주셔야만 하실 분은 부활하신 주님 당신이시다. 아멘!
보아야 믿고. 만져야 믿는 우리에게
몸소
보여주시는 주님.
어리석은 저희들입니다.
부활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