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8주일 ‘다’해(루카 6,39-45)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루카 6,42.45) by Maria Cavazzini Fortini

2주 전부터 우리는 계속해서 열두 사도와 함께 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께서 마태오복음의 ‘산상설교’와 대비하여 이른바 ‘평지설교’라고 알려지는 대목을 듣는다. 행복과 불행에 관한 선언, 그리고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에 이어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그들에게 이르셨다.”(루카 6,39) 하며 예수님을 믿는 이들의 공동체 구성원들의 생활 수칙처럼 예수님의 다양한 말씀과 단어, 그리고 이미지들을 수집하여 “비유”로 수록한다. 격언이나 속담과도 같은 5개의 짧은 비유들, ① “눈먼 이”(39절), ② “제자와 스승”(40절), ③ “너와 너의 형제…눈 속의 들보와 티”(41-42절), ④ “두 나무…나무와 열매”(43-44절), ⑤ “두 사람…마음과 곳간”(45절)이 등장한다.

1. “눈먼 이가 눈먼 이를들보제자스승

비유가 이어진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제자가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루카 6,39-42) 절별로 끊어서 말할 수 없는 비유는 두 눈먼 이, 제자와 스승, 너와 형제, 두 들보, 두 티, 너의 눈과 나의 눈, 두 사람 등 대비되는 둘의 모습으로 단숨에 읽힌다. 이러한 문형은 분명 그 말을 듣는 이의 마음과 머리에 각인되도록 하는 수사적 기법이다.

비유는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 없지 않으냐?”라는 누구나 인정할만한 질문이 아닌 질문으로 시작한다. 이 질문을 받는 대상은 과연 누구일까? 제자들은 누구나 자기 자신의 무능이나 실수를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누군가를 가르치려 드는 유혹에 빠진다.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 안에서도 권위를 가지고 다른 이들을 인도하고 가르치지만, 간혹 구덩이에 빠지는 수모를 겪는 지도자들이 많다. 그러한 이들은 먼저 자기 자신과 자기의 행실을 점검하지 않으면서 다른 이의 죄를 비난하고 다른 이의 행실을 가혹하게 단죄한다. 마태오복음은 이들을 “눈먼 인도자들”(마태 15,14;23,16)이라고 호칭하고, 제4복음서는 자신이 눈먼 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서 죄의 상태에 머물고, 회심할 가능성조차 없는 지도자들을 향한 가르침을 깊이 있게 전해준다.(참조. 요한 9,39-41)

물론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 안에서 일정 부분 책임을 맡아 다른 이를 인도하고 가르치며 교정해야만 하는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이라면 자기 자신이 스스로 살지 못하는 내용을 제시해야 하며 다른 이의 죄를 감히 판단해야 하는 때도 있을 것이다. 자기가 하는 말로 자신을 단죄하며 이런 직무를 수행하는 이들은 자신의 죄에 비추어 다른 이들의 죄를 적어도 단죄하지는 않으려는 소극적 삶을 산다. 그렇지만 많은 경우 다른 사람의 결점을 지적함으로써 나 자신의 양심이 나에게 지적하는 바를 회피하고 나를 방어하려는 유혹도 크다. 한편에서는 다른 이의 소홀함을 비판하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나를 비판해오는 다른 이들로부터 나의 양심을 방어하느라 오히려 다른 이의 잘못을 눈감아 주려는 타협도 하면서 그렇게 살기도 한다. 내가 누군가를 “인도”해야 하는 직무를 수행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을 엄하게 관리하려는 노력, 세심한 양심 성찰, 다른 사람을 병적으로 감시하는 비판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인간의 본성 안에 숨어있는 악을 식별하는 지혜를 구해야 한다. 나 자신이 그렇게 살지 못하면서도 ‘바른 말’을 해야 하는 신분은 참 괴롭고 어렵다. 내 안에 남아 있는 악의 뿌리를 깊이 보려는 솔직함, 다른 이의 못된 점을 염탐하고 이를 찾아내 즐기려는 나의 못된 속성 등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어지는 비유는 참된 양성養成의 관계를 밝혀주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이다. 제자는 스승을 따르고 스승의 가르침과 양성을 받아들이며 배움에 감사한다. 라삐의 전통 안에서 제자는 스승의 입을 통해서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스승 곁에 있으면서 제자로서 품위를 잃고 제멋대로 자기 안에 갇히는 일이 없이 겸손하게 스승의 삶을 함께 나누며 배운다. 그러므로 제자는 결코 스승을 능가할 수 없으며, 양성이 끝나면 그동안 배움을 주신 스승에게 감사하고 자신도 스승이 될 수 있도록 스승의 길을 밟는다. 좋은 제자는 스승을 알아 모시고 스승처럼 되고 싶어 스승을 닮으려다가 스승이 되고, 스승은 제자를 아껴 전해야 하는 바를 지극 정성을 다하여 전하면서 비로소 진정한 스승이 된다.

2. “위선자야형제아우

비유에서 너는 어찌하여라고 하면서 호칭이 2인칭 단수로 바뀐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루카 6,41-42) 한다. 그리스도인은 공동체의 일상 안에서 공동체의 필요에 따라 형제의 잘못을 교정하도록 부르심을 받을 수도 있다. 이 부르심은 함께 길을 가면서 서로를 격려하고 교정하여 서로 돕는 것을 말한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서로를 교정한다는 것이 형제의 약점을 공격하거나 사실을 밝힌다고 해서 그것이 형제를 기분 나쁘게 하는 것이 아니며, 그 형제가 이미 마음속에 느꼈을 죄책감을 굳이 끌어내 공공연하게 단죄하는 것이 아님을 밝히신다.

누군가의 약점을 교정하는 것은 누군가의 약점을 비난하는 것, 다른 이를 공공연하게 못된 이로 만드는 것, 상대방을 단죄하기 위하여 마음속에 떠오르는 대로 소리를 내지르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불행하게도 교회 안에는 이런 일들이 많다. 심지어는 뉘우치고 용서하며 화해하자는 자리에서조차도 이런 행동들이 벌어져서 공동체를 이루기보다는 분열과 적대감을 증폭시키고, 일치를 촉진하기보다는 분리를 자아내고 마는 일이 허다하다. 형제자매들의 허물과 잘못, 그리고 죄들은 우리를 놀라게 하고 우리를 방해하며, 상처를 주고, 참된 우리 자신이 되지 못하도록 우리에게 스캔들이 되고 우리를 화나게 하며 상대방을 비난하고,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을 진실하고 진지하게 바라보는 것을 방해한다. 이럴 때 우리는 다른 형제에게서 “들보”라고 생각하는 것이 나 자신에게서는 “티”로 느껴진다. 타인은 단죄하고, 나는 변명한다. 그런 우리를 두고 예수님께서는 “위선자야!” 하신다. “위선자”는 거짓 영이 함께 하는 자이고, 참된 것을 보지 못하는 자이며, 드러난 것과 감추어진 것, 속과 겉으로 나뉜 자이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는 형제적인 교정은 중요한 참사랑의 작업이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 투덜대거나 험담을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내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야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루카 6,42)이라 하신다. 우리가 위선을 피하면서 분명하고도 뚜렷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사랑, 정직, 그리고 겸손으로만 가능하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께 온전히 내어드릴 때 그리스도께서도 온전히 당신을 우리에게 내어주시어 당신을 계시하시고, 그리스도의 눈매로 보게 하신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의 맑은 눈으로 우리 자신과 형제를 볼 수 있게 된다. 이를 두고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의로움을 보여주시어, 당신께서 의로우신 분이며 또 예수님을 믿는 이를 의롭게 하시는 분임을 드러내십니다.”(로마 3,26ㄴ)라고 표현한다.

예수님의 이 비유를 기록하면서 루카는 “형제”와 “아우”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와 교회 공동체로 그 의미를 확장하고 있다. 같은 내용을 전하는 마태오가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 안에서 “단둘이 만나…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교회에 알려라” 하면서 형제적 교정을 위한 절차적 실행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참고. 마태 18,15-17), 루카는 이러한 형제적 교정이 복음적이어야 한다는 듯이 형제의 심판관이 되지 말고 자신도 죄인임을 인식해야 하며,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으며”(루카 15,2) 그들을 용서하러 왔다 하신 스승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겸손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3. “좋은 나무나쁜 나무열매

예수님의 비유 말씀에 이어 오늘 복음은 “좋은 나무”와 “나쁜 나무”, “가시 나무”와 “포도” 나무, “무화과” 나무 등의 이미지로 끝난다. 예수님께서는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또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루카 6,43-44)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나무들을 예로 드시면서 이를 인생에 비겨 삶이 맺는 “열매”라는 기준으로 참 제자와 거짓 제자를 구별하라고 초대하신다. 말이나 선언, 고백이나 심지어 그럴듯한 기도까지도 예수님의 제자라는 진정한 기준이 되지는 못한다. 제자로서의 행실과 그 행실이 맺는 열매만이 유일한 기준이다.

“마음”은 “선한 것”이나 “악한 것”이 쌓이는 “곳간”과 같다. 잠언은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켜라. 거기에서 생명의 샘이 흘러나온다.”(잠언 4,23) 하며 특별히 마음을 지킬 것을 가르친다. 마음은 성경에서 하느님과의 접촉점이 되는 인격의 가장 깊은 원천이다. “마음”은 모든 인간 존재의 감정과 의지, 그리고 행동의 원천이다. 마음에 사랑이 있는 사람의 행실은 주변에 사랑의 열매를 맺는다. 그러나 마음에 악이 있어 그 악이 그 사람을 지배한다면 그 사람의 행실은 주변에 악의 열매를 맺는다. 말과 행실은 마음의 창고에서 나오는 산물이다. “마음에 가득 찬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참조. 마태 12,34-35)

속마음이 나쁜 사람은 악한 것을 말하고, 그것을 행하여 주변에 결국 악영향을 미친다. 마음이야말로 모든 인간의 느낌과 감정, 의지와 존재 자체가 우러나오는 샘터이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루카 6,45) 마음에 사랑과 선함이 자리 잡고 있으면 그 행실도 선함이 될 것이지만, 그 마음에 미움과 악이 자리 잡고 있으면 그의 행실이 짓는 모든 내용도 부정적인 것이 되고 악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항상 선한 마음자리를 위한 식별과 분별의 은총을 청하라는 초대를 받는다. 아멘!

***

「……먼저 우리의 보는 방식에 관해 살펴봅시다. … 남의 결점은 티끌처럼 작은 것까지 미세하게 살펴보면서, 우리 자신의 결점은 가볍게 여기고 크게 비중을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 우리는 항상 남을 탓하고 자기 자신을 정당화할 이유를 찾습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우리는 사회와 교회와 세상에서 잘못된 일을 두고 불평하기 일쑤입니다. 우리 자신을 먼저 문제 삼지 않고, 무엇보다 우리 자신을 먼저 바꾸겠다고 노력하지도 않고 말이죠. 유익하고 긍정적인 모든 변화는 우리 자신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변화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눈먼 이처럼 보게 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설명하십니다. 그리고 만일 우리의 눈이 멀었다면, 다른 사람들을 위한 지도자나 스승이 될 수 없습니다. 참으로 눈먼 이는 눈먼 이를 인도할 수 없습니다(39절 참조).

…주님께서 ‘우리의 눈을 다시 씻어내라’고 초대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우선 우리의 비참을 깨닫게 하시려고 우리의 내면을 살펴보라고 요구하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결점을 볼 수 없다면, 우리는 항상 다른 사람들의 결점을 부풀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의 잘못과 우리의 비참을 깨닫는다면, 우리에게 자비의 문이 열립니다. 그리고 우리의 내면을 바라본 다음,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바라보시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라고 초대하십니다. 이것이 비결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바라보시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악이 아니라 선을 먼저 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이런 방식으로 바라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서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보지 않으시고, 잘못을 저지르는 자녀를 보십니다. 그분께서는 관점을 바꾸십니다. 곧, 잘못에 주목하시는 게 아니라, 잘못을 저지르는 자녀에게 주목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그 사람과 그의 잘못을 구별하십니다. 늘 사람을 구원하십니다. 항상 사람을 믿으시고 언제나 잘못을 용서하실 준비가 돼 있으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언제나 용서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하라고 초대하십니다. 곧, 다른 사람들에게서 악을 찾는 게 아니라 선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보는 방식에 대해 말씀하신 후,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말하는 방식에 관해 성찰하도록 초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45절)이라고 설명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말투를 보면 그 사람의 속마음을 단도직입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는 우리가 누구인지 말해줍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우리는 우리가 하는 말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피상적으로 말합니다. 하지만 말에는 무게가 실려 있습니다. 말은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고, 우리의 두려움과 우리가 실현하려는 계획에 목소리를 내며,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의 말을 하게 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는 언어로 편견을 부추기고, 장벽을 높이며, 공격하거나 심지어 파괴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언어로 우리의 형제자매들을 파멸시킵니다. 험담은 상처를 입히고 중상모략은 칼보다 더 날카로울 수 있습니다! 오늘날, 특히 디지털 세계에서 말은 급속도로 퍼져나갑니다. 그러나 너무 많은 말들이 분노와 공격성을 실어 나르고, 가짜 뉴스를 양산하며, 왜곡된 생각을 퍼뜨리기 위해 집단적 공포를 이용합니다.……

우리가 어떤 종류의 말을 쓰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배려, 존중, 이해, 친밀함, 연민을 표현하는 말을 쓰는가, 아니면 주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기 자신을 멋지게 포장하는 말을 쓰는가? 더 나아가, 우리는 온유하게 말하는가, 아니면 비난하고, 불평하고, 만연한 공격성에 동조하는 등 독을 퍼트려서 세상을 더럽히는가?(교황 프란치스코, 삼종기도 훈화, 2022년 2월 27일, 번역문 출처-바티칸 뉴스 한글판)」

One thought on “연중 제8주일 ‘다’해(루카 6,39-45)

  1. 몇 주 전부터 주일 미사를 드리며
    이 복음 말씀들을 음미해봅니다.
    에구,
    반성할게 얼마나 많은지
    속이 뜨끔거릴 정도입니다.

    늘 살피지 않으면
    돌아서서
    엄청 게으름 피우고 있어
    부끄럽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 존중 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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