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보스코 성인은 아이들과 함께 모이던 자신의 오라토리오에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1567~1623년) 성인의 이름을 붙였고, 이는 그대로 훗날 그가 설립한 ‘살레시오회’의 명칭이 되었으며, 이에 따라 돈 보스코를 따르는 이들은 스스로 ‘살레시안’이라 칭한다. 돈 보스코는 자신의 오라토리오에 살레시오 성인의 이름을 붙이게 된 연유를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우리는 우리의 오라토리오를 두 가지 이유에서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오라토리오’라고 부르게 되었다. 첫째, 바롤로 후작 부인은 이 성인의 이름으로 사제들의 수도회를 설립할 뜻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런 의도에서 우리가 오라토리오로 쓰게 된 장소의 입구에 성인의 초상화를 걸어놓게 했다. 둘째, 우리의 사도직은 많은 침착성과 온유함을 요구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탁월한 온유함과 사도직의 열매를 본받을 수 있는 은혜를 하느님께 전구해 주시도록 그를 주보 성인으로 택한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반종교적인 오류와 토리노에 침투하기 시작한 개신교와 투쟁하는 데 필요한 도움을 얻어 신앙을 수호하기 위해서였다.」(E.체리아 엮음, 돈보스코의 회상, 돈보스코미디어, 2011년, 2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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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란치스코의 살레시오 성인은 자신의 저서 <신심 생활 입문(Introduction à la vie dévote)> 중 「열망, 화살기도 그리고 선한 지향」이라는 부분에서 거룩한 이들이 일상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어떻게 의식하며 만나게 되는지 여러 성인의 예를 들어 설명한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어느 날 염소 무리 속에 양 한 마리가 있는 것을 보고 옆에 있던 친구에게 “염소들 속에 있는 저 양은 얼마나 온순한가? 바리사이들에게 에워싸여 계신 우리 주님을 보는 듯하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숫염소가 어린양을 뿔로 들이받아 죽이는 것을 보고는 “오! 어린양아, 너는 우리 구세주의 죽음을 생생하게 보여 주는 듯하구나!” 하며 울었다고 합니다.(When St. Francis saw a solitary sheep amid a flock of goats; “See,” said he to his companion, “how gentle the poor sheep is among the goats, even as was Our Lord among the Pharisees;” and seeing a boar devour a little lamb, “Poor little one,” he exclaimed, weeping, “how vividly is my Savior’s Death set forth in thee!”)
……위대한 바실리오 성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장미꽃에 가시가 있듯이 이 세상 아름다운 것에도 슬픔이 섞여 있기 마련이다. 즐거움 뒤에는 후회가 따르고, 결혼한 뒤에는 배우자를 잃고 홀아비나 과부가 될 때가 찾아오며, 아이를 낳으면 근심거리가 생기기 마련이고, 영광 뒤에는 치욕이 따르기 마련이며, 즐겁게 지낸 다음에는 불쾌감이 생기고, 건강하다가도 병에 걸릴 수 있다. 장미꽃은 정말 아름답지만 나를 슬프게 한다. 왜냐하면 이 땅에 가시덤불을 돋게 한 원죄를 떠오르게 하기 때문이다.”(St. Basil the Great says that the rose amid its thorns preaches a lesson to men. “All that is pleasant in this life” (so it tells us mortals) “is mingled with sadness—no joy is altogether pure—all enjoyment is liable to be marred by regrets, marriage is saddened by widowhood, children bring anxiety, glory often turns to shame, neglect follows upon honor, weariness on pleasure, sickness on health. Truly the rose is a lovely flower,” the saint goes on to say, “but it moves me to sadness, reminding me as it does that for my sin the earth was condemned to bring forth thorns.”)
어떤 신심 깊은 사람이 고요한 여름밤에 시냇가에 서서 물속에 비치는, 별이 빛나는 하늘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 주님, 주님께서 저를 하늘나라에 있는 당신의 성전에 살게 해 주시는 날에는 저 아름다운 별들이 제 발아래 있게 될 것임을 알고 있나이다. 또한 저 별들이 이 시냇물 속에 비치듯이 지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하늘나라에 있는 하느님 사랑의 샘물에 비치고 있음을 알고 있나이다.”(Another devout soul, gazing upon a brook wherein the starlit sky of a calm summer’s night was reflected, exclaims, “O my God, when Thou callest me to dwell in Thy heavenly tabernacles, these stars will be beneath my feet; and even as those stars are now reflected here below, so are we Thy creatures reflected above in the living waters of Thy Divine Love.”)
……필로테아 님, 선한 지향과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이런 평범한 일상에서 비롯됩니다. 피조물을 창조주 하느님으로부터 이탈시켜 죄악에 이용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창조주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 찬송하도록 피조물을 돕는 사람들에게는 큰 축복을 내리실 것입니다.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 성인은 “나는 세상 만물을 나의 영적 진보에 이용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언급한 화살기도는 영적 은둔과 더불어 신심이 진보하는 데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이 두 가지로 다른 부족한 것들을 보충할 수 있습니다. 화살기도 없이는 관상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으며, 노력을 한다 해도 헛수고가 될 것입니다. 화살기도가 없으면 휴식은 나태로 변하고, 노력을 해도 초조함만 더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이 진심으로 이 두 가지 방법을 신심 수행에 자주 이용하기를 바랍니다.」(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신심 생활 입문>, 제2부 제13장 ‘열망, 화살기도 그리고 선한 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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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심 생활은 여러 방법이나 소명으로 실천돼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실 때 그 종류를 따라 열매를 맺을 것을 초목에게 명하셨다. 이와 같이 하느님은 또한 그 교회의 생활한 초목인 신자들에게 그 처지와 각자 맡은 직분에 따라 각각 신심의 열매를 맺기를 설명하신다. 귀족과 직공, 왕족과 노복, 과부와 주부, 소녀들의 차이에 따라 그들의 신심은 각각 달라야 한다. 또 한층 이것을 개인의 능력, 일, 직무에 맞추어야 한다. 필로테아여, 주교가 샤르트르 수도회의 수사처럼 관상적 독수자가 되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만일 가정을 가진 자들이 카푸친회 수사들처럼 금전을 소홀히 여기거나, 또는 직공이 수도자처럼 종일 성당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는다든지, 또는 수사가 주교처럼 언제나 타인을 위해 분주히 돌아다닌다면, 이런 신심은 참으로 우습고 질서를 뒤집으며 또한 견디기 어려운 일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착오는 극히 많다. 따라서 세속은 참된 신심과 그릇된 신심을 구별치 않고 또는 구별하려고도 않으며 신심을 배척하고 이를 비난한다. 그러나 이런 비난과 배척은 위에 말한 그릇된 신심에 한해서만 말해야 할 것이다.
아니, 필로테아여, 진정한 신심은 아무것도 손상치 않고 오히려 만사를 완성시킨다. 자기의 정당한 직무를 거스르는 자의 신심은 확실히 그릇된 신심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꿀벌은 꿀을 마실 때 조금도 꽃을 상하지 않게 하며 꽃은 이전의 아름다움을 조금도 잃지 않는다고 한다. 참된 신심은 이보다 더 어떠한 직무나 처지도 손상치 않을 뿐더러 오히려 이를 아름답게 꾸민다. 보석을 꿀에 담그면 그 성질에 따라 광채를 더한다고 한다. 그와 같이 어떤 사람도 그의 경우를 신심과 합치시키면 그의 경우는 일층 더 아름다워진다. 가정의 평화는 커지고 부부간의 애정은 깊어지며, 임금께 대한 충성은 두터워지고 각자가 맡은 일은 유쾌하고 즐거워진다.
신심 생활이 군인들의 병영, 직공들의 공장, 제왕의 궁정, 결혼한 자들의 가정에 존재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유설이며 이단의 교설이다. 필로테아여, 관상적인 신심이나 수도원식 또는 수도자적 신심이 이런 이에게 전연 맞지 않을 것은 말할 여지도 없지만, 위에 말한 세 가지 신심 외에 세속에서 생활하는 사람을 완덕으로 인도하는 신심의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우리는 어떤 환경에서든지 완덕의 생활을 구할 수 있고 이것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의 ‘신심 생활 입문’에서, Pars, 1, cap. 3-고유 성무일도 독서기도 제2독서)
Devotion must be practiced in different ways
When God the Creator made all things, he commanded the plants to bring forth fruit each according to its own kind; he has likewise commanded Christians, who are the living plants of his Church, to bring forth the fruits of devotion, each one in accord with his character, his station and his calling.
I say that devotion must be practiced in different ways by the nobleman and by the working man, by the servant and by the prince, by the widow, by the unmarried girl and by the married woman. But even this distinction is not sufficient; for the practice of devotion must be adapted to the strength, to the occupation and to the duties of each one in particular.
Tell me, please, my Philothea, whether it is proper for a bishop to want to lead a solitary life like a Carthusian; or for married people to be no more concerned than a Capuchin about increasing their income; or for a working man to spend his whole day in church like a religious; or on the other hand for a religious to be constantly exposed like a bishop to all the events and circumstances that bear on the needs of our neighbor. Is not this sort of devotion ridiculous, unorganized and intolerable? Yet this absurd error occurs very frequently, but in no way does true devotion, my Philothea, destroy anything at all. On the contrary, it perfects and fulfills all things. In fact if it ever works against, or is inimical to, anyone’s legitimate station and calling, then it is very definitely false devotion.
The bee collects honey from flowers in such a way as to do the least damage or destruction to them, and he leaves them whole, undamaged and fresh, just as he found them. True devotion does still better. Not only does it not injure any sort of calling or occupation, it even embellishes and enhances it.
Moreover, just as every sort of gem, cast in honey, becomes brighter and more sparkling, each according to its color, so each person becomes more acceptable and fitting in his own vocation when he sets his vocation in the context of devotion. Through devotion your family cares become more peaceful, mutual love between husband and wife becomes more sincere, the service we owe to the prince becomes more faithful, and our work, no matter what it is, becomes more pleasant and agreeable.
It is therefore an error and even a heresy to wish to exclude the exercise of devotion from military divisions, from the artisans’ shops, from the courts of princes, from family households. I acknowledge, my dear Philothea, that the type of devotion which is purely contemplative, monastic and religious can certainly not be exercised in these sorts of stations and occupations, but besides this threefold type of devotion, there are many others fit for perfecting those who live in a secular state.
Therefore, in whatever situations we happen to be, we can and we must aspire to the life of perfection.
*더 읽을거리: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와 예수 성심聖心 https://benjikim.com/?p=42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