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정기 희년 선포 칙서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Spes Non Confundit)를 통해 “희망의 순례자들”이라는 표어로 올해 ‘희년禧年’을 보내고 있는 우리 교회는 자주 “희망希望”에 관하여 말한다. 교황님께서는 이미 2022년 2월에 희년의 여정을 준비하도록 촉구하는 서한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받은 희망의 불꽃을 타오르게 하고, 모든 이가 열린 정신과 신뢰하는 마음과 멀리 내다보는 시각으로 미래를 바라볼 새 힘과 확신을 얻도록 도와야 합니다. 다가오는 희년은, 우리가 너무도 간절히 바라는 쇄신과 새로 태어남을 미리 맛보게 하는 희망과 신뢰의 분위기를 되살리는 데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희년의 표어를 “희망의 순례자들”로 선정한 이유입니다.」라고 밝힌다.
히브리어와 희랍어라는 성경의 언어에서 “희망”을 뜻하는 ‘카바’, ‘야찰’, ‘엘피스’라는 어휘들은 영적인 의미에서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 “희망”은 그리스도인이 지닌 신앙의 초석이다. 구약의 히브리어로부터 신약의 희랍어에 이르기까지 “희망”은 하느님의 약속에 대해 적극적이면서도 역동적인 신뢰로 드러난다.
카바(קָוָה, Qavah): 긴장하여 기다림(Waiting in tension)
히브리어 ‘카바’는 어떤 기다림의 형태를 지닌 희망이다. ‘카바’라는 말은 줄 같은 것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이미지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긴장과 기대감을 내포한다. 수동적이면서 한가한 기다림이 아니라 신뢰에 뿌리를 두고 다가올 상태를 앞당겨 맛보는 적극적인 기다림이다. 이러한 긴장은 고통스러운 현실을 받아들이면서도 하느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확신을 흔들리지 않고 붙드는 것이다. 이사야 예언자가 “주님께 바라는(qavah)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이사 40,31)라고 아름답게 기록한 바로 그 내용이다.
여기서 ‘카바’는 하느님을 기다리는 기다림으로 변화되는 능력과 힘을 강조한다. 수고와 고난 속에서도 활력을 불러일으키는 희망이다.
“나 주님께 바라네(qavah). 내 영혼이 주님께 바라며 그분 말씀에 희망을 두네. 파수꾼들이 아침을 기다리기보다 파수꾼들이 아침을 기다리기보다 내 영혼이 주님을 더 기다리네.”(시편 130,5-6)라고 시편이 노래하는 희망이다.
이러한 내용은 어떻게든 ‘카바’와 하느님의 말씀을 연결하면서 신실하신 하느님의 약속을 강조한다. 이런 의미에서 희망은 상황이 암울해 보일 때라도 하느님의 신실하심을 붙잡는 것이다.
야찰(יָחַל, Yachal): 참고 견딤(Patient endurance)
카바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히브리어 ‘야찰’은 참고 견디며 희망한다는 의미를 담는다. 카바가 기다림의 긴장을 뜻한다고 하면 ‘야찰’은 희망을 계속 이어가는 데에 필요한 인내를 강조한다. 이 용어는 하느님의 언약이 아직 성취되지 않은 상황에서 자주 등장하며, 그 약속을 믿고 항구하게 기다리도록 초대한다.
예레미야 예언자가 애가哀歌에서 “하지만 이것을 내 마음에 새겨 나는 희망(yachal)하네. 주님의 자애는 다함이 없고 그분의 자비는 끝이 없어 아침마다 새롭다네. 당신의 신의는 크기도 합니다. ‘주님은 나의 몫, 그래서 나 그분께 희망을 두네.’ 하고 내 영혼이 말하네.”(애가 3,21-24)라고 말한다.
예루살렘의 폐허 한가운데서 예레미야 예언자의 희망은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이 아니라 하느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참고 견딘다.
‘야찰’의 인내에는 하느님의 때가 완벽하리라는 깊은 신뢰가 담겨있다. 기다림의 고통을 인정하면서도 하느님의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굳건한 믿음을 잃지 않는 것이다.
엘피스(ἐλπίς, Elpis): 확신에 찬 기대(Confident expectation)
신약의 언어인 희랍어에서 ‘엘피스’는 희망을 가리키는 주요 어휘이다. 현대 영어에서 일종의 불확실성(잘 안 될지도 모르지만 잘 되기를 바란다는 뜻)을 뜻하는 것과는 달리 ‘엘피스’는 확신에 찬 기대를 담고 있다. 하느님의 변함없는 성품에 근거하면서 의심이 아닌 확신을 뜻한다.
바오로 사도는 “믿음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서 있는 이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elpis)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 5,2-5)라고 기록한다.
바오로 사도에게 희망은 변화하도록 하는 성령의 활동과 깊은 관련이 있다. 희망은 일시적인 감성이 아니라 어떤 일이 있어도 변하지 않는 기질이다.
‘엘피스’가 뜻하는 확신에 찬 기대는 “이 희망(elpis)은 우리에게 영혼의 닻과 같아, 안전하고 견고하며 또 저 휘장 안에까지 들어가게 해 줍니다.”(히브 6,19)라는 구절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영혼의 닻”이라는 이 비유는 인생이라는 풍랑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희망이 지닌 본질을 간파한다.
문화적 맥락에서 본 희망
히브리어 개념인 ‘카바’와 ‘야찰’은 삶의 불확실성을 깊이 인식하는 문화를 배경으로 한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희망은 하느님과 맺은 언약 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이집트로부터의 탈출에서 바빌로니아 유배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민족의 희망은 하느님께서 구해주시고 돌려놓으시어 복구해주실 것이라는 하느님의 약속에 있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희랍어 ‘엘피스’는 헬레니즘 문화의 지성적이고도 철학적인 맥락에서 비롯된다. 희랍의 문화가 종종 희망을 불확실한 것으로 여기기도 했지만, 신약성경에서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대한 확신에 찬 신뢰로 이를 재정의한다. 이러한 ‘엘피스’의 변천은 그리스도교 희망의 근본적인 성격을 강조한다.
희망에 관한 신학적 차원
희망에 관한 성경의 이해는 성경 밖의 이해에 견주어 상대적으로 깊다. 성경의 희망은 더 나은 미래를 바라는 단순한 희망과는 거리가 멀다. 성경의 희망은 하느님의 성품이나 행적에 근거한 하느님의 약속에 대한 적극적인 믿음이다. 이처럼 성경의 희망에서는 믿음과 사랑에서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가톨릭교회 교리서(*아래 참조)는 희망이 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이며, 은총으로 자라나고, 기도와 성사로 지탱된다고 가르친다.
“사실 우리는 희망(elpis)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로마 8,24-25)라고 바오로 사도는 기록한다. 이 대목에서 바오로 사도는 현재에 대한 하느님의 신실하심을 믿으며 하느님의 약속을 고대하는, 그리스도인이 지닌 희망의 긴장을 포착한다.
성경의 희망은 하느님의 신실하심에 우리 삶의 닻을 내리고, 하느님의 약속을 믿어 어떤 시련이 닥치더라도 이를 견뎌내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확실하고, 견디어 내며, 기대에 찬 우리의 희망은 우리의 삶을 바꾼다. 그리고 변함없이 늘 좋으신 하느님을 세상에 증거하도록 우리를 부른다.(*작성자: 대니얼 에스파르자Daniel Esparza, 2025년 1월 14일, aleteia.org)
*필자의 변: 이 글은 <샘손 라파엘 허쉬의 주석에 기초한 성경 히브리어 용어 사전(Etymological Dictionary of Biblical Hebrew: Based on the Commentaries of Samson Raphael Hirsch)> <로버트 빅스의 2010년 판 희랍어 용어 사전(Etymological Dictionary of Greek (2010) by Robert Beekes)>에서 영감을 받아 작성되었다. 그러나 결정적이거나 완벽한 것은 아닐 것이다. 더 깊은 연구와 문맥의 파악을 위해 원문을 참조하도록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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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에 관한 가톨릭교회 교리서의 가르침
1817. 희망은 그리스도의 약속을 신뢰하며, 우리 자신의 힘을 믿지 않고 성령의 은총의 도움으로, 우리의 행복인 하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게 하는 향주덕이다. “우리가 고백하는 희망을 굳게 간직합시다. 약속을 주신 분은 성실하신 분이십니다.”(히브 10,23) “이 성령을 하느님께서는 우리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분의 은총으로 의롭게 되어, 영원한 생명의 희망에 따라 상속자가 되었습니다.”(티토 3,6-7)
1818. 희망은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의 마음에 넣어 주신 행복을 바라는 덕이다. 희망은 사람들의 활동을 고취하는 갈망을 받아들이며, 그 활동들을 정화하여 하늘 나라를 향하게 한다. 사람들을 실망하지 않게 보호하고, 버림받을 때 언제나 힘을 북돋아 주고, 영원한 행복에 대한 기대로 마음을 열어 준다. 희망의 약동은 사람을 이기주의에서 보호하여 사랑의 행복으로 이끈다.
1819.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선택된 민족의 희망을 되살리고 완성한다. 이 선택된 민족의 희망은 이사악으로 이루어진 아브라함의 희망과 희생의 시련으로 정화된 하느님의 약속에서 그 기원과 본보기를 찾을 수 있다.(참조. 창세 17,4-8; 22,1-18) “아브라함은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로마 4,18)
1820.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예수님의 전도 초기부터 행복 선언 안에 제시되었다. 참행복은 우리의 희망을 새 ‘약속의 땅’으로 들어 올리듯이 하늘로 들어 올린다. 참행복은 예수님의 제자들 앞에 기다리고 있는 시련을 통과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준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공로를 통해서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 희망”(로마 5,5) 안에 지켜 주신다. 희망은 “우리에게 영혼의 닻과 같아, 안전하고 견고하며 …… 예수님께서는 …… 우리를 위하여 선구자로 그곳에 들어가셨다.”(히브 6,19-20) 희망은 구원을 위한 싸움에서 우리의 안전을 보장해 주는 무기이기도 하다. “믿음과 사랑의 갑옷을 입고 구원의 희망을 투구로 씁시다.”(1테살 5,8) 희망은 시련 중에서도 우리에게 기쁨을 준다.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로마 12,12) 희망은 기도 안에서 표현되며 지탱되는데, 특히 우리가 희망하여 바랄 수 있는 모든 것이 요약된 ‘주님의 기도’가 그러하다.
1821.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고(참조. 로마8,28-30) 당신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에게(참조. 마태 7,21) 약속하신 하늘의 영광을 희망할 수 있다. 어떠한 경우에도 각자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끝까지 견디어 낼 수 있기를(참조. 마태 10,22; 트리엔트 공의회, 제6회기, 의화에 대한 교령, 제13장: DS 1541) 바라야 하고,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자신이 행한 선행에 대해 하느님께서 영원한 상급으로 주시는 하늘의 기쁨을 얻게 되리라고 희망해야 한다. 교회는 희망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1티모 2,4) 기도한다. 교회는 천상 영광 속에서 자신의 정배이신 그리스도와 하나 되기를 갈망한다.
“희망하라, 희망하라. 너는 그날과 그 시간을 알지 못한다. 조심스럽게 깨어 있어라. 비록 너의 초조함이 확실한 것을 의심스럽게 만들고, 아주 짧은 시간을 길게 여기게 하더라도 모든 것은 빠르게 지나간다. 네가 많이 싸우면 싸울수록 네 하느님에 대한 너의 사랑은 더욱 드러나며, 장차 결코 끝나지 않는 행복과 기쁨 중에 네 사랑하는 분과 더욱 즐거우리라는 사실을 생각하여라.”(예수의 성녀 데레사, 「하느님을 향한 영혼의 외침」, 15,3: Biblioteca Mística Carmelitana, 4권-부르고스, 1917, 29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