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라고 시작하는 총 21개의 장으로 형성된 요한복음의 저자, 그리고 편지글에서 “하느님은 사랑”(1요한 4,8)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복음사가 요한, 적어도 그와 같은 계보에 있었다고 여겨지던 저자는 시종일관 하느님의 사랑에 관한 내용을 그 근본 핵으로 삼아 자기의 복음을 엮어간다. 요한은 하느님의 사랑을 묘사하면서 유별나게 인간들의 ‘밥자리’를 모티브로 삼는다. 이는 육체적인 허기짐을 넘어 영원한 생명의 빵인 성체성사를 암시하고자 함이었다.
요한은 카나의 혼인 잔치(2장)로 예수님의 공생활 첫 장면을 그린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음에도”(요한 2,4) 사람들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 넘쳐나서 풍요의 잔치가 벌어진다. 이 땅의 배고프고 허기진 사람들을 먹이기 위해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의 이야기를 담은 6장에서는 성체성사를 본격적으로,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이 6장의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의 도입은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갔다. 그분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다.”(요한 6,2)라는 구절이다. 아프고 병든 인간성 앞에서 그들을 고쳐주시고 원기를 회복시켜 주시기 위한 하느님의 사랑이 빵의 기적 이야기로 이어진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내가 빵”이라 하시고 “나를 먹고 마시라” 한다. 그렇게 아프고 허기진 사람들의 배를 불리신 하느님의 사랑은 역시 밥 먹는 자리인 최후의 만찬 때에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는 모습(13장)에서 정점을 이룬다. 그래서 요한 복음사가는 발을 씻겨주신 이야기를 전하는 첫 구절에서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요한 13,1)라고 기록한다. 밥자리에서 발을 씻겨주심은 밥을 먹고 사는 이유와 목적이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정화를 넘어 치유하여 주시는 내용이다. 세상 위를 걷느라고 더러워지고 부르튼 인간의 발을 씻어주시고 낫게 해 주시느라 더러운 우리 발에까지 하느님께서 몸을 숙이시고 그 발에 입을 맞추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렇게 당신 사랑을 보여 주시면서 배반자 유다가 떠난 뒤에 제자들에게 ‘너희도 이렇게 하라’ 하시며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4) 하신다. 그것이 사람이 밥 먹고 사는 이유와 목적이라 하신다. 그래야 ‘정말 산다’ 하신다.
그런 다음 예수께서는 비로소 밥자리, 식탁에서 인간을 흥겹게 하는 포도주를 빚게 하는 열매 나무인 포도나무의 비유(15장)를 통해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요한 15,3-5) 하신다. 나에게 붙어 있어서 좋은 열매를 맺는 가지가 되라 하신다. 하느님의 사랑을 그토록 넘치게 받은 이가 좋은 열매를 맺지 않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런 가지들을 모아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요한 15,6) 하신다. 너희는 종이 아니라 “나의 친구”이니(요한 15,15)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명령”이라 하시면서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7)하고 다시 한번 강조하신다.
그렇게 숨 가쁘게 하느님의 사랑을 묘사한 복음사가 요한은 마침내 마지막 21장에서 결정적으로 영생으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회의와 실망으로 밤새 낙담한 제자들에게 새로운 아침의 식사 자리, 아침상을 차려주시고 “와서 아침을 먹어라.”(요한 21,12) 하면서, 사랑과 평온을 되찾게 해 주시는 장면으로 복음을 마친다. 이처럼 요한복음은 먹고 마시는 인간의 기본 자리인 밥자리를 이용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묘사하려 했고, 그 하느님의 사랑이 담긴 성체성사를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주고자 했다.
요한 복음사가가 전해주는 오늘 복음의 대목은 모든 복음을 통틀어 사람들에게 가장 물의를 일으켰던 부분이라 할 수 있으며, 주님과의 내밀한 관계를 맺는 사람들 ‘안에’(ἔσω, éso, within)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혐오감마저 일으킬 수 있는 내용이 된다. 요한으로 알려지는 복음의 저자는 인간이 되어오신 하느님, 예수님이라는 인간의 허약한 육신을 통하여 하느님을 만난다는 사실, 예수님의 인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소위 영지주의(Gnosticism)적인 시각을 지닌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시킬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해서 무척 고심하고 또 고심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요한 1,14.18)이라고 기록한 대로 제4복음사가는 하느님의 결정적인 계시가 죽음으로 나아가는 예수라는 분의 인성이며 그분의 몸과 살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어 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도 오늘 복음을 주의 깊게, 겸손하게, 읽어나가야 한다.
1.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말다툼이 벌어졌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라고 선포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 몸인 그 빵을 먹는 자가 영원히 살 것이며, 그 빵이 세상을 위한 생명이 된다고 앞서 말씀하셨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유다인들은 “수군거리기 시작”(요한 6,41)하였고, 서로 간에 “말다툼이 벌어졌으며”(요한 6,52), 심지어 제자들마저도 “듣기가 너무 거북”(요한 6,60)하다 하였고, 심지어 “투덜거렸다.”(요한 6,61)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요한 6,52) 하며 시작한 유다인들 사이의 “말다툼”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 간에 벌어진 치열한 논쟁의 시작이다. 이러한 와중에 예수님께서는 기름에 불을 붙이듯 한 걸음 더 나아가시어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요한 6,53) 하시며 더욱 물의를 일으킬만한 내용을 담아 직설적으로 답변하신다. 우회적이지도 않고 비유적이지도 않으며, 어떤 지성적인 자극이나 세련된 표현과는 아주 먼 방식으로 말씀하신다.
2.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54) 하신다. 오늘 복음의 대목에서 “먹다”라는 말은 무려 6회, 그리고 “마시다”라는 말은 3회 각각 반복된다. 살을 먹어야 한다는 말씀도 이미 엄청난 충격이고 물의를 빚을만한 내용이었는데, 모세로부터 시작하여 율법이 금지한 내용 중 하나인 “피를 마셔야 한다”라는 표현까지 서슴없이 내지르신다. 이는 “누구든지 이스라엘 집안에 속한 사람이나 너희 가운데에 머무르는 이방인이나, 어떤 피든 피를 먹으면, 나는 그 피를 먹은 자에게 내 얼굴을 돌려, 그를 자기 백성에게서 잘라내겠다. 생물의 생명이 그 피에 있기 때문이다.”(레위 17,10-11)라는 말씀에 따라 분명히 금지된 사실이었다. 유다인들은 노아의 시대 전까지는 인간이 동물의 살을 먹지 않고 식물을 섭취하며 채식으로 살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느님께서는 노아의 대홍수 이후에야 “내가 전에 푸른 풀을 주었듯이, 이제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준다. 다만 생명 곧 피가 들어있는 살코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창세 9,3-4) 하시면서 엄격한 조건을 붙여 육식할 수 있도록 하셨던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우상에게 바쳐 더러워진 음식과 불륜과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피를 멀리해야 합니다.”(사도 15,20.29;21,25)라는 내용에 비추어볼 때 사도들이 다른 민족 출신 그리스도교인들에게도 주지시킬 만큼 중요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내용을 예수님께서도 빤히 아실 터인데도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하느님의 생명을 얻고 구원을 얻기 위해서 당신 살을 ‘먹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아니 차라리 ‘씹어서 삼켜 먹어야’(희랍어 동사 트로고τρώω, trógo, 영어-chew and swallow로부터) 하고, 당신 피를 마셔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이렇게 적나라한 제4복음서의 표현이 다른 공관복음이나 신약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어찌 된 일일까? 아마도 제4복음서가 성체성사의 제정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이 이를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내용(참조. 요한 13,1-17)으로 대체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은 아닐까? 제4복음서의 저자는 분명히 예수님이라는 빵과 그분의 잔에 참여하는 것이 곧 그분의 몸과 피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한 여인에게서 나시고 정말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시어 우리의 형제가 되신 아드님, 그분의 살과 피를 우리는 성체성사 안에서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실제 그분의 살과 피로서 받아먹고 마신다.
우리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맨 처음부터 실제 예수님의 인성을 고백한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안다. 예수님의 육체성을 단지 어떤 분명한 실체가 없는 듯한 잠정적인 것으로만 상상한 것도 사실이고, 예수님의 몸, 육체, 가시성을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되도록 빨리 벗어나야 할 도구처럼 생각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고 고백하는 영은 모두 하느님께 속한 영입니다.”(1요한 4,2) 하였듯이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음을 고백하지 않는 영은 하느님께 속하지 않은 영이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육화’라는 어렵고 또 어려운 이 내용은 그저 하느님의 행위라는 추상적인 개념이라기보다 인간의 종교적인 필요에 훨씬 더 부합한다. 어떤 전제나 개념, 거리낌이 없이 진지하게 이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하느님께서 예수님 안에 사람이 되셨다는 진실은 더할 나위 없이, 바로 인간적인 조건 안에서, 인간이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사랑을 진정으로 알 수 있도록, 그저 믿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육체 안에서 그 육체를 통하여 당신의 사랑을 알고 체험하도록, 우리와 함께 우리와 똑같은 인간성과 육체를 나누고자 하셨다.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의 육체(살)를 통하여 만날 수 있고, 오직 우리의 육체(살)를 통해서만 만날 수 있는 육체성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은 고대 동방의 교부들이 표현한 대로 하느님께서 인간의 육체(살)가 되실 필요가 있었으므로, 이에 따라 우리가 역설적으로 감히 ‘하느님이 되어’ 실제로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셨다. 말로만, 말씀으로만 표현되고 계시된 사랑은 충분하지 않았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이 알려 주셨다.”(요한 1,18) 한 대로 외아드님께서 ‘알려주셔야’만(엑세게사토, exoeghésato) 했던 육화가 필요했다. 인간의 육체성을 지극히 사랑하시어 인간의 육체를 취하신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사랑을 말씀하시고 알려주신다. 아니 차라리 그렇게,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8.16) 인간의 한계와 악함, 죽음을 드러내는 우리의 육체는 가끔 우리의 소위 ‘영적인 생명’을 위하여 부정하거나 잊어야만 할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실제로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취하신 이 육체를 하느님과 만나고 통교하기 위하여 장애로 여겨서는 안 된다. 우리의 몸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일상의 자리이다.
3. “나로 말미암아 살 것…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요한 6,57) 하신다. 요한복음 6장을 통해서 듣는 예수님의 성체성사에 관한 말씀은 하느님의 육화에 관한 깊은 말씀이다. 육체와 성체의 부활로 우리 구원의 신비를 표현하는 말씀이다.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필리 3,21) 한 대로 우리의 “비천한 몸”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만난다. “온전히 충만한 신성이 육신의 형태로 그리스도 안에서 머무르고 있습니다.”(콜로 2,9) 한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살을 씹어 먹고 당신의 피를 들이마시는 것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건네신다. 그렇게 하느님께서 당신을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가 있는 그 자리에 임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더러 당신의 하느님다운 조건으로 오르라고 하시지 않는다. 애초에 가능하지도 않고 종교적인 교만과 병病의 결과일 수밖에 없는 그런 행동을 요구하시지 않는다.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우리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하도록 변화하게 하신다. 그렇게 감히 우리가 아버지께서 유일하게, 무한한 사랑과 함께, 성령 안에서 사랑하신 하느님의 아들이 되게 하시고, 그리스도 자신이 되게 하신 사랑에 참여하게 하신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사람은 부활을 알게 되고, 영원히 살 것이며, 그리스도와 나누는 통교 안에서 그분께서 내 안에 머무르시고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게(머무르다<희랍어 동사 méno, 참조. 요한 15,1-10), 곧 그리스도의 몸 안에 내가 머무르고 내 몸 안에 그리스도께서 머무르시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의 저자이거나 적어도 같은 복음의 학교에 아주 가까이 있었을 것으로 통상 알려지는 요한은 자신이 기록한 편지글 서두에서 자기가 체험한 예수님을 두고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가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 이 생명의 말씀”(1요한 1,1)이라고 기록한다. 그 요한은 오늘 복음의 대목을 통해서 성체성사를 통해서 ‘우리가 먹었고, 맛보았던 예수님’을 기록하는 듯하다. 이것이 우리의 삶이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성체성사를 그저 우리가 필요할 때 조회할 수 있는 어떤 부분이나 가능성 정도로 고립시켜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따로 떨어트려서도 안 된다. 성체는 또 다른 제2의 그리스도가 아니다. 성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는 역사 안에 태어나시고 사셨으며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절대 분리될 수 없다. 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체 안에 온전히 현존하신다. 이렇게 성체 안의 예수님, 예수님 안의 성체이신 ‘하나’이신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면 성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요 삶이 아니라 그저 하나의 대상이요 사물이 되고 만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라고 말한 대로, 쥬셉뻬 콜롬보Giuseppe Colombo라는 신학자가 이른 바대로, 그리스도인은 영성체를 통해서 진정으로 예수님께서 그 안에 사시게 된다. 아멘!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고 고백하는 영은 모두 하느님께 속한 영입니다.”(1요한 4,2) 하였듯이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음을 고백하지 않는 영은 하느님께 속하지 않은 영이다. —예수님의 인성을 믿는것이 매우 중요함을 새겨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사랑하신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어떻게 사랑할까
어떻게 하면 진정으로
사랑하는걸까요?
내몸처럼?
그럼 나부터 시작하는 사랑. 돌봄.
요한복음의 말씀이 오늘 제게 큰 울림으로
다가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