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교회는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을 거행한다. 성체성사를 기념하는 날이고 ‘주님의 몸’(비오 5세 미사 경문)을 기념하는 날이며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몸과 피’(바오로 6세 미사 경문)를 기념하는 날이다. 이날 교회는 성체성사가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원천이며 정점』(교의 헌장 11항)임을 선포하고, 사제가 거행하는 성체성사로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되어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의 현존을 기념하고 묵상한다. 전통적으로 삼위일체 대축일 다음 목요일을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로 지내는데, 사목적 이유로 주일로 옮겨 지낸다.
이날 그리스도교 국가들에서는 성체대회나 성체거동을 하기도 한다. 이 축일은 대략 700년 전 13세기에 벨기에에서 시작하였고, 후에 교황 우르바노 4세(제182대 교황, 1261~1264년 교황 재위)가 온 교회의 축일로 확대하였다. 이 대축일은 동방 교회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고, 주로 서방 교회 쪽에서 고수하게 된 축일이다. 이 축일에 대한 교회의 지향은 성삼일인 성 목요일 주님의 만찬 미사에서 기렸던 성체성사의 신비를 성삼일 밖의 전례에서도 묵상하고 찬양을 드리며 기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날 교회는 ‘나’ 해이므로 마르코가 전해주는 최후의 만찬 기록에서 발췌하여 전례 복음으로 취한다.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잡히시기 전, 당신의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축제를 지내고자 하셨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체류하시던 마지막 기간, 곧 “무교절(누룩 없는 빵 기념)의 첫날 곧 파스카 양을 잡는 날에…제자 두 사람을 보내며”(마르 14,12-13) 파스카 만찬을 준비하도록 이르셨다. 이미 배반자 유다가 자신을 드러냈으므로(참조. 마르 14,10-11) 예수님께서 제자들 모두를 믿을 수도 없는 상황이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을 반영이라도 하듯이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만찬을 기념하기는 하되 그 장소는 사전에 아무도 알지 못하도록 하려는 듯이 신중하신 것처럼 복음은 묘사한다.
1. “무교절 첫날 곧 파스카 양을 잡는 날…파스카 음식을 먹을 내 방”
복음의 배경은 “무교절, 파스카 축제”이다. 이레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고 집 안에서 누룩을 치우는 축제인(탈출 12,15) ‘무교절無酵節’이란 ‘삭힐 효/교酵’라는 글자를 써서 발효되지 않는 빵, 곧 충분히 발효시킬 시간이 없이 급하게 구워 먹는(탈출 12,39에서 보듯이 서둘러 탈출해야 함을 표현하는데 나중에 가난한 이들의 빵을 상징하기도 한다) 누룩 없는 빵을 먹는 축제 기간을 통칭하는데, “첫째 달 열나흗날 저녁부터 그달 스무하룻날 저녁까지”(탈출 12,18) “이레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는”(레위 23,6) 기간이다. 우리 성경에서 이 말은 “파스카라고 하는 무교절”(루카 22,1)이라는 말에서 보듯이 ‘파스카’라는 말과 혼용된다. 이는 페사흐(히브리어: פסח), 파스카(고대 그리스어: πασχα)라는 말로서 ‘넘어가다passover’라는 뜻을 지닌다. 곧 이집트 땅을 탈출하기 전 주님께서 “이집트인들(의 맏아들과 맏배)을 치실 때, 이스라엘 자손들의 집을 거르고 (넘어) 지나가시어, 우리 집들을 구해 주셨다”(탈출 12,27)하는 전통, 그날 주님의 구원 업적과 맏배 대신 죄 없이 죽은 어린 양을 기억하는 데에서 기인한다.
개신교에서는 무교절의 마지막 날을 ‘과월절過越節(지날 과, 넘을 월)’ 혹은 ‘유월절逾越節(넘을 유)’로 따로 지칭하기도 한다. 무교절은 이집트 해방과 메시아가 가져올 구원에 대한 희망 속에 하느님의 구원 업적을 회상하고 재현하는 한 해의 가장 큰 축제로서 예루살렘 성 안에서 지내야 했고, 가족별로 혹은 무리를 지어 지냈다.(탈출 12,1-14 레위 23,5-8 민수 28,16-25 참조)
예수님께서는 “도성 안으로 가거라. 그러면 물동이를 메고 가는 남자(*물동이는 주로 여성들이 운반하는 것이므로 상당히 이례적이고 이에 따라 예수님과 그 남자 사이에 미리 합의된 행동임을 짐작 가능)를 만날 터이니 그를 따라가거라. 그리고 그가 들어가는 집의 주인에게, ‘스승님께서 내가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음식을 먹을 내 방이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하여라. 그러면 그 사람이 이미 자리를 깔아 준비된 큰 이층 방을 보여줄 것이다. 거기에다 차려라.”(마르 14,13-15) 하신다. 마르코 복음에서 유일하게 예수님 친히 “스승님”이라고 자처하신다. 남의 방을 빌리면서 “내 방”이라 하신다. 마르 11,3에서 예수님께서는 남의 어린 나귀도 징발하신다. 주님께서 전권을 행사하신다.
축제 차림은 탈출기 12장의 율법에 따라 이스라엘 민족의 이집트 탈출, 곧 노예살이에서의 해방, 주님의 백성이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한 빵, 포도주, 쓴 나물, 어린 양, 등불 등이었다. 신중한 지시를 받은 두 “제자들이 떠나 도성 안으로 가서 보니, 예수님께서 일러 주신 그대로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파스카 음식을 차렸다.”(마르 14,16)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엄숙한 파스카의 거행,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지내실 만찬, 예수님 친히 곧 파스카의 어린 양이 되실 파스카 음식에 관한 모든 것을 차질없이 준비한다.
제자들과 예수님께서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마르 14,22) 예수님께서 식사 도중 식탁에서 당신 공동체와 맺으실 새로운 언약의 기원이 될 빵과 포도주에 관한 말씀을 하신다. 이에 관해 우리는 공관복음이 전해주는 3개의 기록(마르 14,22-25 마태 26,26-29 루카 22,18-20) 외에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보이는 1코린 11,23-25를 더해 총 4개의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마태오가 마르코를 베끼고 루카가 마르코와 코린토 전서를 혼합한 것으로 보아, 마르코와 코린토 전서의 최후 만찬기가 전승에서 비롯된 원본에 가깝다고 하겠다.
초대 교회의 신자들은 토요일 밤이나 일요일에 모여 예수님의 최후 만찬을 본받아 만찬례를 지냈다. 1코린 11,23-26에 의하면 먼저 빵을 나누고 이어서 공동식사를 한 다음 마지막으로 포도주를 마셨던 것으로 보인다. 이 만찬례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최후 만찬과 죽음을 상기하고(회상제回想祭), 부활하여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를 의식하며(현존제現存祭), 재림하실 주님을 고대하는 마음으로(희망제希望祭) 만찬례를 지냈다.(『마르코복음서』, 정양모역주, 분도출판사 1981, 158-59쪽) 4개의 기록들이 서로 약간씩 다른 부분이 있으나 이 기록들에서 말마디 자체를 주문呪文처럼 그저 반복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의도가 무엇인지, 또 그러한 동작으로 진정 무엇을 뜻하고자 하셨는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초대 교회 공동체는 예수님의 뜻에 충실해지려 했고, 그분의 말씀을 반복하였으며, 그분의 행동을 재연하였으니, 그렇게 하여 오늘날까지도 온 세상 언제 어디서나 교회에서 예수님 최후의 만찬이 거행되게 된 것이다.
2. “빵을…떼어…주시며”
먼저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음식이 차려진 식탁에서 누룩이 들지 않은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신다.”(마르 14,22) 빵을 ‘들고, 떼어, 주는’ 행위는 식탁을 주재하는 이가 하는 일상의 몸짓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강렬하고도 힘 있는 동작들을 통해서 파스카 만찬 식탁에 함께 앉은 이들의 정신과 마음에 충만한 의미를 담으신다. ‘지혜라는 여인의 초대’에서 내 빵을 먹고 내 술을 마셔라 하였듯이(참조. 잠언 9,1-6), 옛 예언자가 “와서 돈 없이 값없이 술과 젖을 사라.…내가 너희와 영원한 계약을 맺으리니 이는 다윗에게 베푼 나의 변치 않는 자애이다.”(이사 55,1-3) 하였듯이, 당신 생명, 당신 몸, 당신 자신을 음식처럼 내어주시며 말씀하신다. 이 말씀과 동작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숨까지 내어주시는, 자신을 “끝까지”(요한 13,1) 내어주시는, 극단적인 “사랑”의 표현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과 동작으로 제자들은 틀림없이 당황하고 흔들렸을 것이지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야 결코 잊을 수 없었던 그 모든 것을 깨우치고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빵을 떼어” 나누는 것이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 58,7) 하는 말씀대로임도 잊지 말아야 한다. 빵을 떼어 나누는 것은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의 나눔이고, 같은 빵을 나누는 이들의 친교를 나타낸다. 이것이 바로 성체성사를 두고 초기 그리스도인들과 제자들이 ‘빵 떼기’(참조. 루카 24,35 사도 2,42;20,7 디다케 9,3)라고 불렀던 이유이다. 빵을 떼는 동작과 함께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 하시는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그 빵을 받아먹는 당신 제자들에게 당신의 온 생명을 넘겨주시고 전해주신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필리 2,8) 사랑하시는 당신 사랑에 제자들도 참여하라고 하시는 의미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 몸짓과 말씀으로 제자들에게 얼마 안 있어 일어날 일을 미리 보여주시고 설명해 주신다. 당신의 죽음이 인간에게 당신 생명을 내어주는 것이고 하느님께 드리는 희생 제물임을 알라고 하시는 것이다.
3.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손에 “또 잔을 들어 (포도나무 열매로 얻은 것에)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주시니 모두 마셨다.”(마르 14,23)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르 14,24) 한다. 빵을 떼어 당신 몸을 주시듯이 포도주 잔을 들어 당신 피를 주시며 제자들에게 마시라고 하신다. 피가 곧 생명인 셈족 문화 안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생명을 내어주신다. 복음사가 마르코는 “모두 그것을 마셨다” 하면서 예수님의 선물이 예외 없이 “모두”를 위한 것임을 강조한다. 여기서 “모두”는 “너희 가운데 한 사람, 나와 함께 음식을 먹고 있는 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마르 14,18) 하실 때의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말과는 대비되는 말이고, 여기서는 배반자 유다를 포함한 “모두”가 된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당신 생명과 사랑의 은총은 받을 자격이 없는 이들까지도 포함해서 “모두”에게 거저 주어진다.
한편 우리는 이 대목에서 “모세는 그 피의 절반을 가져다 여러 대접에 담아 놓고, 나머지 절반은 제단에 뿌렸다. 그러고 나서 계약의 책을 들고 그것을 읽어 백성에게 들려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실행하고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모세는 피를 가져다 백성에게 뿌리고 말하였다. ‘이는 주님께서 이 모든 말씀대로 너희와 맺으신 계약의 피다.’”(탈출 24,6-8) 하였던 말씀, 하느님과 당신 백성 간에 시나이 산에서 맺은 계약을 떠올리게 한다는 사실도 새길 필요가 있다. 모세가 뿌렸던 피로 하느님과 하느님 백성은 다시 하나가 되었고, 이스라엘 백성은 이를 통해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며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고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한다.”(탈출 34,6)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나 여기 예수님께서 당신 생명(피)으로 맺으신 계약은 이제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세상 모든 민족에게 열린 보편적인 계약이며,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리라.…이는 그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버리고 무법자들 가운데 하나로 헤아려졌기 때문이다. 또 그가 많은 이들의 죄를 메고 갔으며 무법자들을 위하여 빌었기 때문이다.”(이사 53,11-12) 한 그대로 “많은 이들”을 위해 흘리신 피의 계약이지만, “많은 사람”이 아닌 “모두”가 그 계약에 열려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참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교회의 선교활동에 관한 교령Ad gentes, 제3항)
이를 두고 슬기로운 바오로 사도는 “의로운 이를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혹시 착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누가 죽겠다고 나설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로마 5,7-8)라고 정리해 준다. 예수님께서는 “모두”를 위해 죽으셨다. 유다를 포함하여 하느님께 여전히 못되게 굴고 사악한 우리 모두를 위해 죽으셨다. 우리는 성체성사의 은총이 그럴듯하게 무엇인가를 해낸 사람들을 위한 상이요 보상이 아니라, 병든 이들을 위한 치료제이며 죄인들을 위한 구제책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성체성사는 하느님 사랑을 계시하는 말과 몸짓이고,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온 생애의 요약이며, 구원 역사의 종합이다.
마지막으로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나누어 주시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포도주 잔을 주신 예수님의 살과 피로 그분의 죽음에 미리 참여하는 것이 영원히 죽음을 이기는 생명의 하느님 나라에 미리 참여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하느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마실 그날까지, 포도나무 열매로 맺은 것을 결코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마르 14,25)라고 하신 것이다. 성체성사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 그 나라에서 장차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먹고 마시게 될 하느님 나라 잔치의 서곡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우리 주님과 함께 그분 안에서, 그분과 함께, 그분을 통하여 살며, 같은 하느님의 생명이시나 새롭고도 결정적인 생명의 잔, 사랑의 잔, 아가페의 잔을 영원히 마시게 될 것이다.
복음의 마지막 절은 “그들은 찬미가를 부르고 나서 올리브 산으로 갔다.”(마르 14,26)라고 한다. “찬미가를 부르고”라 하는데, 유다인들은 파스카 식사를 끝내면서, “알렐루야(=너희는 야훼를 찬양하여라.)”로 시작되는 시편 114편 또는 시편 115-118편을 감사의 마음으로 불렀다. 개신교에서 감람산橄欖山이라고 하는 “올리브 산”은 높이 800m로서 4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이 산의 서쪽 기슭 근처에 그리스도의 수난이 시작되는 겟세마니 동산이 있다. 또 이 산기슭에서 예루살렘 입성을 앞둔 그리스도께서 군중의 환영을 받았다(마르 2,1)는 기록이 있고, 사도행전 1장은 올리브 산 정상에서 그리스도가 승천하였다고 기록한다. 찬미가를 부른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고난과 기도, 그리고 배반과 승천의 산으로 간다.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성사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 되고 형제자매들과 하나 되지 못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