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애론(2-8)

제8장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 사랑하기를 얼마나 열망하고 계신가?
우리 구세주의 구원이, 영혼들의 수만큼이나 많은 갖가지 양상으로 우리에게 적용되고 있으나, 그 구원 은총은 우리가 앞으로 어디선가 보게 되듯이(본서 10권 1장과 2장), 모든 것과 합류하게 되며, 그것이 없이는 아무것도 유익한 것이 못 되는 것이다. 케루빔Cherubim은 번쩍이는 불칼을 들고 지상낙원 문에 자리하고 있으니 이것은 누구든지 불같은 사랑의 칼로 꿰뚫리고 관통되지 아니한 자는 천상 낙원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시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테오티모여, 당신의 피로써 우리를 되살리신 인자하신 예수께서는, 우리가 영원히 구원될 수 있도록, 당신을 사랑하기를 무한히 열망하고 계시며, 우리가 영원히 당신을 사랑할 수 있도록, 구원되기를 또 열원하시므로, 그의 사랑은 우리의 구원을, 우리의 구원은 그의 사랑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루카 12,49)라고 주께서는 부르짖으셨다. 그러나, 실생활에 맞추어서, 이 열망의 뜨거움을 그는 더욱 놀랄만한 말씀으로 표현하시어 우리의 사랑을 요구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마태 22,37-38)
참으로 착하신 하느님이시로다! 테오티모여, 우리의 사랑에 대한 하느님의 마음은 얼마나 사랑스러우신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할 허락과 자격을 우리게 주시는 것으로 넉넉히 여기지 않으셨다. 라반Laban은 아름다운 라헬Rachel을 사랑할 수 있는 허락을 야곱에게 주었으며, 또 라헬을 아주 자기 사람으로 삼기 위해서 머슴살이할 것을 허락지 않았는가?(참조. 창세 29,15-30)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에게 대한 당신 사랑의 열정을 보이시는데 있어서, 라반보다 훨씬, 아주 훨씬 더 하셨으니, 우리의 온갖 능력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하셨다. 이것은 당신의 엄위와 우리의 비참을 보고서, 당신과 우리 인생들 사이의 이 현격한 차이 때문에 도저히 상대될 수조차 없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치 못하게 되거나 사랑에 미흡함이 있게 되지 않을까 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테오티모여, 여기서 하느님은 우리에게 잘 입증해 주시는 바가 있으니, 그것은 곧, 당신을 사랑하려는 자연적 경향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공연히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경향은 한가하게 있지 않고 그러한 일반적인 명령으로써 그 경향대로 실행하도록 우리를 자극하여, 계명을 준수케 하며, 또 이 세상에 아무도 그런 것을 실천하기 위해 요구되는 수단을 풍부히 갖추지 못하고 살게 버려두지 않으시는 것이다.
태양은, 생활케 하는 제 열로써 만물을 비추며, 마치 하계의 사물들에게 보편적 사랑을 지닌 듯이, 만물에 필요한 힘을 줌으로써 만물은 생산하는 능동성을 발휘하게 된다. 이와같이 전선하신 하느님은, 모든 영혼을 사랑하시며, 모든 마음을 당신의 사랑으로 품으시고 용기를 돋우시어 만민에게 그 뜨거운 열을 받게 하신다. 솔로몬은 말한다. “지혜가 바깥에서 외치고 광장에서 목소리를 높인다. 법석대는 거리 모퉁이에서 소리치고 성문 어귀에서 말을 한다. ‘어리석은 자들아, 언제까지 어리석음을 사랑하려느냐? 언제까지 빈정꾼들은 빈정대기를 좋아하고 우둔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려는가? 내 훈계를 들으러 돌아오너라. 그러면 너희에게 내 영을 부어주어 내 말을 알아듣게 해 주리라.”(잠언 1,20-23)
같은 이 예지는, 에제키엘을 통해 다시 말씀하신다. “너 사람의 아들아, …‘너희는 우리의 죄와 죄악이 우리를 짓눌러, 우리가 그것들 때문에 스러져 가는데, 어떻게 산단 말인가?’ 하고 말한다. 그러니 그들에게 말하여라. ‘내 생명을 걸고 말한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나는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한다. 돌아서라. 너희 악한 길에서 돌아서라. 이스라엘 집안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으려 하느냐?’”(에제 33,10-11)
그런데, 하느님에 의해, “산다”는 것은 곧, “사랑한다”는 것이며 “사랑하지 않는 자는 죽음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1요한 3,14) 것과 같다. 그러니 테오티모여, 보라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기를 얼마나 열망하시는지를. 그러나, 하느님은 사랑받으시려는 열망을 공공연히 선포하시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시고 우리 각자가 당신 사랑의 초대에 다 참여할 수 있기를 열원하신다. 그래서 집집마다 다니시며 문을 두드리시고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하시며 강조하신다. 즉, 그와 더불어 선의의 모든 것을 하시리라는 증언이다.
그런데, 테오띠모여, 이 모든 것은 다 무엇을 뜻하겠는가? 하느님은 당신을 사랑하는데 아주 단순하고 넉넉한 방법을 우리에게 주셨으며 또 우리가 당신을 사랑함으로써 당신은 우리를 구원하실 뿐 아니라, 풍부하고 훌륭한 수단, 즉, 그 위대하신 자비에 합당한 수단을 주셨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완고한 죄인들에게 위대한 사도께서는 말씀하신다. “그대는 하느님의 그 큰 호의와 관용과 인내를 업신여기는 것입니까? 그분의 호의가 그대를 회개로 이끌려 한다는 것을 모릅니까? 그대는 회개할 줄 모르는 완고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의로운 재판이 이루어지는 진노와 계시의 날에 그대에게 쏟아질 진노를 쌓고 있습니다.”(로마 2,4-5)
나의 사랑하는 테오티모여,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완고한 자들의 회개를 위해 필요한 만큼의 치료법을 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풍요로운 자비를 쓰셨던 것이다. 앞에서 본 것처럼, 사도께서는, 회개할 줄 모르는 자들의 마음에 있는 악의의 축적과 하느님의 풍요한 자비를 대조시켜서 악스러운 마음은 죄악으로 차고 넘쳐 죄인들의 개과를 위해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그 인자까지도 경멸한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더구나 그들은 하느님의 풍요로운 자비만이 아니라 회개로 그들을 이끄시는 그 자비까지도 경멸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자애는 그들도 모를 수 없는 것이다. 정말 당신을 사랑하도록 하느님께 죄인들 위에 자유로이 내려 주시는 하느님의 풍부하고 충만한 그 방법은 성경의 어느 곳에서나 다 찾아볼 수 있다.
문 앞에 서 계신 사랑의 하느님을 보라! 그는 그저 문을 두드려 보시고 마는 것이 아니라, 머물고 두드리며 서서 영혼을 부르신다. “나의 연인이여 베텔 산 위의 노루처럼 젊은 사슴처럼 어서 돌아오셔요.”(아가 2,17) 그리고 당신의 손을 문고리에 대어 보시고, 열 수 있는지를 살펴보신다. 만일 그가 길거리에서 소리를 지르며 외친다면, 역시 여기서 간단하게 한두 마디 소리 지르다가 말지 않으시고 오히려 외치면서 두루 다니시니 즉, 끊임없이 외치시며 다니시는 것이다. 각자의 회심을 위한 부르짖음은 아무리 반복해도 모자라듯이 “회개하여라. 너희의 모든 죄악에서 돌아서라. 그렇게 하여 죄가 너희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하여라. 너희가 지는 모든 죄악을 떨쳐버리고, 새 마음과 새 영을 갖추어라. 이스라엘 집안아!”(에제 18,30)라고 하신다.
하느님이신 구세주께서는 당신의 작품들 위에 베푸실 자비를 보이심에 있어서 아무것도 잊지 않으신다. 즉, 당신의 자비는 당신의 심판을 초월한다는 것과, 당신의 구원은 풍성하다는 것, 그리고 당신의 사랑은 무한하다는 것을 빼놓지 않고 보이시며, 또 이것은 곧 저 사도께서 하신 말씀과도 같다. 그는 자비의 부자이시므로,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1티모 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