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인들은 주님의 탄생에 관한 이 ‘기적적’인 이야기를 신화로 읽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그렇지만 우리 신앙인들은 이 이야기가 우리 신앙에 전달하고자 하는 그 깊은 내용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복음사가의 의도이다. 복음사가는 이 복음을 읽는 이들이 예수님이라는 인물이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보내시고자 하는 바로 그분이며, 하느님만이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것을 전하고 싶어 한다. 그뿐만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느님으로서 인간이 되어 오셨으며 이것이 진정 하느님의 뜻이 나은 결과였고, 하느님이 제안하시고 인간이 이를 받아들인 혼인과도 같이 하느님이 인간과 맺으신 ‘감탄하올 교환’의 결과였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자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곧 하느님이시며, 인간들 사이에 하느님의 현존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복음사가 마태오가 전하려는 신앙을 위해서는, 어쩌면 “거룩한 성령으로 말미암은 마리아 몸 안의 잉태”라는 표현 말고는 그 어떤 다른 내용으로도 서술이 되지 않았을 것이며, 최상의 적절한 서술이었을 것이다.
이사야 예언자는 제1독서의 이사야 7,10-14를 통하여 보듯이 기원전 740년경 성전에서 예언자로서의 부르심과 사명을 받고 예언자의 삶을 시작한다.(참조. 이사 6,1-13) 정치적 위기 상황에 부닥친 아하즈라고 하는 왕에게 간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을 믿는 이만이 살아남을 것이니 “진정하고 안심하여라. 두려워하지 마라.”(이사 7,4) 하며 이스라엘의 하느님만을 믿으라고 요청한다. 이어서 이를 믿기 위하여 “주 너의 하느님께 너를 위하여 표징을 청하여라.”(이사 7,10) 한다. “주님을 시험하지 않으렵니다.”(이사 7,12)라며 이를 거부하는 왕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Immanu-El=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이라 할 것입니다.”(이사 7,14)라면서 주님 편에서 주어질 표징을 약속한다. 한 아기의 탄생이 하느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백성과 함께하신다는 표징과 보증일 것이라고 한다. 오늘 복음은 바로 이 대목을 다시 인용하고 있다.
로마 1,1-7의 제2독서는 바오로 사도께서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의 서두 부분으로서 신학적인 내용이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으로서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하느님의 복음을 위하여 선택을 받은 바오로”(로마 1,1)라는 구절로 자신을 소개한다.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복음”은 바로 “하느님께서 당신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미리 성경에 약속해 놓으신 것으로…육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약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 태어나셨고, 거룩한 영으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시어,…하느님의 아드님으로 확인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로마 1,2.3.4)이다.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복음”은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나셨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인간으로 사셨으며, 죽은 이들로부터 부활하시어 영원히 살아계시는 주님이 되셨다는 사실이다. 오늘 전례 복음 역시 예수님께서 다윗의 후손이시며 메시아 왕이심을 밝혀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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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림, 끝날에 다시 오시는 분, 영광중에 다시 오실 사람의 아드님을 기다리는 대림시기를 끝내려고 하는 대림 제4주일이다. 이제 교회는 12월 17일부터 주님의 탄생 전야까지 사제들이나 수도자들의 성무일도에서 성모님의 노래 후렴으로서 ‘오, 안티폰O-Antiphon(O Sapientia-오 지혜시여’, ‘O Adonai-오 아도나이, 저의 주님’, ‘O radix Jesse-오 이새의 뿌리여’, ‘O clavis David-오 다윗의 열쇠여’, ‘O Oriens-오 동방의 빛이여’, ‘O Rex gentium-오 만민의 임금이여’, ‘O Emmanuel-오 임마누엘이여’)을 장엄하게 노래하는 특별한 시기인 ‘기억’의 시기를 시작한다. 과거와 역사 이전의 메시아 시대를 기억하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어떻게 이 세상에 오셨는지를 기억한다. 이 기억이야말로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우리 믿음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저 과거에 오신 주님의 성탄만을 단순하게 기억하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이 시기에 우리의 믿음과 신앙의 중심이 되는 신비, 육화의 신비, 강생의 신비,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드러난 사건과 마디에 관한 신비를 고백한다.(※참조. https://benjikim.com/?p=7559 오–안티폰O-Antiphon, 12월 17일부터)
1.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마태오는 복음의 시작에서부터 예수님의 “족보”(게네시스, Γένεσις, ghénesis-마태 1,1), 곧 예수님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밝히려고 복음을 기록한다. 곧 갈릴래아의 나자렛에 살던 한 소녀, 마리아, 요셉의 약혼녀로 알려진 분이 예수님의 뿌리임을 밝히려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메시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마태 1,18)이라고 기록한다. 일단 약혼으로 혼인이 성립되지만 두 약혼자 사이에, 특별히 혼인 성립 시기가 주로 청소년기의 나이에 해당하므로 동거와 혼인의 의무가 일정 기간 유보되던 당시 히브리인들의 혼인 관습을 바탕으로 하는 기록이다.
그런데 결혼이 완전하게 성립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는 바로 이 시기에 마리아의 태중에 세상에 나오려는 아기가 들어섰다고 하는,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도대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마태오 복음사가는 그 아기가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아들의 창조를 하느님께서 마리아 안에 이루셨다는 사실을 묘사하려 한다. 어떤 필연이나 운명을 넘어서 사람들 사이에 ‘오시고자’ 하는 하느님 자신의 뜻이라는 사실을 이렇게 밝히는 것이다. 마리아라는 한 여인, 그 마리아 안에 “물 위를 감돌고 있던 (창조주) 하느님의 영”(창세 1,2)이신 성령의 활동, 그리고 한 증인으로 등장하는 요셉이라는 한 남자,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기원이요 족보이다.
복음사가 마태오는 마리아나 요셉의 심리적인 반응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도저히 해결할 길이 없고 설명이 되지 않는 막막하기만 한 ‘아포리아(ᾰ̓πορῐ́ᾱ, aporia, 길이 없다는 뜻으로 난제難題를 말함)’에도 불구하고 실제 상황에서 이를 정면으로 돌파하려는 듯이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마태 1,19)라는 기록을 이어간다. 마리아는 남자를 알지 못했고, 요셉은 일어난 일을 무시한다. “의로운 사람”, 차디크(צַדִּיק, tzaddiq, 참조. 창세 6,9 2사무 23,3 잠언 21,15 영어로 righteous man이라 번역하는 히브리 말), 신실한 사람인 요셉은 마리아를 수치스럽게 하지 않으려고 마리아의 임신을 공개적으로 문제 삼지 않으면서 조용히 혼인 관계를 해소하려 한다.
요셉이 왜 그렇게 행동하려고 결정했는지 그 의도를 파악하는 것은 어렵다. 이를 두고 교부들의 의견이 분분하고 때로는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것도 사실이다. 혹자는 비폭력적으로 간음에 관련된 법(참조. 신명 22,23-24)을 적용하려 했다고 해석하는가 하면, 또 다른 이들은 실망하고 상처받은 요셉이었으나 하느님에게서 왔다는 아기에 관한 마리아의 설명을 듣고 나서 두려움에 찬 나머지 한 발 뒤로 물러섰다고 해석하기까지 한다. 하느님의 친자親子 확인에 요셉이 자기의 친자 권리를 포기했다는 식이다.
2. “꿈에 천사가 나타나”
이러한 아포리아는 말씀으로 ‘베일을 걷어’(re-veil<revelation) 주시는 하느님 편에서 다가오는 ‘계시’로써만 해결이 가능하다. 그래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 1,20-21)라고 기록을 이어간다. 요셉이 잠자는 사이에 꿈을 통해(구약에서 여러 번 인간의 꿈을 통해 당신의 뜻을 알리셨듯이 – 참조. 야곱의 아들 “꿈쟁이” 요셉, 창세 37,5-11.19)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난다.
천사의 메시지는 요셉의 신원과 사명을 밝히는 내용이다. 천사를 통하여 요셉에게 주어진 주님의 말씀은 다윗의 자손에게 주어진 약속의 성취로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것이니 순명하라 하신다. 이로써 요셉은 남편으로서의 권리를 박탈당함과 동시에 자기 아들이 아닌 이의 아비로서, 곧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루카 1,77)이라는 사명을 담고 있는 이름인 “예수”의 아버지로서 살아가기 위한 삶을 요구받는다. 요셉은 자기의 원의나 결정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에 의해서 생긴 아들의 아버지가 되라는 초대를 받는다. 요셉은 제대로 신비의 깊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그저 “요셉의 아들”(루카 4,22)이라고 부를 뿐인 율법에 따른 아버지가 되라는 요청, 군중이 그를 약속된 “다윗의 자손”(마태 21,9)이라고 외칠 수 있도록 하라는 요청을 받는다.
이러한 기적의 사건을 대하면서 현대인들은 그저 신화적인 이야기로 이를 받아들이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그렇지만 순수한 시선으로 이 이야기가 우리의 신앙에 전달하고자 하는 깊은 뜻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만 한다. 그저 내러티브narrative의 형식으로만이 아니라 복음사가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를 알아듣는 것이 중요하다. 복음사가는 독자들이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예수님, 하느님께서 보내주시기로 하신 예수님이라는 분, 바오로 사도의 표현대로라면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 2,6-7)라는 사실을 전하면서 사람들이 이를 알아들으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은 진정 하느님 뜻의 결과이며, 이는 마치 하느님의 개입과 마리아의 응답으로 하느님과 인간 간에 이루어진 혼인 동의처럼 『감탄하올 교환(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제1저녁 / 제2저녁 기도, 시편기도 후렴1)』이다. 후렴은 『감탄하올 교환이여, 창조주께서 육신을 취하시어 동정녀에게서 나시기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인간의 협력 없이 사람이 되셨으며, 우리를 그 신성에 참여케 하셨도다.』라고 노래한다. 예수님과 하느님의 관계, 인간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어떻게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마리아의 태중에 열매를 맺으신 ‘성령의 기름부음’이라는 표현만이 신앙을 위한 적절한 표현이었을 것이다.
3.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나으리니…임마누엘”
요셉은 아들에 대한 계시를 받았다기보다 마치 호세아 예언자가 “창녀와 창녀의 자식들을 맞아들여라.”(호세 1,2) 하는 소명을 받은 것처럼, 예레미야 예언자가 고독한 눈물의 독신으로 남으라는 소명(예레 16,1-2)을 받은 것처럼, 에제키엘 예언자가 홀아비로 지내는 소명(참조. 에제 24,16)을 받은 것처럼, 그렇게 자기의 아들이 아닌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아들로 받아들여 동반하라는 소명을 받는다. 그리하여 요셉은 약혼녀 마리아에게 집을 줄 뿐만 아니라 일찍이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 약속되었던 메시아의 혈통인 다윗의 가계家系와 예수라는 이름 자체에 그 아들의 소명이 담겨 있는 이름도 준다.
그래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언서를 인용하고 그 해석까지 덧붙여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이사 7,14)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마태 1,22-23) 한다. “동정녀”라는 말을 두고 <주석성경>은 『이 말씀은 칠십인역에 따라 이사 7,14를 인용한 것이다. 칠십인역은 히브리 말 본문의 “젊은 여인”을 “동정녀”로 옮긴다.』라고 풀이한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그 어떤 저항이나 반대도 없이)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마태 1,24) 우리는 복음이 기술한 대로 요셉을 “의로운 사람”(19절)으로서 주님께 믿음을 두고 묵묵히 침묵 속에서 주님을 따르는 사람으로 안다. 그렇지만 부르심은 다르다. 하느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선포하고, 알리고, 심지어 세례자 요한처럼 외쳐야 한다.(참조. 마태 3,3 이사 40,3) 그리고 구체적으로 그 부르심을 살기 위해 깊은 침묵의 심연에 들어가기도 해야 한다. 복음에서 우리는 요셉의 말을 한마디도 듣지 못한다. 그러나 그가 침묵과 순명 속에 살아야만 했다는 사실을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는 그저 입을 다물고 조용히 있는 침묵이 아니라 아기와 아기 어머니의 보호와 찬미, 신비를 깊이깊이 살기 위한 침묵을 살아낸 것이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준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놀라게 하실 수 있으며, 그분 앞에 우리가 우리 나름대로의 의로움과 바름으로 애써서 결정하고 추진하려고 하며 이미 오랫동안 추진해왔던 것마저 한순간에 허망하게 이를 무너뜨리시고, 암담하게 보이고 황당하게 생각하는 방향을 향하여 나아가라고 방향과 길을 바꾸라고 일순간에 명령하실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길은 걸으면서 열린다』라고 안토니오 마차도Antonio Machado(1875~1939년)가 말했듯이 주님께서 내 앞에 앞서 나가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면서 발걸음을 떼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저 이것만이 우리에게 충분한 것이리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