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18,33ㄴ-37(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나’해)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요한 18,37) by 조르주 루오Georges Rouault(1871-1958)

우리는 전례력을 따라서 마르코복음을 들었던 ‘나’해의 마지막 주일에 도달했다. 지난 주일에 마지막으로 들은 마르코복음의 “사람의 아들”이 다시 오심에 관한 선포는(참조. 마르 13,26) 우리를 행복하게 했다. 주님께서 영광중에 어서 다시 오시기를 우리가 간절히 희망하고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다시 오시는 영광의 주님을 기리면서 ‘나’해를 마감하는 전례 복음으로서 네 번째 복음, 그중에서도 나자렛 사람 예수의 수난기 중에서 한 대목을 듣는다. 연중 제17주일부터 21주일까지 복음의 맥락을 따라서 요한복음을 전례 복음으로 취했던 것과 같은 이치이다. 특별히 예수님의 수난기 중 한 대목을 마지막 주일 전례의 복음으로 선정한 것은 그 복음 안에 예수님의 ‘제2의 공현公顯’이라고 할 수 있는 다시 오실 주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이 온 천하에 공표되는 대목이 있기 때문이다.

1.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사람들이 예수님을 (유다인들의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는 예루살렘) 카야파의 총독 관저로 끌고 갔다가”(요한 18,28) 다시 로마 총독인 빌라도에게 넘겼는데, 빌라도가 다시 총독 관저 안으로 들어가 예수님을 불러,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하고 물었다.”(요한 18,33) 빌라도는 유다인의 메시아, 하느님께서 기름 부어 성별聖別하시고 보내신 그리스도이신가를 묻는 것이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진정한 메시아이심을 드러내신다. 그러나 주의해야 한다. 제4복음서가 전해주는 메시아요 임금이신 예수님은 우리가 생각한 것과 전혀 다른 왕이시며 역설적인 임금이시다. 세속의 권세와 지상의 왕들이 누리는 영예가 없는 왕이시며 군중의 환호가 뒤따르지 않는 왕이시고 승리자로 드러나지 않는 그런 왕이시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노예처럼 벌거벗기시어 고문과 채찍질을 당하시고 가시관을 쓰시면서 온 우주의 유일하고도 참된 왕으로서 세상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영광을 지니신 분으로서 세상을 “끝까지 사랑”(요한 13,1)하신 분이다.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하시며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하신 분이시다. 예수님께서 당신 목숨을 내놓아 사셨던 사랑, 절대 배반하지 않는 사랑의 영광을 사신 분이시다.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이러한 영광 아닌 영광의 모습으로 드러나신 예수님의공현公顯’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복음사가 요한에 따라서 읽는 예수님의 수난기(요한 18,1-19,42)는 11개의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장면은 예수님께서 박해자들에 의해 각기 다른 장소에 계시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그 장면들의 중앙에 예수님께서 가시관을 쓰신 장면이 배치되면서 수난기 전체에서 예수님의 신원(참조. 요한 19,1-3)이 밝혀지는 정점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노예처럼 채찍질을 당하시고 군인들은 예수님을 무자비하게 대하면서 조롱한다. 군인들은 그분의 왕권을 부인하고 조롱하면서 예수님의 머리에 가시관을 씌우고 그 가시들이 파고들어 피를 흘리며 처참한 모습이 되신 예수님을 벌거벗기고 땅 위의 왕들이 입는 색인 자주색 옷을 입힌다. 그렇게 왕 형상을 만들어놓은 분에게 모욕을 주고 심지어 뺨까지 쳐대면서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요한 19,3) 하고 엎드려 만세삼창을 부르기까지 한다. 객관적으로 보아서 이 장면은 조롱과 패러디이지만, 주님의 종이시며 세상의 악에 무고하게 희생당하신 희생물로서 예수님의 진정한 왕권이 드러난다는 점에서는 참된 ‘공현公顯’이라 할 수 있다.

오늘 복음은 빌라도가 거주하는 “총독 관저 안”(요한복음 수난기에서 등장하는 4번째 장소)에서 예수님을 심문하는 장면이다. 유다인들의 지도자들이 이미 예수님을 빌라도라는 로마 총독에게 넘겨 범법자로서 고소한 뒤이다. 빌라도의 눈에는 그저 한 유다인일 뿐인 예수님의 운명에 그리 관여하고 싶지 않지만, 고소·고발인들의 압력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총독 관저 안”으로 예수님을 불러 심문한다. 빌라도는 다짜고짜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요한 18,33) 하고 묻는다. 이는 곧 예수님이 유다 땅과 민중을 향해 정치적인 힘이 있는가를 묻는 것이고, 당시의 권력자인 로마 황제인 카이사르와 로마 제국에 대한 반역의 의사를 묻는 것이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직접적인 답을 하지 않으시고 “그것은 네 생각으로 하는 말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 관하여 너에게 말해 준 것이냐?”(요한 18,34) 하고 되물으신다. 다시 말하면 빌라도 스스로 한 내적 판단인지, 아니면 다른 유다인들의 생각에 조종당한 것인지를 물으신다.

2.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빌라도는 유다인들에 의해 결박되어 자기에게 넘겨진 무력하게만 보이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경멸하는 듯한 태도로 예수님의 질문을 되받아친다. “나야 유다인이 아니잖소? 당신의 동족과 수석 사제들이 당신을 나에게 넘긴 것이오. 당신은 무슨 일을 저질렀소?”(요한 18,35) 한다. 빌라도는 자기는 예수님의 고발과 아무 상관도 없으며 유다인들끼리 서로 이러쿵저러쿵하고 있다는 듯이 말하고 자기가 예루살렘의 권한을 쥔 자임을 은근히 표현하면서 도대체 무슨 범법 행위를 저질렀는지 다시 심문한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18,36)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가 칼의 힘으로 세워진 나라도 아니고, 전쟁을 일으킬 군사도 없으며, 세상에서 패권을 다투는 나라들과는 거리가 먼 나라라고 하신다. 당신의 왕국은 세상의 왕국들과 경쟁할 것도 아니며 비교할 수도 없는 왕국이라고 하신다. 예수님의 나라는 참으로 지배가 아니라 섬김의 나라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부르는 나라이며 평화와 정의의 나라이고 이 세상 권력을 통해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그런 나라이다.

3.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진리를 증언하려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빌라도는 예수님의 말씀에 동조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맞설 수도 없던 나머지 “아무튼 당신이 임금이라는 말 아니오?”(요한 18,37) 하고 다시 묻는다. 이 말은 ‘당신은 어떤 명목으로든 당신 동족인 유다 지도자들에게 잡혀 나에게 넘겨졌고, 나의 권한으로 내가 사형에 처할 수도 있는데 왜 임금으로 행세하려는 것이오?’ 하고 묻는 셈이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요한 18,37) 하고 대답하신다.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요한 3,16) 하시려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관한 “진리”요 “증언”을 말씀하신다. 주의해야 한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진리”는 추상적인 실재나 논리적인 교리, 혹은 윤리 정도가 아니다. “생명”, 예수님의 생명,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자의 생명, 죽음에 이르기까지 “끝까지 사랑”하시는 생명, 예수님께서 당신의 생명 안에 사시는 하느님의 생명, 그분을 만나고, 그분을 보고, 그분을 듣는 이들이 누리는 생명이다.

빌라도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대답에서 참다운 예수님의 신원이 드러나고, 공현公顯이 이루어진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그 어떤 임금과도 다른 임금님, 우주의 임금님, 모든 인간의 임금님, 하느님께서 생각하시고 뜻하셨으며 창조하신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임금으로, 두려움 없이, 거침없이 자신을 계시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인간과 세상사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해방하시고, 하느님께서 다스리심과 같이 오직 사랑으로만 말씀하시고 행동하신다. 하느님의 나라가 진정으로 임하셨고 우리 가운데에 진정으로 계시가 된 그 순간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의 그 순간일 것이다. 그런 의미로 우리는 오늘 복음의 바로 다음 대목에서 빌라도가 유다의 지도자들과 군중에게 로마법에 따를 때 예수님이 무죄라고 두 번이나 선언한 내용(요한 18,38;19,4 그리고 다시 19,6)과 “예수님을 데려다가 군사들에게 채찍질을 하게 하였다.”(요한 19,1) 하고, “가시나무 관”을 쓰고 “자주색 옷”을 입은 예수님을 밖으로 나오게 해 “자 이 사람이오”(요한 19,5) 하고 말한 내용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렇지만 빌라도는 – 복음사가 요한이 전해주는 바에 따를 때 – 예수님을 심문하는 동안, 그리고 유다인들의 지도자들이 “자기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자처하였다”라는 “말을 듣고 더욱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요한 19,7-8) 하면서 빌라도가 예수님을 무척 두려워했다는 사실을 전해준다. 이 세상의 권력자들은 그 무엇도 전혀 두렵지 않다는 것을 상대방에게 과시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곤 한다. 그렇지만, 당시 권력자라고 자처할 수 있는 사람 빌라도가 예수님 앞에서 두려워한다. 자기 방어력이 전혀 없고, 무력하며, 온유하고, 보잘것없으며, 죄가 없으면서도 참으로 다스리시는 분이시고, 이시며 온 우주의 심판자이신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

“유다인들의 임금”이요 “이스라엘의 임금”이라는 이 칭호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신원을 결정적으로 밝혀준다. 이 호칭은 요한복음의 서두인 첫 장에서 나타나엘이 처음으로 예수님을 만나 자기의 소명을 받는 순간 “이스라엘의 임금”(요한 1,49)이라고 외치는 나타나엘의 입술을 통해 드러난다. 이는 메시아요 다윗의 자손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신 왕, 당신 백성을 해방하시고 정의와 평화를 이루시겠다던 하느님의 약속을 이루시는 분을 믿어 고백하는 외침이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아에 관한 이 약속의 성취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지만, 이러한 기대는 정치적인 해방이요 세속적 권력의 메시아로 변질되고 만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께서 빵을 많게 하신 “표징을 보고”, 군중은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고” 하였지만 실패한다. 예수님께서 이를 “아시고…산으로 물러가셨기”(요한 6,14-15)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마지막 파스카를 위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군중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신다는 말을 듣고서,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스라엘의 임금님”(요한 12,12-13)을 환호한다. 그러나 그때마저도 “제자들은(제자들마저도)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2,16)

요한복음은 시종일관 “임금” 곧 메시아라는 주제어를 축으로 복음을 구성해가는 측면이 있다. 제1장에서 예수님을 만난 첫 번째 제자 나타나엘이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임금님(요한 1,49)”으로 고백하고, 예수님께서 빵을 많게 하여 모두가 배불리 먹은 후 군중이 억지로라도 임금으로 모시려고까지(요한 6,14) 하였을 때 이를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으며(요한 6,15), 급기야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군중이 다시 “이스라엘의 임금님…너의 임금님(요한 12,13.15)”이라고 환호하지만, 제자들마저 이 참뜻을 “깨닫지 못하였고(요한 12,16)”, 그렇게 환호하던 군중이 마침내 빌라도와 예수님 간에 “임금” 논쟁이 오갈 때 군중이 “우리 임금은 황제뿐이오.(요한 19,15)” 하며 돌아서는 것을 복음의 종반부로 삼는다. 이후 두려움에 찬 “빌라도는 명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달게 하였는데, 거기에는 ‘유다인들의 임금 나자렛 사람 예수 – ‘히브리 말, 라틴 말, 그리스 말’라고 쓰여 있었다.(요한 19,19.20)”라는 것으로 “왕”이신 예수님을 그리는 요한복음의 이야기는 마감한다. 이로써 예수님께서 어떤 임금이신지가 이방인 권력자에 의해 다시 한번 온 천하에 공표되고 계시된다. 바오로 사도가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필리 2,10-11)라고 기록한 그대로이다. 예수님께서 “주님(키리오스, κύριος, Kýrios)”이시라는 고백은 이처럼 십자가에서만 진정으로 계시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개혁을 통해서 우리가 거행하게 된 ‘그리스도왕’ 대축일에 교회의 은혜로운 배려로 우리는 전례 복음으로서 ‘가’해에는 ‘자비의 심판관으로 다시 오시는 주님’을 기리고(참조. 마태 25,31-46), ‘나’해(오늘 복음. 요한 18,33-37)와 ‘다’해(루카 23,35-43)에는 각각 십자가에 달리신 ‘고난의 주님’을 기리면서 그분의 왕권과 주권이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만 계시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진리를 찾는 사람은 모든 두려움을 쳐부수고 이겨내며 극복해야만 한다. 즉, 진리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진리는 그 어떤 이유로도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 진리는 마치 더욱더 자라나는 나무요 더욱더 많은 열매를 주는 커다란 나무와 같다. 반면에 그런 진리를 찾는 이는 먼지보다도 더욱 작고 겸손한 이여야만 한다.

만일 내적인 진리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면 그 진리가 어디에 있는지 찾을 필요가 있겠는가? 진리에 대한 완벽한 인식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은 하느님을 소유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바로 진리이시기 때문이다.…진리이신 하느님께서는 그를 찾는 이를 맞으러 나아가신다. …완전한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 진리이신 하느님을 추구하고 실현하려는 사람이 지닌 특성을 알고 싶은가? 그러한 사람은 분노와 육체적인 욕구, 탐욕과 집착, 교만과 두려움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이다. 너와 나는 하나이다. 나 자신을 상처 입히지 않고 너를 상처 입힐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내가 힌두교의 종인 것처럼 회교도의 종이고, 그리스도인의 종이며, 페르시아인들의 종이고 히브리인들의 종이다. 나는 나의 체면을 생각하지 않는 종이며 오직 사랑만을 생각하는 종이다. 사랑은 동전의 또 다른 면이고 진리는 사랑의 권리이다.(마하트마 간디)』 아멘!

2 thoughts on “요한 18,33ㄴ-37(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나’해)

  1. 하느님이 세우신 나라
    완전히 자유로운 나라
    사랑이 진리인 나라
    하느님은 사랑이고 진리인 나라.


    나라에
    살고 있음을
    기억하겠습니다.

  2.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37절에.. 눈을 못 떼겠어요.
    어제..읽었으면 좋았을 것을요.
    감사합니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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