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

‘배(腹)를 그러안고(抱) 고꾸라져 넘어질(倒) 정도로 몹시, 끊어지게(絶) 웃는다’는 뜻으로 ‘포복절도抱腹絶倒’라는 말이 있다. 이를 두고 누군가가 유식함을 뽐내느라 ‘포복졸도抱腹卒倒’라고 적어놓은 것을 보고 한 번 더 웃었다. 세상을 살다 보면 포복절도할 만큼 웃을 일이 그리 많지는 않다. 그래도 조용한 미소라도 자주 띠며 살아야 한다. 삶이 때로는 무겁고 팍팍할지라도, 웃음은 마음을 가볍게 하고 영혼을 숨 쉬게 한다. 봉헌생활을

잎 엽/땅 이름 섭/책 접葉

비가 종일 내린다. 이 비가 그치고 나면 이미 가지에 맺혀있던 이른 꽃눈이 조심스레 열릴 것이다. 성질 급한 풀들이 먼저 고개를 들고, 수많은 잎이 거대한 약동을 시작할 것이다. ‘(나뭇)잎 엽葉’은 ‘풀 초艹’ 더하기 ‘인간 세世’ 더하기 ‘나무 목木’으로 구성되었다. 한가운데 ‘세상/인간 세世’를 품고 있는 글자이다. 나뭇잎을 가리키는 葉보다 枼이라는 글자가 먼저 쓰였는데, (여러 가지 설이 있기는

꿈 몽夢

어떤 시험장에서 시험지에 답을 써야 했다. 여럿이 함께 있는 시험장이었는데, 각양각색의 무더기로 놓인 종이들 가운데서 자기가 원하는 시험지를 골라 서술형 답을 쓰는 방식이었다. 잠시 미적거리다 종이 더미에 다가갔을 때, 내가 좋아하는 양면 백지는 이미 모두 사라지고 여러 종류의 이면지만 잔뜩 남아 있었다. 답을 어떻게 써야 할지는 알고 있었고, 대략 어떤 순서로 써 내려갈지도 계산해 두었다.

초록별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의 이야기이다. 은빛, 금빛, 노랑, 하양, 파랑, 초록…. 어느 날 이 형형색색의 별들이 모여 하느님께 하늘에서만 말고 땅에서도 살아보게 해주시라고 청했다. 위에서만 내려다보던 땅의 사정을 몸으로 체험하며 느끼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하라 하셨다. 그 청이 허락되던 밤, 땅 위의 사람들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많은 별똥별을 보았다. 몇몇이 그 광경을 보기 위해

풀 타령: 엉성할 초/풀 초草

풀들이 빛을 잃고 시들해졌으며 죽었다. 그리고 그 위에 나뭇잎들이 수북하더니 어느새 눈이 쌓여 풀들은 자취를 감추고 눈 세상이 되었다. ‘풀 초草’는 ‘풀 초艹(艸)’라는 의미부 글자와 ‘일찍 조早’라는 소리부 글자(조→초)가 합해져 만들어진다. 한 해가 시작할 무렵 사방 천지에 일찍 돋아나 변화를 알리는 것이 풀이라지만 한 해의 마감에는 어느새 자취를 감춘다. ‘풀 초艹(艸)’라는 글자는 싹이 삐죽이 돋아나거나

그랜드 캐년

미국 생활을 청산하기 전, 나를 오랫동안 잘 아시는 미국 신부님께 내가 미국을 떠나기 전 꼭 했으면 좋을 것 같은 것이 무엇일까를 여쭤보았다. 신부님의 망설임없는 대답은 ‘그랜드 캐년 방문’ 권고였다. 그래서 설레임 속에 말로만 듣던 그랜드 캐년으로 향했다. 캐년으로 들어서는 길에 머리에 떠오른 것은 문득 가톨릭성가 2번이었다. 그랜드 캐년 앞에 서면 그 노래를 불러야만 할 것

두 번 부르심

쓸어야 할 은행잎이 많다. 숲이나 호숫가의 낙엽은 쓸 필요 없이 그대로 두어야 멋이지만, 복잡다단한 인간사 안에 떨어진 나뭇잎들은 멋이기는커녕 자꾸 쓸어야 하고 쓸리는 천덕꾸러기들이다. 쓸어야 할 낙엽처럼 부르심의 삶에도 그런 순간들이 있다. 성경에는 ‘아무개야, 아무개야!’ 하고 하느님께서 누군가를 두 번 거듭 부르시는 특이한 이야기들이 있다. 물론 전해지는 이야기의 맥락에서 부름의 횟수가 관건이 아닌 것은 자명하다.

가을, 10월

9월은 가을의 문턱이다. 9월이 들어서면서 도무지 떠날 것 같지 않던 여름이 물러나고 있다는 것을 심리적 안도감으로 느꼈다. 9월은 영어로 끝이 ‘~ber’로 이어지는 달들(September, October, November, December)의 시작을 알렸다. 어린 시절 영어를 배우면서, 가을을 autumn이라 하기도 하고 fall이라 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느꼈던 묘한 이중성처럼, 가을은 본디 두 얼굴을 지닌 계절이다. 한 해의 절반이 꺾여

한처음에 ChatGPT가?

컴퓨터 앞에 앉으면 컴퓨터의 여러 브라우저가 경쟁하듯 서로 자기에게 무엇이든 물어보라 한다. 낯설었던 AI는 어느새 우리 생활 깊숙이 파고들었다. AI와 검색 엔진이 결합한 대화형 검색 도구들만 하더라도 무척 다양하다. ChatGPT(OpenAI), Gemini(구 Google Bard), Copilot(구 Bing Chat by Microsoft), Perplexity AI, You.com 등과 같은 대표주자들 말고도 유사한 도구들이 넘쳐난다. 그 녀석들에게 “하느님이 과연 계시는가?”를 일일이 물어보았다.

성낼 분憤‧忿

‘분노’라는 말을 한자어로 찾으면 ‘성낼 분憤’을 써서 ‘분노憤怒’라고 하거나 같은 뜻을 가진 ‘분忿’이라는 글자를 써서 ‘분노忿怒’라고 쓴다. ‘분憤’이나 ‘분忿’은 전혀 다른 글자이지만, 뜻이 같으므로 서로 통용이 되는 ‘통자通字’이다. 우리말 사전에서도 ‘분노’를 검색하면 憤怒·忿怒라는 한자어를 나란히 기록해준다. ‘분노’는 속에서 화증火症이 치밀어오르는 것이고, 심하면 머리끝까지 끓어오르므로 비틀려 질질 나오듯 어느 순간 자아낼 수밖에 없고, 참다못해 버럭 성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