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대희년인 2000년 부활 제2주일에 폴란드 출신 파우스티나 수녀의 시성식을 거행하는 자리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기릴 것을 당부하였다. 이에 따라 교회는 2001년부터 해마다 부활 제2주일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Divine Mercy Sunday)’로 지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그분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느님의 자비에 감사드린다. 이 주일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이라 하게 된 것은 성녀 마리아 파우스티나(St. Faustina Kowalska 1905~1938년)의 계시와 직접 연관이 있지만, 교회의 역사 안에서는 성 아우구스티누스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부활 팔일 축제를 ‘자비와 용서의 날들(the days of mercy and pardon)’이라 불렀다. 당신의 옆구리를 토마스에게 보여 주시는 오늘 복음의 장면을 통하여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하느님의 자비가 온 인류에게 미쳤음을 기억할 것이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쓴 복음의 마지막 장을 만난다. 실제로는 요한복음이 21장까지 있지만, 이미 20장 30-31절에서 ‘복음서를 쓴 목적’이라는 내용으로 복음을 마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21장은 나중에 덧붙여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마지막 장이라 할 수 있는 20장에는 마리아 막달레나와 사랑하시는 제자, 그리고 토마스를 비롯한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가 하는 증언들이 담겨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시고, “용서하라” 하신다. 현실적으로 성탄보다 부활을 더 실감하지 못하는 것은 예수님의 평화와 성령을 받아 서로 용서하는 자리에서만 부활 체험이 가능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리스도인은 용서로 주님의 평화를 서로 나누면서 부활을 체험한다. 어쩌면, 용서만이 예수님의 평화와 부활을 체험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1. “주간 첫날 저녁”
오늘 복음 역시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요한 20,19)이라는 말로 시작하면서 ‘주님의 날’, ‘부활의 날’ 저녁을 배경으로 한다. 그날 저녁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마리아 막달레나가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 20,18) 하고 이미 예수님의 부활을 알려주었는데도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요한 20,19)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두려워하는 “유다인들”은 과연 누구이며,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유다인들”은 누구인지를 생각해 볼 일이다. 제자들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제자들은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렇지만 잠긴 문을 통해서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오신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돌무덤을 열고 나오시듯이(요한 20,1 참조), 예수님의 승리는 모든 인간적인 조건이나 조작, 인위적인 상황을 넘어선다. 닫힌 세상이 열린 세상으로 바뀐다. 주님께서는 문이 모두 잠긴 상황에서 토마스에게도 나타나신다.(26절)
복음은 제자들이 모여 있던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요한 20,19) 말씀하신다고 전해준다. “주간 첫날”인 주님의 날에는 언제나 부활하신 주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인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있는 곳에 오시고, 우리의 중심이 된다. 때에 따라서는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문을 닫아 걸고 다른 이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폐쇄 집단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그러한 공동체는 주님께서 함께하시는 공동체가 아니다. 주님께서 가운데에 서지 않으시면, 우리는 그러한 폐쇄 집단이 되고 만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첫 번째로 제자들 가운데에 오신 날, 주님께서는 특별한 모습으로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신다. 사람들 가운데에 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부활하시어 영원히 살아계신 주님의 모습으로 제자들 가운데에 오신다. 그분은 여전히 성모님의 아드님 예수, 그분이지만, 더는 죽을 육신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시는 분이시다. 이 새로운 현존은 육체적인 현존을 뛰어넘는 것이고, 모든 장벽과 닫힌 문들을 부수시는 현존이므로 감히 인간의 힘이 제어할 수 있는 그런 현존이 아니라 더욱더 강력한 현존이며, 형제적인 삶, 통교의 삶, 교회를 통해서 믿을 수 있고 체험할 수 있는 현존이다.
2. “숨을 불어 넣으며…누구의 죄든지 용서해주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인 회중을 주재하는 중심에 서신다. 그리고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요한 20,19) “평화”는 메시아의 축복이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의 공동체에 하신 첫 마디이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Peace to you!)”는 21절, 26절에서도 반복된다. 히브리 말로 ‘샬롬!’이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평화”가 오간다. ‘shalom’은 유다인들의 평상시 인사말이고, 작별인사이다.(1사무 1,17;20,42;29,7) 그러나 여기의 “평화”는 예수님의 부활 발현과 관련된 특별한 의미의 “평화”로서 예수님께서 고별사에서 약속하신 “평화(요한 14,27)”의 실현이고 선물이다. 예수님의 “평화”는 “어둠과 죽음의 그늘 밑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그들을) 이끄시는 길”(루카 1,79)에서 “하느님과 더불어 누리는”(로마 5,1) 평화이다. “평화”는 지혜와 생명이 충만함이다.(1열왕 5,26 참조) “평화”는 메시아 시대에 베풀어지는 은혜 그 자체이다.(이사 9,5-6 미가 5,4) “평화”는 종말론적인 구원이다.(이사 52,7 에제 37,26 로마 5,1;14,7 에페 2,14) “평화”는 예수님 안에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알고 희망함이다.(요한 16,33 로마 15,33;16,20 2코린 13,11 갈라 6,16 1테살 5,23) 세상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알지도 못하고 가지지도 못한다.(요한 14,17.19.22)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평화를 받아 누리는 자들로서 세상에 평화의 표징이 되어야 한다.(요한 17,21-23) 오늘 복음에 3차례나 반복되는 “평화”는 그리스도 자체이고, 그분의 현존이다.(요한 14,27;16,33;20,19.21.26)
“평화”라는 메시아로서의 축복을 전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힌(요한 19,18) 자국이 있는 “두 손”과 군사의 창에 찔린(요한 19,33) “옆구리를 제자들에게 보여주셨다.”(요한 20,20) 수난의 흔적이지만, 인간을 “끝까지 사랑”한 하느님 사랑의 자국이다. 죽음에서 부활하시어 살아계신 주님께서는 죽음의 십자가에 더 이상 머무르시지 않는다. 모든 인간이 죽을 운명에 처해 있었던 죽음, 그리고 세상의 불의로 예수님에게 가해진 폭력적인 죽음을 모두 물리쳐 이기신 주님께서는 이제 하느님 안에 변화된 인성으로 결코 사라질 수 없고 잊혀질 수 없는 영원한 현존이 되신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 하느님의 생명이시면서 변화된 인간의 생명이시다. 인간을 생각하지 않고는 더 이상 하느님에 대해서 생각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는 분이시다.
이러한 깨달음과 함께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이제 조금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너희가 나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4,19;16,16.22)라고 하셨던 예수님께서 전에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고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요한 20,20)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은 이렇게 늘 기쁨의 원천이다.(요한 15,11;16,20-24;17,13 마태 28,8 루카 24,41.52)
제자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신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 넣으며” “성령을 받아라.” 하고 말씀하신다.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어졌다” 하시고, “숨을 거두신”(요한 19,30) 분께서 이제 “숨을 불어 넣으신다.” 하느님 사랑의 증거자가 되라고 제자들을 다시 창조하신다. “숨을 불어넣음”은 사람의 첫 창조(창세 2,7)와 에제키엘서(에제 37,1-14) 등의 구약성서에서 생명을 주는 상징적 의미로 사용된다.(1열왕 17,21 지혜 15,11 참조)
당신을 믿어 기뻐하는 공동체에 숨을 불어넣어 새롭게 하신 분께서 이제 그 제자들을 새로이 파견하시며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하신다. 제4복음서에 따를 때 사도들이 파견된 것은 사람들이 죄의 용서를 통한 구원의 가능성을 체험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그 무엇도 다른 것이 아닌 죄를 용서하고 빚을 탕감하며 오로지 용서하는 것만이 파견된 자들의 임무이다. 용서, 죄의 용서, 형제들 사이의 죄를 지우고 하느님의 책에서 그들의 죄를 지우는 것만이 인간이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숨을 불어넣으시어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예수님의 새로운 창조의 목적은 결국 “용서”를 통한 하느님 계획의 실현이다.
3.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과 만나고 주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장면에 제4복음사가는 열두 사도 중 하나였던 토마스 사도의 체험을 더한다. 토마스는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 11,16) 하고 말했지만, 결국 다른 사도들처럼 실제로는 도망치고 말았던 사도이다.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요한 20,24)는 다른 형제들이 전해주는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 그리고 그들이 체험했던 그분의 현존을 아랑곳하지 않고 믿으려 들지 않는다. 토마스 사도는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요한 20,24) 공동체와 함께하지 않을 때 예수님을 만날 수도 없고 그분께 대한 의심이 든다. 공동체와 함께하지 않을 때 악마는 의심과 불신의 덫을 놓는다. 토마스는 아직도 8일간 계속되고 있던 과월절의 분위기, 그리고 유다인들이 무서워 나다니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제자들의 일상에 필요한 심부름을 하러 갔을 수도 있고, 아니면 ‘함께 모이자’는 베드로의 권고를 아랑곳하지 않고 피했을 수도 있다. “쌍둥이”에서 우리는 토마스처럼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는 토마스의 또 다른 반쪽이 되어있는 인간들의 속성을 본다. 절망과 의심, 불신을 갖는 이는 어떤 의미에서 모두 토마스의 다른 반쪽이며 쌍둥이인 셈이다.
“여드레 뒤”, 공동체가 주님의 날, 부활의 날, 주간 첫날에 다시 모였을 때 토마스도 함께하던 날이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토마스에게…”(요한 20,26) 당신의 부활하신 몸에 남아 있는 구멍 뚫린 “손”과 “옆구리”, 수난의 흔적, “끝까지 사랑”하신 사랑의 흔적을 보여주신다. 이에 토마스는 주님께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하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제4복음서에서 가장 간결하면서도 가장 웅변적으로 드러나는 신앙고백문이다. 사랑의 고백이요, 믿음의 고백이며 회심의 고백이다. 토마스의 신앙고백이고,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제자로서의 유일한 신앙고백이며, 마지막 신앙고백이고, 요한복음 전체의 요약이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에 대한 다양한 고백(요한 1,49;4,42;6,69;9,37-38;11,27;16,30;20,16)의 절정이다. 요한복음의 이 마지막 신앙고백에서 “주님”과 “하느님”이라는 두 칭호가 결합된다.(요한 1,1.18 로마 9,5 참조) 부활하신 분은 진정 교회의 “주님”이요 “하느님”이시다. 이는 보지 않고도 믿어야만 한다. 이는 교회 공동체의 선포이자 주님을 믿는 공동체의 고백이며, 부활하신 주님을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에게 계시하신 하느님의 은총이다. 토마스는 고백 후에 예수님의 손바닥에 손가락을 대보지도 않고 옆구리에 넣어 보려 하지도 않는다. 변모된 예수님 수난, 사랑의 흔적과의 만남, 그리고 그에 대한 관상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토마스는 즉시 주님의 그 상처들 앞에서, 그리고 다른 제자들 앞에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하고 믿음을 고백하였습니다. 그 제자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만져보아 그분의 신성을 알았습니다. 그분의 몸을 만져보아 그분의 말씀에 눈을 돌렸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음”을 분명히 깨우쳤던 것입니다. 말씀이신 분이 십자 나무에 당신의 몸을 누이는 고통을 당하셨고, 못에 박히셨으며, 창으로 찔리셨고, 무덤에 묻히셨던 것입니다. 바로 그 똑같은 말씀이신 분이 당신의 몸을 일으키셨고, 제자들의 눈앞에 당신의 몸을 보이시어 제자들이 그 몸을 직접 보고 만져보게 하셨습니다. 보고 만지면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을 고백하게 하시고자 함이었습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AC 354~430년)』
제4복음서의 저자는 30절과 31절에서 요한복음 전체의 기술 목적을 밝히기 전에 토마스 사도와 예수님의 만남 끝대목에서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하셨다고 전한다. 예수님께서는 한 번 더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말씀으로 이제부터 믿음이 보는 것에 근거하지 않고, 본 사람들의 증언에 바탕을 둔다는 것을 밝히신다. 이러한 신앙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깊은 일치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요한 17,20 참조)
토마스 사도에게도, 또 우리에게도 진정 어려운 것은 수난, 사랑의 흔적 안에서 빛나는 변모와 온전한 의미를 발견하는 일이다. 수난의 흔적 안에서 더 이상 죽음이나 죄의 흔적이 아닌 영원한 생명과 치유, 사랑의 표징을 발견할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해야 한다. 예수님 수난의 흔적은 고통과 죽음의 흔적이라기보다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신 하느님 사랑의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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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여러 번 나타나십니다. 주님께서는 믿지 못하는 제자들의 마음을 인내롭게 위로하십니다. 당신의 부활 후에 주님께서는 그렇게 ‘제자들의 부활’을 이루십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다시 일으켜주신 제자들이 삶을 바꿉니다. 이전에 주셨던 수많은 말씀과 모범도 그들을 변화시키지 못했었습니다만, 이제 파스카로 뭔가 새로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자비의 표징 안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비로 제자들을 다시 일으키십니다. 자비로 그들을 다시 일으키십니다. 그렇게 자비를 받은 이들이 이제 자비로운 이들이 됩니다. 자비를 입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자비로운 사람이 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십니다. 제자들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자기들 스승처럼 고발을 당해 같은 운명을 맞을까 두려워하면서 문을 닫아 걸고 집 안에 있었습니다. 집 안에만 갇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양심의 가책으로도 자기 안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제자로서 자기들의 스승을 버렸고 부인했었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이 무능하고 아무짝에도 쓸모없으며 잘못했다고 느꼈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오시고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21) 하고 두 번이나 반복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밖에 있는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평화가 아니라 내면 깊숙한 곳에 믿음을 심어주는 평화를 가져다주십니다. 겉으로 보이는 평화가 아니라 마음의 평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21) 하십니다. 마치 “내가 너희를 믿고 보낸다.”라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그렇게 믿음이 없었던 제자들이 자신과 화해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평화가 제자들을 양심의 가책에서 사명으로 건너가게 합니다. 사실 예수님의 평화는 사명을 불러일으킵니다. 그저 평온하고 조용한 것이 아니라 자신으로부터 뛰쳐나가게 합니다. 예수님의 평화는 마음을 마비시키는 폐쇄를 해체할 뿐만 아니라 마음을 옭아매어 가두는 사슬을 끊어버립니다. 제자들은 그렇게 자비를 입었다고 느낍니다. 하느님께서 자기들을 벌하시지 않고 꾸짖지도 않으시며 오히려 믿어주신다고 느낍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믿는 것보다도 더 우리를 믿으십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도 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헨리 뉴만J.H. Newman, 묵상과 기도Meditations and Devotions, 3권 12,2) 하느님께는 그 누구도 실패작이 없고, 무익한 이도 없으며, 배제된 이가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내 눈에 더없이 소중한 너에게 평화가 있기를!, 더없이 중요한 너에게 평화가 있기를!, 내가 주는 사명을 부여받은 너에게 평화가 있기를!, 너 말고는 그 누구도 너를 대신할 수 없는 너에게 평화가 있기를!, 내가 너를 믿는다.” 하고 거듭 말씀하십니다. … …(교황 프란치스코, 2021년 4월 11일 사시아Sassia 성령 성당에서 거행한 하느님의 자비 주일 미사 강론에서)」 아멘!
예수님의 평화가 제자들을 양심의 가책에서 사명으로 건너가게 합니다. 이 말씀에서 진한 울림을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