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은 세례자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36) 한 뒤, “어디 묵고 계시냐”며 당신을 따라오는 그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와서 보아라.” 하셨으며,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요한 1,39)라고 하였고, 그렇게 제자가 된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요한 1,46)라고 복음서의 1장을 기록한다.
그렇게 첫 제자 그룹을 형성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동고동락하시다가 십자가의 여정 직전에 제자들에게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요한 16,16) 하셨으며, 주님의 부활 기록에서는 “보고 믿었다”(요한 20,8)라는 표현으로 이른바 ‘빈 무덤’에 관한 이야기의 절정으로 삼고, 한 번 더 당신 손의 못 자국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는 장면을 배치하면서(참조. 요한 20,24-29)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라는 말씀으로 복음을 끝맺는다.
이처럼 “보다”라는 동사는 “믿다”라는 동사와 동의어가 되어 시종일관 요한복음을 관통한다.
“보고 믿었다”라는 사실에 관한 우리말 복음의 20장 첫머리의 전개 과정에서도 유심히 살펴보면,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는 것”(요한 20,1)을 보았고, “다른 제자”는 “아마포가 놓여있는 것(5절)”을 보았으며, 베드로는 “아마포가 놓여있는 것 –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있지 않고, 따로 한 곳에 개켜져 있는 것(7절)”을 보았다. 보고 믿는 것에 대한 점진적인 전개이다. 오늘 복음에서 “보다(1.5.6.8절)”라는 낱말과 그에 상반되는 “모르겠습니다(2절)” “깨닫지 못하고(9절)” 등의 낱말이 대비되어 나타난다.
부활절 낮미사 복음이기도 한 요한 20,1-8에서 복음사가 요한은 우리말에서 그저 ‘보다’로 번역되는 말을 주도면밀하게 3가지로 구별해서 사용한다. 사실 우리가 무엇을 본다는 것에는 3가지의 단계가 있는 셈이다. 첫째는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1절): βλέπω(vlépo, to look at, to see, to be aware of, 시각적으로 보는 것) 하는 것처럼 막달레나가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 본 것이다. 둘째는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있는 것을 보았다.”(6절): θεωρέω(theōréō, to look at, to contemplate, consider – of the mind, 찬찬히 살펴보는 것, 마음으로 보는 것, 6절) 한 것처럼 시몬 베드로가 요한을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뭔가 이상하다는 듯이 찬찬히 살펴본 것이다. 셋째는 “보고 믿었다.”(8절): εἶδον(eîdon, to see, behold, perceive, to look at or towards, to see mentally, to perceive,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보는 것, 깨우치는 것, 체험으로 보아 아는 것, 보아서 아는 것 * 이 구절에서 εἶδον대신 ὁράω, horáō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때는 전자가 눈에 보이는 대로 믿는 것을 강조하고, 후자가 깊이 경험하여 깨달음을 얻는 것을 강조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것처럼 시몬 베드로를 뒤따라 무덤에 들어간 요한이 시몬 베드로가 본 것과 자기가 눈으로 본 것을 넘어 예수님의 부활을 직감하고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보아 마음으로 깊이 깨우쳐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믿음에 이른다.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는 인간은 무엇인가를 보기 위해 빛의 힘을 빌어야만 비로소 본다. 주님의 빛이 있어서 제자들이 당신을 보고 믿을 수 있게 하신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하지 않았지만 주님의 빛을 얻어 빈 무덤만 보고도 믿음에 이른다. 베드로와 요한 사도가 그렇게 믿도록 하신 것은 주님의 빛이시며 부활의 힘이자 은총이다. 주님의 빛으로 믿게 된다. 그래서 신앙은 분명 선물이다.
주님의 빛, 성령의 빛을 얻은 제자들은 성경 말씀을 통하여 부활을 보았고,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기억으로 부활을 보았으며, 형제들과의 삶을 통하여 부활을 보았고, 마침내 부활하신 주님을 보는 은총을 입었고, 믿음의 눈을 얻었다.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이 우리 모두를 보게 하시도록, 믿게 하시도록 은총을 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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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여인들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을 만난 사람의 역사는 에덴 동산의 아담과 하와로부터 시작한다. 특별히 여인 하와의 죄로부터 불행한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던 인간은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여인, 혹은 여인들의 이야기로 구원된 인간이 된다. 낙원의 역사가 무덤의 역사로 완성되고, 굳이 얘기하자면 여인에게서 시작해서 여인으로 끝나는 역사로 마감하면서 그렇게 구세사가 이루어진다. 부활하신 주님에 관한 이야기로 복음을 끝맺는 복음사가들의 기록에 의하면, 여인들이 사도들보다 먼저 주님의 무덤을 찾았고 천사를 만난다는 사실을 전한다는 점에서는 공관복음뿐 아니라 요한복음에 이르기까지 모든 복음이 일치한다.
그렇지만 무덤을 찾은 여인들의 수는 마르코복음에서 셋(마르 16,1), 마태오복음에서 둘(마태 28,1), 루카복음에서 복수의 여자들(루카 23,55;24,1)이며, 요한복음에서 마리아 막달레나 하나(요한 24,1)로 구별된다. 한편 천사들의 수 역시 마르코복음에서 하나(마르 16,5), 마태오복음에서도 하나(마태 28,2), 루카복음에서 둘(루카 24,4), 요한복음에서 둘(요한 20,12)로 각각 나타난다. 무덤을 찾았다가 천사를 만난 여인, 혹은 여인들의 반응 면에서는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 밖에서 홀로 울고 있었다는(요한 20,11) 기록을 제쳐놓고 공관복음이 전하는 바에 따라서만 볼 때, 사뭇 다르다. 이를 올바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각 복음서의 기록 연대와 배경, 그리고 복음사가들이 속한 공동체의 상황을 고려하는 것이 먼저이다. 그렇지만 공관복음이 전하는 여인들의 반응을 수평적으로 놓고 심리적으로 살펴보는 것은 참 흥미롭다.
마르코가 “그들은 무덤에서 나와 달아났다. 덜덜 떨면서 겁에 질렸던 것이다. 그들은 두려워서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다.”(마르 16,8) 하는 것을 마태오는 “그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다.”(마태 28,8) 하며, 루카는 “여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 내었다. 그리고 무덤에서 돌아와 열한 제자와 그 밖의 모든 이에게 이 일을 다 알렸다.”(루카 24,8-9) 한다. 마르코가 여인들의 상태를 ‘겁에 질려’, ‘두려워’, ‘달아났다’, ‘말을 하지 않아’라고 하는 것을 마태오는 ‘두려워’, ‘크게 기뻐하며’, ‘전하러 달려갔다’라고 하며, 루카는 “말씀을 기억”, “돌아와”, “모든 이에게 다 알렸다”라고 하는 것이다.
단순하게 말하면, 마르코는 여인들이 겁에 질려 말도 못 할 정도로 그저 혼비백산하였다는 것이고, 마태오는 두렵고 놀랐으나 너무 기쁜 나머지 어서 빨리 그 소식을 다른 이에게 전하려 했다는 것이며, 루카는 차분하게 과거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까지 상기하면서 상황 파악이 끝나 부활에 관한 일체를 모든 이에게 알렸다 한다.
여인들의 반응은 우리 신앙의 모습이기도 하다. 자비하신 하느님의 은총으로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하느님을 만나는 사람들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혼비백산할 때가 있고, 내가 무엇인가 알게 된 기쁨을 주체할 길 없어 만나는 사람 누구에게나 이를 알려주고 싶어 내달릴 때가 있으며, 기억과 기록으로 소상하게 정리하여 후세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을’ 다 알리고자 할 때가 있다.(2021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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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비밀
예수님의 부활은 시신屍身 소생이 아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식의 우화도 아니다. 유령이나 영혼의 유체遺體 이탈이 아니다. 죽었다가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 다시 살아난다는 것도 아니다. 『죽었다가 살아났다가 다시 죽어야 할 몸으로 사는 라자로(C.S.루이스)』가 아니다. 두려움에 싸여있던 제자들이 갑자기 설쳐댔던 것이 부활의 증거가 아니냐는 들이댐은 논리도 아닌 어쭙잖은, 가당치 않음이다.
“하느님은 사랑”(1요한, 4,8.16)이시니, “서로 사랑”(요한 15,12.17)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끝까지 사랑”(요한 13,1)하느라 생긴 사랑의 상처와 자국을 온몸으로 사신 분의 부활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신비이다. 빵을 떼실 때에야 알아보는 성사이다. 감히 사랑이신 하느님의 조각이나 부스러기일지라도 내가 온전히 살아, 내가 사랑이 되어, 사랑이신 분의 사랑에 조금이라도 녹아들고 스며들어 가는 것이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당신 사랑에 나를 받아주실 만큼 내가 죽어 사랑이 되는 것이다. 당치도 않을 나를 하느님께서 거두어주심이다.
“제자”들은 이 모든 것에 관한 무엇인가 비밀을 깨우쳤거나 살짝이라도 엿본 사람들이다.(2021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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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은 발의 축제
부활하신 예수님은 세상의 심장이다. 그분께서는 온 우주에 생명을 주시며, 어제, 오늘, 그리고 언제까지나 인류라는 빈 무덤에서 터져 나오는 빛이시다.
예수님의 부활은 특별하고 독특하며 유일한 사건이다. 죽음에 대한 생명의 승리, 죄에 대한 사랑의 선포이다.
부활절은 “달리는 발의 축제”이다. 모두가 지치고 슬퍼하며, 실망에 가득 차, 무덤에 도착한다.…그랬던 그들이 다시 달려 나간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승리를 알리는 역동적인 열정을 주시는 힘이다.
오늘날, 사도들, 세상으로 들어가는 “베드로”와 “요한”은 과연 누구일까? 하느님의 용서를 받고 하느님과 화해한 “막달레나”와 같은 사람들, 세례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을 과연 모든 사람에게 알리고 있을까?
부활하신 주님의 힘은 우리를 속박에서 해방한다. 우리의 시간은 증언할 기회들, 하루에도 수천 번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우리의 미소, 용서의 행동, 포옹, 봉사, 그리고 사랑으로 드러낼 기회이다.
막달레나 마리아와 사도들은 오늘, 이 부활절 아침의 기쁜 소식과 은총을 전하기 위해 다시 달려 나가야 하는 우리 모두의 모델이다.
죽음은 마지막 말이 없다. 죽음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패망했다!
옛 예언서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 위에 서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저 발! 평화를 선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며 구원을 선포하는구나. ‘너의 하느님은 임금님이시다.’ 하고 시온에게 말하는구나.”(이사 52,7) 한다.
과연 부활절은 ‘달려야 하는 발’의 축제이다. 지치고 힘든, 슬프고 실망한 사람들이 무덤에 다다른다.…그리고 그들이 다시 달려 나간다.(20210402) *이미지들-구었
신앙은 주님께서 주신 큰 선물임음 깊이 느끼며, 그것이 나를 움직여 주님 앞으로 한걸음 더 가까이 가는 길을 찾을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보여주신 사랑으로 무장되어, 몸과 마음이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뜻을 찾고 행하도록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