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가고 싶은 방향으로만, 우리가 가고 싶은 길로만, 편한 길로만, 그렇게 골고타를 오르려 한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야 할 길을 가리키는 신호등의 화살표와 깜빡이 같은 기본 신호들은 다음 3가지이다.
1) ‘환대’라는 화살표: 대단히 어려운 U-턴을 요구하는 화살표이다. 그러나 마음의 길에서는 어김없이 직진 신호를 내리는 명령어요 십자가이다. 형제를 선물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그 형제가 들고 있는 모든 짐 가방과 함께, 우리들의 이기심이라는 세관을 빠져나가기에는 너무나도 어려운 그런 짐들을 포함해서까지, 그의 여권 그대로 그를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이름 없이, 배경 없이, 그럴듯한 인상 없이는 이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속성을 지녔기에 어려운 화살표이다. 바로 내 앞에, 내 집 앞에 살고 있는 그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말 그대로 무척 불편한 일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교는(그리스도교뿐만 아니라 인간이 원래 그러한 것이겠지만) 애매모호한 것들을 배척하며, 유별난 자기들만의 이름을 지니고, 자기들만의 구체적인 얼굴을 지니며, 자기들만의 살과 피에 맞는 사람을 받아들이려는 유혹에 쉽게 빠질 수 있는 종교이다.
2) ‘화해’라는 화살표: 길이 끊어지는 곳에 이르러 우리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는 곳에 육교나 구름다리, 혹은 지하도와 같은 것을 놓으라는 화살표이다. 나 자신을 자동으로 멈칫하게 만드는 그런 자리에 표시되는 화살표이다. 내게 적대감을 발산하는 나의 원수들 앞에서 나는 멈추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멈추어 섰더라도 나의 신경에 거슬리는 형제자매들이 그저 그냥 그대로 지나갈 수 있도록 내가 알아서 지하도를 건너라는 표시이다. 어떨 때는 사람들 사이에서 주먹을 불끈 쥐게 하고, 이를 악물게 하며, 말을 못 하게 숨이 막히게 하는, 그런 자리에 등장하는 표시이다. 내 나름대로 세심하게 이리저리 재고 분류하여 만든 관계들의 유형대로 고정시킨 범주 안에서만 돕기로 한 이웃을 넘어가라는 표시이다. 우리들이 올라야 하는 용서의 계단 앞에서 덜커덕거리는 우리 그리스도인이라는 실존의 우마차, 그 엔진을 시험해야 한다.
3) ‘일치’라는 화살표: 예수님께서 가셨던 것처럼 골고타로 오르는 행렬 속에서 발견되는 화살표이다. 혼자서가 아니라 여럿이 함께 기도하고 싸우며 함께 고통을 참아내며 가는 길에 있는 화살표이다. 나 혼자만의 외로운 오르막길이 아니라 다른 이들과 함께 어울려 가는 길에서 만나는 화살표이다. 정말 모두 함께 잘 나아가기 위해 원칙과 규정들이 있고 계획들이 있으며 정확한 표시들이 있는 길에 있는 표시이다. 저마다 모든 이들의 입장이 있어서 내가 그들 하나하나의 아래에 서야만 할 필요가 있다는 그런 표시이다. 그렇지 않으면 일치라는 천은 찢어지고 말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번 찢어지고 나면 다시 깁기 위해서 오랜 인내와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번역글, Don Tonino Bello, 이미지-wikipedia, 20160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