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엘리와 사무엘)

The Infant Samuel by REYNOLDS, Sir Joshua, 1776

구약성경에는 사무엘기와 열왕기라는 책이 있다. 오늘날에는 사무엘기 상·하권과 열왕기 상·하권으로 부르지만, 옛날에는 열왕기 1·2·3·4권으로 불렀던 책들이다. 현재의 사무엘기는 2사무 21-24장을 떼어 놓고 보면 연대순으로 이어져 있다. 그중 첫째 부분은(1사무 1-7장) 사무엘이 태어나서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을 때부터 이스라엘의 구원자, 대판관이 되기까지 그의 생애를 들려준다. 택시를 타면 백미러 거치대에 혹은 버스 운전석에 ‘오늘도 무사히’라는 글귀와 함께 무릎 꿇은 아이의 모습이 걸려있곤 하였는데, 바로 그 모습이 사무엘이다. 많은 이가 소녀인 것처럼 착각하기도 한 이 그림은 영국 화가 조슈아 레이놀즈Joshua Reynolds(1723~1792년)의 1776년 작 ‘어린 새뮤얼(The Infant Samuel)’로서 1960년대 서울의 한 경찰서에서 이 그림을 인쇄하여 안전 운행 계몽 차원에서 배포하기도 했던 그림이다.

사무엘기 상권의 1-3장은 사무엘의 탄생과 그의 어머니 한나, 그리고 사무엘을 입양한 사제 엘리와 그 아들들, 그리고 사무엘의 부르심에 관한 내용을 집중적으로 전한다.

사무엘은 기원전 1103~1017년에 살았던 유다의 예언자이자 왕정으로 넘어가기 전 사실상 최후의 판관으로 에프라임 산악 지방에 살던 엘카나와 한나의 아들이다. 엘카나의 두 부인 중 한나는 자손을 둔 다른 부인의 학대로 몹시 울며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성전에서 그저 아들 하나만이라도 얻기를 늘 기도하며, 아이를 얻게 되면 그 아이를 바치겠다고 눈물로 호소했다. 한나가 기도하던 그 성전에 있던 사제가 엘리였다. 한편 사제 엘리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그 아들들은 사제인 아버지의 후광을 업고 성전을 찾은 이들의 예물을 가로채거나 여인들을 겁탈하는 등 불량한 짓을 서슴지 않으며 못된 행패를 부리곤 하였다. 간곡한 기도의 청원으로 마침내 아들 사무엘을 얻은 한나는 서원을 한대로 아들을 성전에 바쳤고, 자신의 신분이나 가문의 몰락을 예감하던 사제 엘리는 사무엘을 입양하여 아들로 삼았으며, 사무엘은 사제 엘리와 함께 성실한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아간다.

한나와 사무엘

아들을 간절히 바라고 얻어 그 아들을 봉헌하던 어머니 한나의 노래(1사무 2,1-10)는 신약성경 루카복음 첫 장에 나오는 성모님의 노래(루카 1,46-56)를 연상하게 한다. 여느 아기의 탄생이 신비스럽고 희망과 사랑의 결실이며 선물과 은총이 아닌 경우가 없겠지만 사무엘도 그렇게 태어난다. 더구나 사무엘은  눈물의 탄식 안에서 얻은 귀하디귀한 아들이다. 자신만의 이기利己를 생각하느라 자녀의 탄생을 두려워하고, 자녀보다는 반려동물이 더 편리하다고 말하며, 세계 최저의 출산율을 부끄러워해야 하는 나라에 살지만, 그래도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자신의 몸 안에서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누어 인류의 생명을 만들어가고 이어가는 위대한 존재들이다. 한나는 여성으로서 이뤄내야 할 자신의 소명을 이루기 위해 마치 술 취한 여자 취급을 받으면서까지(참조. 1사무 1,12-18) 성전에서 하소연하며 정신없이 기도하였다. 기도로 얻지 못할 것이 없다고 믿은 그녀였다. 소명召命의 시작과 생명의 탄생, 열망의 아들과 서원의 아들은 이처럼 지극한 정성의 기도로 얻어진다. 하느님 앞에 매달려 미친 듯이 기도하는 중에 사제 엘리가 한나를 잘 들어주었고, 그로부터 약속과 위로를 들은 한나는 더는 분하고 괴로운 일이 없이 안심하며 “그 길로 가서 음식을 먹고, 그녀의 얼굴이 더 이상 전과 같이 어둡지 않았다.”

현대의 어머니와 부모들은 자칫 ‘아이나 하나 가져볼까?’ 하는 여유로운 치장이나 소유의 개념으로 ‘생명의 소명’을 대신한다. 그렇게 ‘가진’ 아이를 두고도 자신의 이기利己에 지장을 받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소유하려는 장치를 발명하든지, 아니면 한 번도 자신의 삶을 살아본 적이 없어서 무턱대고 자녀에게 올-인하는 무지를 발휘하기도 한다. 자식밖에 믿을 것이 없다 하든, 자식이고 뭐고 다 소용없다 하든 이는 모두 두려움에서 기인한다. 이는 자녀들 처지에서 부모로부터 몸으로 체험했고 보았던 것들에 따라 생명의 소명에 대한 거부로 대물림되고, 그러한 부모의 소명을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하면서 악순환의 고리에 빠지고 만다.

어머니 한나는 그렇게도 소중하고 귀한 생명을 얻었으면서도 그에 집착하지 않고 소유하려 들지 않으면서 아이가 젖을 뗄 때까지 키우다가 아이를 주님의 집으로 데려간다. 그리고 소를 잡아 기도의 성취를 감사하고 “주님께 바친 아이”로 성전에 봉헌하면서 이른바 ‘한나의 노래’로 주님을 찬양한다. 내 몸을 통해 생겨난 생명일지라도 주님의 생명이다. 그렇게 사무엘은 어머니의 아기로부터 주님을 섬기는 엘리 사제의 아기가 되고, 주님 앞에서 자라났으며, 한나는 아들 셋과 딸 둘을 더 얻는 축복을 받는다.

Samuel Dedicated by Hannah at the Temple by Frank W.W. Topham

사무엘과 엘리

눈이 침침하여 잘 볼 수가 없는 엘리 앞에서 소년 사무엘은 하느님의 궤가 있는 주님의 성전을 지킨다. 그때 주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신다. 소년 사무엘은 스승 엘리의 부르심인 줄 알고 “예.”하고 대답하고 엘리에게 달려가 “저를 부르셨지요? 저 여기 있습니다.” 한다. 세 번이나 그렇게 반복하는 중에 사제 엘리는 “주님께서 그 아이를 부르고 계시는 줄 알아차리고”, 사무엘에게 “누군가 다시 너를 부르거든,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여라.”(1사무 3,9) 한다. 소년이 보지 못한 것을 시력을 잃어 앞을 보지 못하는 노인이 본다. 소년은 노인의 체험에 힘입어 부르심의 길에 나아간다. 주님과 만나는 부르심의 길은 주님의 종으로서 고개 숙여 깊이 듣는 자세와 순응의 응답으로 그렇게 시작한다.

곤하게 자고 있는 잠을 반복해서 깨우는 밤중의 소리는 누구에게나 짜증 나는 일이다. 사무엘은 스승의 목소리로 착각했으나 성실했다. 몇 번이고 “저를 부르셨지요? 저 여기 있습니다.” 하고 스승에게로 간다. 제자에게 언제든 돌아갈 스승이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인생에서 여러 형태로 들려오는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기가 어떨 때 어렵고 짜증 나는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무심코 지나치는 사람과 사건들 속에서, 스팸처럼 반복되는 문자와 영상들, 내가 통화하는 사람의 전화기 너머 목소리, 그뿐만 아니라 길에서 스치는 가난한 이들을 통해서도 주님 목소리와 부르심은 섭리를 마련하신다. 영적인 감수성을 계발하고 예민한 ‘식별’의 은총을 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엘리처럼 하느님의 부르심에 귀 기울이고 식별하도록 어린이들과 자녀들, 제자들을 인도해야 한다.

인생의 때, 특별히 어린 시절에 기성세대는 보호자요 부모라는 이름으로 ‘성화와 성덕’으로 부르심을 받고 있는 어린이들에게 그 목소리를 잘 식별하도록 하지 않고 오히려 가로막거나 왜곡하고 만다. 그리스도교의 유구한 영성사는 항상 작고 우연한 순간에 소명과 성화의 부르심이 담겼다는 교훈을 준다. 18세기 예수회원이었던 쟝 드 코사드Jean de Caussade(1675~1751년)는 이를 ‘지금 이 순간의 성사(the sacrament of the present moment)’라는 말로 그때그때 맞닥트리는 순간을 소홀히 하지 않도록 강조하고, 예수님의 작은 꽃 리지외의 성녀 테레사Therese of Lisieux(1873~1897년)는 이를 ‘작은 길(little way)’이라 부른다.

엘리

소년 사무엘이 들은 주님의 말씀은 스승이요 사제인 엘리의 몰락과 엘리 아들들의 못된 행실로 말미암은 심판의 환시였다. 차마 스승에게 전하기조차 두려운 내용이었다. 그러나 지혜로운 스승은 아프더라도 숨김없이 들어야만 했던 말을 사무엘로부터 다 듣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그분은 주님이시니, 당신 보시기에 좋으실 대로 하시겠지.”(1사무 3,18) 한다. “눈이 어두워지고 마음이 슬퍼지는” 허물 많은 자신의 때가 가고, 섭리에 따라 얻은 양아들로 “믿음직한 사제”요 새로운 예언자의 시대가 그렇게 열리리라는 것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스승의 지혜이다. 어머니 한나가 성전에 바친 사무엘이 이제 사제 엘리에게 새로운 유산이 되고 약속이 되며, 또 다른 선善의 길이 그렇게 열린다.

Depiction of Eli and Samuel by John Singleton Copley, 1780

어떨 때 현실을 보면 암담하다. 거대한 이데올로기들이 무너지고 극단적인 자본주의와 개인주의만이 살아남아 결국 종말과 공허함으로 치닫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막연한 두려움으로 우리는 다가올 날을 살고 있다. 먼저 생을 살면서 못된 아들들의 행패 때문에 살아왔던 과거의 흔적들이 아무것도 남지 않고 허무하게 끝나고 말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스승 엘리의 삶이 그러했을 것이다. 자본주의와 개인주의로 얼어 죽지 않기 위해서는 보존해야 하고 살려내야 하며 타오르게 해야 할 불이 있다. 우리는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1930~2004년)가 말하는 ‘서구 문명의 종말(fine della civiltà)’, 쟌니 바티모Gianni Vattimo(1936~2023년)가 말하는 ‘근대의 종말(fine della modernità)’, 그리스도교 이전과 이후로 정의되는 서구 사회, 곧 그리스도교의 종말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는 종말을 예시하는 이러저러한 여러 징후만이 아니라 실제 종말을 살고 있다. 불안하고 위태위태하면서도 예측할 수 없는 미래, 언제 어떤 것이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불확실성과 함께 결국은 파멸이며 공멸일 것이리라는 막연한 암담함을 호흡하면서, 도무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이미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 제멋대로 굴러 앤서니 기든스Anthony Giddens(1938년~)가 말하는 ‘내달리는 세상(mondo in fuga)’에서 살고 있다. 우치타 타츠루Tatsuru Uchida(1950년~)의 비유처럼 고장난 자동차로 질주하면서 그 자동차를 수리한답시고 우왕좌왕하며 살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깊은 고뇌를 불러일으킨다. 전쟁, 비참함, 대량 이주의 압박만 보아도 이는 자명하다. 이 와중에서 우리는 인간을 뿌리부터 비인간적으로 만들고 마는 이기주의 문화의 승리를 무기력하게 그저 지켜보고만 있다.

과연 희망은 존재하는 것일까? 우리가 늘 익숙한 곳에서만 찾고 있어서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희망은 스스로 늘 그랬듯이 우리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찾아야만 한다. 우연과 작은 섭리의 길에서 찾아야만 한다. 사제 엘리가 소년 사무엘이 밤중에 자다가 들었다는 목소리에서 희망을 찾았듯이 그렇게 찾아야만 한다. 사무엘 안에 희망이 있다. 그래서 청춘이요 다가올 세대가 희망이다. 기성세대는 아프더라도 역사가 변하기 마련이며 젊은이들이 역사의 잔해를 짊어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역사를 시작할 숭고한 책임과 품위를 짊어진 이들이라는 점을 젊은이들 앞에 용감하게 고백하면서 그들만이 희망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어야 한다. 소년 사무엘이 더는 스승 엘리의 목소리로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한다. 훌륭한 스승은 자기 집안의 몰락을 순순히 받아들이며 장차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 이루어져야 함을 깨닫는 사람이다. 용감하게 자신의 삶이 실패했음을 고백하고, 소년에게 열망과 소명의 소리를 잘 듣도록 이끌어주는 사람이다.(*이미지들-구글)

2 thoughts on “동행(엘리와 사무엘)

  1. 스승의 참된 모습을 엘리에게서 봅니다.
    희망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찾아온다는
    말씀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깨어서 관찰하며 조화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저를 다듬어야겠습니다

  2. 한나의 아들 사무엘처럼 키웠는가? 20대 장성한 아들을 두고 있는 엄마로서 부끄럽습니다. ‘기도로 얻지 못할 것이 없다고 믿은’ 어머니 한나처럼 희망을 가지고 모든 자녀들이 성실한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아갈수 있도록, 그리고 우리 어른들이 겸손하고 충실한 믿음의 본보기가 되기를 기도 드립니다. 부모로서 가장 소중히 여기고 기도해야 할 중요한 부분을 일깨워 주신 귀한 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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