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혀 설舌’과 비슷한 모양이면서 관련이 많을 법한 ‘말씀 언言’을 두고는 피리처럼 소리가 나는 것을 입에 대고 부는 모습이라 하기도 하고, 입에서 소리나 말이 나가는 모양새를 그린 것이라 하기도 한다. ‘말씀 언言’은 인간의 소통이요 친교이며 일치의 수단이겠지만, 『‘言’으로 구성된 글자에는 일반적인 언어 행위 외에도 말에 대한 고대 중국인들의 인식이 잘 반영되어 있다. 먼저, 말은 믿을 수 없는 거짓, 속임의 수단이었으며, 말을 잘하는 것은 능력이 아닌 간사함이자 교활함에 불과하였다. 그 때문에 말의 귀착점은 언제나 다툼이었다. 이처럼 言에는 부정적인 인식이 두드러진다.(하영삼, 한자어원사전, 도서출판3, 2018년, 533-534쪽)』라는 말이 있고 보면 ‘말씀 언言’은 인간과 세상사의 온갖 아귀다툼이요 아우성이다.
*네이버 한자사전아랍 속담에 “모든 말은 발음 되기 전에 세 개의 문을 통과해야 한다.”라는 말이 있다. 첫째는 “과연 진실한 말인가?”를 물어야 하는 문이고, 둘째의 문은 “과연 필요한 말인가?”를 물어야 하는 문이며, 셋째는 “과연 친절한 말인가?”를 물어야 하는 문이다. 인간의 말은 의사소통이며, 의사소통의 질質에 따라 인간의 삶 역시 그 질이 결정된다. 소통이 더 잘 되면 잘될수록 우리는 더욱 인간적이 된다. 말은 쉬운 것이 아니다. 말은 다른 이의 말 씨앗을 받아 내 품에 품고 오랫동안 꼴을 갖추고 자라게 해서 아픔 속에 출산出産해야 한다. 다른 이의 말씨가 없는 내 말은 없기 때문이다. 말하기는 그래서 오랫동안 배워야 한다.
관계 안에서 생명을 만나면 말하고, 표현하며, 살고자 하는 충동을 느낀다. 그러지 않으면 어떻게든 살아야 해서 혼자만 살고 싶기도 하고 설령 누군가가 있더라도 분노의 미움 속에 그를 마주하며 살아야만 한다. 그런 충동은 겉으로는 아닌 것처럼 보여도 폭력이다. 상대방을 죽이지는 않아도 부정하거나 거부할 수 있고, 형제자매나 가족을 범하는 근친상간의 끔찍함을 낳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거부는 궁극적으로 거짓말이고 위선이며 불신이고 살인이다. 성경은 악마에게서 난 이들을 가리켜 “…처음부터 살인자…거짓말쟁이…거짓의 아비…”(요한 8,44)라고 말한다. 살인은 다른 이가 다른 존재로 남을 수 없도록 하며, 거짓말은 다른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많은 경우 거짓말을 하려는 유혹에 곧잘 빠진다. 우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해야 함”(마태 5,37)에서 멈추지 않는다. 다른 이에게 내가 믿지 않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 상대방을 헷갈리게 하거나 조작하려는 것, 상대방이 듣고 싶은 말만 하려는 것, 내가 생각하는 것을 말할 용기가 없는 모든 것이 거짓말이다. 거짓말은 관계를 악화시킬 뿐이다.
수도자들은 일상에서 거짓말이 수다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안다. 외로움을 달래려고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거나, 자신의 순진한 얼굴이 아닌 가면을 쓰기 위해 하는 말은 비방으로 쉽게 미끄러진다. 이는 비열한 사람들이나 비겁한 사람들에게 있는 특유한 버릇이다. 이런 이들은 다른 사람들의 비판을 공유함으로써 자신이 존경받고자 거짓 동의를 조성하는 자들, 자존감이 약해서 계속해서 누군가를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비난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로 나뉜다. 비방으로부터는 쉽게 중상모략中傷謀略, 과대포장過大包裝, 과장誇張, 확대해석擴大解釋으로 나아간다. 이때는 이미 누군가가 죽고 살인이 발생한다. 거짓은 이렇게 죽음을 낳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