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

하느님께서 ‘말씀’이 되셨다고 성경은 전한다. 하느님께서 수천 년을 두고 예언자들이나 역사적 표징들을 통하여 인간에게 수도 없이 이야기를 하셨는데도 인간이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므로 급기야 스스로 ‘말씀’이 되셔야만 했다는 뜻이기도 하고, 애초에 한 가지 말을 사용하던 인간들이 함께 힘을 합치면 못할 것이 없다 생각할 만큼 교만해졌으므로 인간들의 말을 뒤섞어 놓아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흩어 버리셨는데, 그 하느님께서 다시 한 번 자비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복잡다단한 현대사회 안에서는 소통이 문제다. 사람들은 나 자신과 나 자신 간에, 나와 타인 사이에, 나와 사물이나 생물 간에, 나와 절대자 사이에 만나야만 되고, 그렇게 만나서 대화가 오가야만 한다. 그래야만 산다. 언젠가 무인도에 외톨이로 조난 당한 주인공이 배구 공에 눈, 코, 귀, 입을 그려 놓고 그 배구 공과 끊임없이 대화를 하면서 마지막에 살아남는 영화를 감명 깊게 보았다. 이처럼 인간은 소통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그런 의미로 소통은 나 아닌 사물이나 생명체, 심지어 신神의 영역에까지 나의 체험을 넓혀 내 생명을 확장해가는 과정이요,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경험과 경우의 수數를 늘려 생존 확률을 높여가는 과정이다.

소통은 상호 간에 언어 체계와 비언어 체계를 망라해서 이루는 종합예술과도 같다. 인간이 구사할 수 있는 몇 백 개, 몇 천 개의 어휘로써 원만한 소통이 불가능할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것이기에 비언어 체계는 그 중요성이 날로 더하고 있다. 말마디로 주고받는 것보다 말마디 외의 표정이나 몸짓, 눈짓, 상징으로 주고받는 것이 훨씬 더 많음을 우리는 몸으로 알고 배워간다. 소통이 원만하지 않음은 내가 한 말이 상대방에게 전혀 엉뚱한 말이 되어 도달하는 언어의 불완전성 때문이고, 똑같은 말이라도 나의 상황과 느낌에 따라 말하는 이의 뜻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게 되는 오감五感을 비롯한 인간의 불완전성 때문이며, 주변의 소음과도 같은 환경의 오염 때문이다.

인간들은 소통을 통해 상호간에 생각이나 의견, 혹은 주의·주장을 교환하고, 정보를 전달하며, 느낌이나 감정을 나눈다. 그러나 나의 생각이나 의견, 내가 취했던 정보, 내가 만져보고 느낀 감정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전혀 다른 생각과 의견, 정보와 느낌으로 남을 수 있다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상대방을 인격적인 존재로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전제가 앞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소통이 아닌 불통이 야기된다. 소통이 아니면서도 소통인 것처럼 오가는 것들은 상호 적대감, 압박, 투쟁鬪爭, 항쟁抗爭, 정쟁政爭일 뿐이다. ‘쟁爭’자 돌림의 내용들은 말 그대로 싸움이고 전쟁이다.

싸움에는 결사항전의 결연한 각오와 무기, 방패, 투구가 준비되어야 하고, 그 결과로 욕설과 비판, 협박과 회유, 피비린내 나는 상처와 너저분한 쓰레기, 울분과 통곡, 복수심과 응어리, 미움과 삐침, 한恨을 가슴에 남긴다. 소통을 주장해야만 하는 편은 으레 약자이고 비주류이며 비기득권층에 속하기 때문에 이른바 강자에게, 주류에게, 기득권층에게 자신을 표출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다급함에, 또는 막막함 때문에 ‘쟁’자 돌림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유혹이다. 아니꼽고 더럽고 치사하더라도 인내하며 상대방을 인정하고, 설득의 논리를 치밀하게 개발해야 하며, 지금은 어렵더라도 역사와 시간 속에서 언젠가는 가능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꾸준히 선善의 판례를 만들어가야 한다.

선의 판례란, 긍정만이 부정을 이기며 폭력에는 비폭력만이 치유책이라는 사실을 믿는 믿음이고,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긍정의 씨앗이고 비폭력의 씨앗이라 하더라도 그 씨앗을 심어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백 배, 천 배, 만 배의 열매를 맺고야 만다는 확신이며, 지금의 나는 보지 못할지 모르는 그 열매를 어느 날 나의 후손들이나 후배들이 기어이 누리고 보며 살 것이라는 넉넉함이자 배짱이다.(20090627, 경향신문, *이미지 출처-구글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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