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만찬 성 목요일 ‘가’해(요한 13,1-15)

지거 쿼더(Sieger Köder, 1925-2015년)의 발을 씻어 주시는 예수님, 부분화

성삼일의 시작이다. 사흘 동안 우리는 감히 헤아릴 길 없는 신비, 곧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수난,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거행한다. 예수님께서 겪으신 사건들과 모습들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 기억 속에서 그 사건들을 ‘현재화’하며 그 사건 안에 참여한다. 이것이 파스카 전례의 근간을 이루는 전례적·성사적 역동성이다.

“이스라엘의 온 공동체가 이 파스카 축제를 지내야 한다.”(탈출 12,47) “이스라엘의 온 공동체가 모여 저녁 어스름에 (어린양을) 잡아라.”(탈출 12,6)라는 구약의 기록에 따라 새로운 이스라엘인 교회는 모두 함께 모인다. “한데 모여서 주님의 만찬”(참조. 1코린 11,20)을 먹는다. 우리를 진정으로 주님의 공동체, 주님께 속한 공동체로 만들어주는 신비를 거행한다.

오늘 거행하는 성체성사와 발 씻김 예식(세족례)이라는 두 가지 표징은 두 가지이면서도 결국 단 하나의 사건, 곧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그리고 우리에게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사건, 곧 그분의 죽음에 관련된 사건이다. 우리의 발을 씻어주겠다고 하시는 주님 앞에 우리는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한편 위로가 되는 세족례의 참된 주인공을 알아 모신다.

1. “아버지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셨다.”(요한 13,1)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당신 손에 내주셨다는 것을, 또 당신이 하느님에게서 나왔다가 하느님께 돌아간다는 것을 아시고 (요한 13,3)라고 오늘 전례 복음은 시작한다. 제4복음서는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아버지”를 그 기점으로 삼는다. 아버지가 없이는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 그 어떤 것도 실재성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라는 이 용어는 우리의 ‘기원(起源, origin)’, 즉 모든 것을 내시고 낳으시는 분을 표현할 길이 없는 다른 유추적 단어가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사용하는 어휘이다. 그렇지만 다른 유추적 언어로 이를 표현해보자면 ‘사랑하시는 분’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요한 3,35)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사랑이 솟아나게 하시는 분, 사랑이신 분, 사랑하시는 분이 아버지이시다.

아버지는 사랑의 원천, 그 사랑 안에서 아드님을 낳으신 분, 인간이신 예수님을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오직 하느님만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인간, 인류 스스로는 결코 낳거나 만들어 낼 수 없는 인간이시다. 예수님 안에는 바로 이 사랑이 있으며,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요한 1,18) 한 그대로 사람들 사이에서 이 사랑을 ‘해석’하시고 ‘설명’하시어 ‘알려 주신’(ἐξηγήσατο, exeghésato) 분이다.

하느님의 ‘말씀’(Λόγος, Logos)이 ‘사람이 되신’(σάρξ, sarx) 강생의 신비는 바로 이 사랑을 사람들이 알게 하고 서술하기 위함이다. ‘낳으시는 사랑’(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셨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끝까지 들려주고 증언해야 할 이 사랑을 의식하셨다. 그리고 마침내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 하시며 모든 것을 실현하신 다음 다시 그 사랑이 되신다. 그래서 오늘 전례 복음의 첫 절은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εἰς τέλος, eis télos) 사랑하셨다.”(요한 13,1)이라고 기술한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끝까지”, 죽음에 이르기까지 사랑하셨다.

“하느님은 사랑”(1요한 4,8)이시다. 그리고 그분의 본 모습과 충만함을 “아무도 본 적이 없다.”(요한 1,18) 그러나 아드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이신 하느님을 알려 주셨고, 들려주셨으며, 설명해주셨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이며 그리스도교를 그 뿌리인 구약의 유다교와 ‘다른’ 것으로 만드는 고유성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이 저녁에 예수님의 모습과 말씀 안에서 우리의 하느님이 누구이신지,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읽어낼 수 있다. 사실 이것이 요한복음 전체의 의도이다. 즉 예수님의 삶과 모습을 읽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 모든 것이 아버지의 메아리이자 하느님에 관한 서술임을 알아듣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저녁 우리는 하느님의 발현이요 현현(顯現, Epiphany < ἐπιφάνεια) 앞에 선다. 예수님을 뵈면서 우리는 믿음으로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아버지를 뵈었다고 고백할 것이다. 제자들도 믿음을 가졌더라면 예수님과 마지막 밤을 지내던 그날 그렇게 고백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불확실한 믿음 속에 살아가는 우리처럼 당시의 제자들 역시 이러한 비전을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을 겪었었다.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유다인들, 혹은 그리스도교화 된 유다인들의 수준에 머물러 ‘당신 안에서 하느님을 봅니다.’라고 말하지 못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정확한 몸짓으로 행동하신다.

2. “발을 씻어주시고

(예수님께서는) 식탁에서 일어나시어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들어 허리에 두르셨다. 그리고 대야에 물을 부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고, 허리에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 시작하셨다.”(요한 13,4-5) ‘일어나다, 벗다, (수건을) 들다, 두르다, 붓다, 씻어주다, 닦아주다’라는 7개의 동사는 우연이 아니다. 이 동사들의 표현 안에서 우리는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사람을 위해 행동하시고 일하시는 모습을 목격한다. 더럽고 먼지투성이인 우리의 발 앞에 무릎을 꿇어 발을 씻어주고 닦아 주시는 하느님이시다. 이는 오늘 저녁에 예언적으로 우리가 미리 맛보는 전례이겠지만, 우리가 죽음을 맞아 하느님 앞에 서게 될 때 실제로 일어나게 될 일들이다. 우리가 그토록 찾았고, 살려고 노력했던 그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수고했다’ 하시면서 우리의 발을 씻어주실 하느님이시다. 그렇게 우리의 발을 씻어주신 하느님께서는 띠를 매고 우리를 식탁에 앉게 한 다음 우리 곁으로 와 시중을 들어주실 것이다.(참조. 루카 12,37)

3.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다음, 겉옷을 입으시고 다시 식탁에 앉으셔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깨닫겠느냐? 너희가 나를 스승님(Διδάσκαλος, Didaskalos)’, 주님(Κύριος, Kyrios)하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나는 사실 그러하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12-15)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이요 스승인 나의 행위, 곧 하느님의 행위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아는 육친의 아버지와는 너무도 다른 아버지 하느님이시기에 ‘아버지’라는 단어조차 유추적으로 그분을 정의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결코 자격을 얻어낼 필요가 없는, 근본적으로 무상이요 무한인 사랑 자체이신 분, 오직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다”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하느님의 위대한 계시이다.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발을 씻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우리도 주님의 말씀에 따라 서로의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사랑 자체이신 그 하느님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을 고백하고 믿는 우리 사이의 사랑이 솟아 나와야 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비참함을 다시 한번 발견한다. 우리는 형제나 자매 앞에서 발을 씻어주기는커녕 때로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는 것조차 거부하며 누군가의 앞에 무릎을 꿇는 일은 더더욱 스스로 용납하지 않으며 산다. 오히려 우리는 상대의 발을 쳐다보며 그 발에 낀 더러움을 찾아내고 흉보는 것을 즐긴다. 우리가 과연 서로에게 자비를 베풀 능력이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 때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우리에게는 상대방의 더러운 발을 보면서는 나 자신의 발은 깨끗하다고 믿어버리는 습성도 있다. 예수님을 주님이요 스승으로 고백하는 우리, 그분의 복음을 믿어 살려는 우리가 과연 그분의 ‘제자’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느님’이라는 말은 우리가 자랑스럽게 생각하기에는 어떤 면에서 오해할 소지가 너무나 많고 쉬운 용어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만든 ‘이상적인 스승’이나 ‘표상’으로서 사랑받으실 수도 있겠지만, 예수님의 하느님과 예수님 자신은 오직 복음 안에 있는 분이시며 그분이 곧 우리의 복음이다. 우리의 발은 더럽다. 살아가는 날들이 길어질수록 더 더러워진다. 누군가가 내 발을 씻어주지 않을 것이고 나 역시 누군가의 발을 씻어주지도 않으면서 살아가겠지만,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랑(하느님)으로 건너가는 그 ‘탈출’(Exodus)의 때에 우리의 발을 씻어주고 닦아주시기 위해 기다리고 계실 것이다.

오늘 저녁 우리는 주례 사제가 형제자매들에게 행하는 ‘발 씻김’의 표징 속에서 그리스도의 신비를 살아간다. 이는 우리의 일상적인 삶을 위한 ‘기억’(Memoria)이 되어야 하는 하나의 표징일 뿐이다. 저녁마다 잠자리에 들기 전 ‘내가 오늘 만난 이들의 발을 씻어주고 닦아주었는가?’라는 질문을 해야만 한다. 그렇게 살다 보면, 그렇다고 대답하기에는 도무지 터무니없을지라도 훗날 주님 앞에 설 때 그분께서 친히 우리의 발을 씻어주시고 끝없는 사랑 속으로 우리를 인도해주시리라는 믿음과 희망 속에서 살아가는 날들이 될 것이다. 아멘!(*바탕이 된 글: Enzo Bianchi, Un amore senza fine, 2026년)

*성 목요일에 읽는 우화 한편

길을 가던 착한 신부님이 새 몇 마리가 든 새장을 들고 가던 어린이를 만났다. 신부님께서 어린이에게 물으셨다. “저런, 예쁜 새들이구나. 어디서 났니? 어떤 새들이니?” 어린이가 대답하기를, “들에서 잡은 새들인데, 별로 예쁜 새들은 아니에요.” 신부님과 아이 사이에 물음과 답이 이어졌다. “이제 그 새들을 어떻게 할 작정인데?” “재미있게 놀아야죠. 꼬챙이로 찔러도 보고 날개를 늘어뜨려 벌려도 보고, 가위로 부리나 깃털도 잘라서 제 맘대로 여기저기 붙여 성형도 좀 시켜보고요. 엄청 재미있을 거예요.” “그러다가 싫증이 나면 어떻게 할 것인데?” “그럼, 고양이에게 던져줘야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고양이를 따라 파닥거리는 모습들을 보다 보면 한참은 더 재미있지 않겠어요?”

잠시 침묵이 흐른 다음, 신부님께서 “내가 값을 쳐 줄 테니 내게 팔지 않겠니?” “뭐라고요? 이까짓 새들을 도대체 얼마에 사실 건데요? 많이 줄래요? 3마리니까 3만 원만 주신다면 기꺼이 팔지요.” 그래서 신부님께서는 얼마 안 되는 자신의 용돈으로 그 새들의 값을 치르고, 영악한 아이의 계산속에 어쩔 수 없이 새장값으로 2만 원을 더 주고서야 새들을 모두 살 수가 있었다. 새들이 아이들 손에 다시는 잡히지 않을 만큼의 거리를 부지런히 걸어서 들에 나간 신부님은 가련한 새들을 모두 날려 보내주었다.

어느 날 사탄과 예수님께서 말씀을 나누고 계셨다. 마침 사탄은 의기양양하게 에덴 동산에서 막 돌아오던 참이었다. 사탄이 예수님께 뻐기며 말씀드렸다. “저 좀 보세요. 제가 에덴 동산에 가서 인간이란 것들을 모조리 잡아 오는 길이랍니다. 인간이라는 것들이 어리석기 짝이 없어서 제가 꾸민 계략을 눈치도 못 채며 걸려들고 말았지요.” 예수님께서 사탄에게 물으셨다. “이제 그 인간들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이냐?” “재미있게 좀 놀아야죠. 먼저 결혼했다가 어떻게 이혼하는지를 가르쳐 보아야겠고, 어떻게 미워하는지, 또 악행으로 서로를 어떻게 망가트릴 수 있는지도 가르쳐 보아야겠고요. 참, 어떻게 흥청망청 마시고 취하며 하느님께 욕을 해 댈 수 있는 지도 가르쳐 볼 거예요. 그리고 무기를 만드는 법을 가르쳐서 서로를 어찌하면 더 잔인하게 죽일 수 있는지도 가르쳐야겠어요. 그러다 보면 정말 재미있지 않겠어요?”

“그렇게 실컷 놀고 난 다음에는 무엇을 할 것인데?” 예수님께서 다시 물으시자 사탄은 “그다음에는 거추장스럽고 더는 쓸모없을 터이니 그냥 모조리 죽여서 쓰레기통에나 버리면 되지요, 뭘.” 그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사탄에게 “내게 그 인간들을 팔지 않겠니?” 하고 물으시니, 사탄이 대답했다. “별 값어치도 없는 이런 것들을 사시려고요? 얘들은 아주 나쁜 종자들이에요. 괜히 사셨다가 봉변이나 당하시지 않을까 싶네요. 어쩌면 얘네들이 예수님께 대들고 급기야는 예수님을 잡아 죽이기까지 할지도 몰라요. 그런데도 정 사시겠다면, 대가로 저에게는 뭘, 얼마나 주실 건데요?”

이에 예수님께서 반문하셨다. “뭐가 얼마면 좋겠니?” 사탄은 예수님께서 과연 인간들을 사실까 하며 의구심을 가지고 대답하였다. “좋아요. 정 사시겠다면, 당신이 가지신 모든 눈물과 마지막 한 방울까지의 모든 피, 그리고 당신의 생명을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는 더는 아무 말 없이, 기꺼이 그 값을 치르시며 불쌍한 인간들을 모두 사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요한 15,12-14) 하고 말씀하셨다.(이탈리아어판 ‘살레시오 가족지’ 2011년 4월호에서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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