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조正祖 임금(1752~1800년)과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년)의 첫 만남은 1783년 다산이 21세 때 치른 과거 시험장에서였다. 임금은 진사 시험에 제출한 다산의 답안지를 보고 그를 불러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뛰어났던 다산은 학문의 깊이를 넘어 임금께서 아버지 사도 세자의 묘소를 참배하러 가고자 하였을 때 한강을 건너는 ‘배다리’를 설계하거나 임금의 평생 숙원 사업이었던 수원 화성 축조를 위해서는 거중기擄重機를 설계하는 등에 깊이 관여하기도 하였다. 그는 임금과 백성을 위해서라면 못할 것이 없는 천재였으며, 백성들의 삶을 실제로 바꾸어나가는 학문이어야 한다는 ‘실사구시實事求是’ 사상의 공감대까지 이루면서 임금과 함께 강한 국가, 행복한 백성의 미래를 설계해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1800년(정조 24년) 6월 임금의 갑작스러운 승하로 다산은 39세의 나이로 관직을 버리고 고향 소내(초천苕川,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재마을)로 내려가 집 이름을 ‘여유당與猶堂’이라 짓고, 그 이유를 담은 ‘여유당기與猶堂記’라는 글을 남겼다.
그러나 정조 사후 다산을 시기하던 벽파僻派 세력이 집권하면서, 다산을 비롯한 남인 실학자들을 제거하기 위한 공격이 시작되었고, 다산은 1801년 초부터 정순왕후의 수렴청정과 함께 천주교도를 탄압하는 ‘신유박해’로 여러 차례 국문을 받았다. 이로써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으나, 이후 ‘황사영 백서 사건’이 터지면서 천주교와 더 깊이 연루되었다는 의심을 받아 다시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16세의 어린 나이로 복시(초시 함격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시험)에 장원급제하여 정조 임금의 큰 기대를 모았던 조카사위인 황사영(1775~1801년) 때문에 다산은 다시 1801년(순조 1년) 11월에 강진으로 유배를 떠나야만 했으며, 1818년(순조 18년) 9월 14일까지 18년여를 유배지에서 살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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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당기與猶堂記
하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어쩔 수 없어서 스스로 하게 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그만둘 수 없는 일이다. 하고 싶어 하면서도, 남이 알지 않기를 바라며 스스로 하지 않게 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그만둘 수 있는 일이다. 그만둘 수 없는 일은 늘 행하게 되지만, 이미 스스로 원하지 않는 바가 있으므로 때로는 멈추게 된다. 하고 싶은 일은 늘 행하게 되지만, 이미 은밀히 하기를 바라므로 이 또한 때로는 멈추게 된다. 이와 같이 분별할 수 있다면, 천하에 어찌 일이 있겠는가.
나의 병을 나는 스스로 안다. 용감하되 모략謀略이 없고, 선을 즐기되 가릴 줄을 모르며, 감정에 맡겨 곧장 행하고, 의심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일을 그만둘 수 있음에도 마음속에 기쁨의 움직임이 있으면 그만두지 못하고, 욕망할 만한 것은 없으나 마음에 걸리고 막히어 시원하지 않으면 반드시 그만두지 못한다.
이 때문에 어릴 적에는 한계를 벗어난 일에 내달리면서도 의심하지 않았고, 장성해서는 과거 시험에 빠져들면서도 돌아보지 않았으며, 뜻을 세운 뒤에는 지난날의 후회를 깊이 늘어놓으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선을 즐김에 싫증이 없었으나, 도리어 비방을 혼자 많이 짊어지게 되었다. 아, 이것 또한 운명인가? 성품이 그러한데, 어찌 감히 운명을 말하겠는가.
노자의 말씀에 “여혜與兮, 약동섭천若冬涉川, 유혜猶兮, 약외사린若畏四隣.(조심함은 마치 겨울에 강을 건너는 것 같고, 삼감은 마치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하는 것과 같다. – 도덕경 제15장)”이라고 하였다. 아, 이 두 마디 말이야말로 나의 병을 고치는 약이 아니겠는가. 겨울에 강을 건넌다는 것은, 차가운 기운이 뼛속까지 사무치니, 정말로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는 것이고,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살핌과 경계가 몸 가까이 다가오니, 비록 매우 어쩔 수 없는 경우라 하더라도 하지 않는 것이다.
경례經禮(‘經-변하지 않는 진리’와 ‘禮-그 진리를 삶에서 실현하는 규범’)의 같고 다름을 사람들과 글로 논하고자 하다가도, 곧 생각해보니 하지 않아도 해가 없다. 하지 않아도 해가 없는 것은 부득이한 일이 아니니, 부득이하지 않다면 우선 그만두어야 한다. 상소문을 논하여 조정 신하들의 시비를 말하고자 하다가도, 곧 생각해보니 이는 남이 알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남이 알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은 마음속에 큰 두려움이 있다는 뜻이니, 마음에 큰 두려움이 있다면 우선 그만두어야 한다. 진귀한 물건과 옛 기물을 널리 모으고자 하는 일도 그만두어야 하며, 벼슬에 있으면서 공적인 재물을 농단하여 남는 이익을 훔치고자 하는 일은 더욱 그만두어야 한다.
무릇 마음에서 일어나 뜻에서 싹트는 모든 행위는, 아주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우선 그만두어야 하고, 비록 매우 부득이한 경우라 하더라도 남이 알지 않기를 바란다면 또한 그만두어야 한다. 이와 같이 분별한다면, 천하에 어찌 일이 있겠는가.
내가 이 뜻을 얻은 지 이미 육칠 년이 되었고, 이로써 내 당호를 삼고자 하였으나, 생각만 하고는 곧 그만두었다. 그러다가 초천(苕川)으로 돌아온 뒤에야 비로소 글로 써서 문미(門楣)에 붙이고, 아울러 그 이름을 붙이게 된 까닭을 기록하여 자식들에게 보인다.(『여유당전서』 제1집 시문집 제1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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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猶堂全書, 第一集 詩文集 第十三卷
欲己不爲, 不得已而令己爲之者, 此事之不可已者也; 欲己爲之, 欲人勿知而令己不爲者, 此事之可已者也. 事之不可已者常爲之, 然旣己不欲, 故有時乎已之; 事之欲爲者常爲之, 然旣欲人勿知, 故亦有時乎已之. 審如是也, 天下都無事矣.
余病余自知之. 勇而無謀, 樂善而不知擇, 任情直行, 弗疑弗懼. 事可以已, 而苟於心有欣動也則不已之, 無可欲, 而苟於心有礙滯不快也則必不得已之.
是故方幼眇時, 嘗馳騖方外而不疑也, 旣壯陷於科擧而不顧也, 旣立深陳旣往之悔而不懼也. 是故樂善無厭而負謗獨多. 嗟呼! 其亦命也, 有性焉, 余又何敢言命哉?
余觀老子之言曰: “與兮若冬涉川, 猶兮若畏四鄰.” 嗟乎! 之二語, 非所以藥吾病乎. 夫冬涉川者, 寒螫切骨, 非甚不得已, 弗爲也; 畏四鄰者, 候察逼身, 雖甚不得已, 弗爲也.
欲以書與人論經禮之異同乎, 旣而思之 雖不爲無傷也. 雖不爲無傷者, 非不得已也, 非不得已者, 且已之. 欲議人封章言朝臣之是非乎, 旣而思之 是欲人不知也. 是欲人不知者, 是有大畏於心也, 有大畏於心者, 且已之. 欲廣聚珍賞古器乎, 且已, 欲居官變弄公貨而竊其羨乎, 且已之 凡有作於心萌於志者, 非甚不得已, 且已之, 雖甚不得已, 欲人勿知, 且已之. 審如是也, 天下其有事哉,
余之得斯義且六七年, 欲以顏其堂, 旣而思之, 且已之. 及歸苕川, 始爲書貼于楣, 竝記其所以名, 以示兒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