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의 고통 – 마티아스 그뤼네발트(Matthias Grünewald, 1475~1528년)의 이젠하임Issenheim 제단화祭壇畵를 중심으로 보는 인간의 고통
*이 그림은 독일 국경 근처 프랑스 동부 알자스 주의 작은 마을인 이젠하임의 성 안토니오 수도원 제단화로 그려졌으며, 니콜라우스 폰 하게나우(Niklaus von Hagenau, 1445~1538년)가 조각한 고딕식 목각 제단에 끼워져 있다. 가동식(可動式)의 여러 날개가 붙은 제단화로서 2중 여닫이로 되어 있으며, 닫혔을 때의 크기는 너비 3m이다. 중앙에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좌우에 성 안토니우스와 성 세바스티아누스가 그려져 있다. 제단화 날개를 닫았을 때, 하나를 열었을 때, 두 개를 열었을 때의 세 장면으로 볼 수 있는 그림이다. 모두 열린 상태에서는 중앙이 성 모자와 천사, 좌우에 수난과 부활, 그리고 날개 부분을 열면 성 안토니우스의 유혹 등이 모두 9개 장면으로 그려져 있다. 1511~1515년 작품으로 현재는 프랑스 알자스 주 콜마르에 있는 울테르린덴 미술관Musée d’Unterlinden에 소장되어 있다.
「플라톤이 강조했듯이 진정한 아름다움의 본질적 기능은 사람에게 건강한 ‘충격’을 주고, 사람이 체념이나 일상의 평범함에 주저앉지 않도록 자기 자신으로부터 끌어내는 것이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고통스럽게 하고 꿰찔리는 아픔을 느끼게 하면서도, 다시 ‘일깨우고’, 자기 마음과 정신을 다시 보도록 하며, 날개를 달아주어 날아오르게(飛上) 한다.(교황 베네딕토 16세, 2009년 11월 21일 예술가들과의 만남에서)」
교황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을 때 어쩌면 그뤼네발트의 소위 ‘이젠하임 제단화’를 염두에 두셨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미술사에서 그뤼네발트의 그림만큼이나 충격과 동시에 진정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그림이 또 있을까 싶기 때문이다. 그뤼네발트의 제단화는 세기를 거듭하면서도 우리를 다시 일깨우는 강렬한 힘을 잃지 않으며, 우리에게 고통과 구원에 대해 깊은 의미를 거듭 전달한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이 그림에서 중앙의 십자가 처형 장면을 두고,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십자가 처형을 두고 이렇게 감동적인 그림이 또 있을까 싶다”라고 묘사한다.
실제 이름이 마티아스 고타르트 니타르트Mathis Gothart Nithart였던 마티아스 그뤼네발트Matthias Grünewald는 그리 잘 알려진 화가가 아니다. 독일인이었으며 대략 1470~1528년 사이에 살았다. 제작연도가 확실하게 알려진 첫 작품은 ‘조롱받는 그리스도The Mocking of Christ(1503년)’이다. 이 그림은 30대 한참 나이에 접어든 젊은 화가가 거장이 되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독일 미술사학자인 요아힘 폰 산다르트Joachim von Sandrart에 따르면, 그뤼네발트는 우울한 성격을 지녔으며 잠시나마 알브레흐트 뒤러Albrecht Dürer의 도제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1510년에 프랑크푸르트에 살았으며 18세 소녀인 안나와 혼인하였다. 안나는 나중에 악령에 씌었다는 이유로 시설에 감금되었다. 1511년에 그뤼네발트는 마르틴 루터의 초창기 반대자였던 마인츠의 대주교 알브레흐트 폰 브란덴부르크의 궁정 화가가 되었다. 그뤼네발트는 1517년 작품인 ‘성 에라스무스와 성 모리스의 만남’에서 브란덴부르크를 묘사한다. 그의 작품으로는 불행스럽게도 10점의 그림과 35점의 소묘만이 남았다. 그의 작품 상당수는 전리품이 되어 스웨덴으로 향하던 중 발트해에서 유실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작품들은 르네상스 고전주의를 넘어 영적이고 신비주의적인 강렬함을 중시하는 유럽 중부 후기 중세의 화풍을 계승하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젠하임 제단화는 프랑스 콜마르 인근의 이젠하임에 있는 안토니오 수도원을 위해 제작 의뢰된 작품이다. 당시 이 수도원에 살고 있던 ‘성 안토니오 병원 형제회’는 발루아르의 가스통이라는 분에 의해 설립된 수도회인데, 이 수도회는 1095년 가스통의 아들이 소위 ‘성 안토니오의 불’이라고 알려지는 독에 감염되었을 때 기적적인 치유를 얻음에 따라 교황 우르바노 2세께서 승인하신 수도회이다. 안토니오회 수도자들은 전염병, 특별히 ‘안토니오의 불’이나 ‘맥각(麥角) 중독’이라고 알려지는 환자들을 보살피는 임무에 종사하는 것으로 유명했었다. 이젠하임의 제단화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안토니오회 수도자들, 맥각 중독, 그리고 스웨덴의 성녀 브리짓의 신비로운 환시가 어우러져 영감을 얻게 된 작품이다.
이 그림은 폭력적이면서도 강렬한, 그리고 심오한 아름다움으로 보는 이에게 충격과 놀라움을 안겨주는 매우 감동적인 작품이다.
성녀 브리짓(St. Bridget, 1303~1373년)은 이미 열 살 때부터 환시를 보기 시작했으며, 이를 ‘천상의 계시(revelationes coelestes)’로 여겼다고 알려진다. 이러한 천상의 계시들은 중세 미술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금발의 아기 예수님 탄생에 대한 그녀의 묘사는 16세기와 17세기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성녀가 묘사한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 처형에 관한 환상 또한 마찬가지였다. 강렬하고도 생생한 성녀의 묘사는 그뤼네발트가 이젠하임의 십자가 처형 장면을 그리기로 생각하였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린 내용이었을 것이다. 성녀의 환시 중에서 한 대목은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저는 칼바리 산에서 몹시 울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저의 주님께서 벌거벗기시어 채찍질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려고 끌려 나오시는 것을 보았습니다.…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온유한 양처럼 기꺼이 계단을 오르신 주님께서는 강제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팔을 뻗으시고 오른손을 펼쳐 십자가 위에 놓으셨습니다. 잔인한 형리들이 가장 단단한 뼈 부분에 무참하게 못을 때려 박았습니다. 그리고 밧줄로 왼손을 난폭하게 잡아끌어 같은 식으로 십자가에 고정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의 몸을 똑바로 펼치고 합쳐진 발에 두 개의 못을 박았습니다. 영광스러운 그분의 팔다리를 거칠게 뻗치도록 하면서는 그분의 모든 신경과 혈관이 으스러지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느라고 잠시 벗겨놓았던 가시관을 지극히 거룩하신 분의 머리에 다시 단단히 씌웠습니다. 가시관이 존엄하신 그분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주님의 눈은 흘러내리는 피로 가득했습니다. 주님의 귀도 닫혔고, 얼굴과 수염도 검붉은 피로 뒤덮였습니다.」
그뤼네발트는 1512년에 이젠하임 제단화 작업을 시작했다. 이 작품은 두 쌍의 날개 부분과 함께 세 가지 구도를 형성한다. 처음에 보는 장면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과 동굴 안장, 두 번째 장면은 성모 영보, 강생, 그리고 부활이며, 세 번째 장면은 제자들과 함께 옥좌에 앉으신 예수님과 사막에서 유혹을 받는 성 안토니오를 각각 보여준다. 그림은 라임 나무 패널에 유성 물감과 템페라로 제작되었으며, 금박과 다색 장식이 더해져 조명 효과를 낸다.
첫 번째 장면에서 십자가 처형 배경은 짙은 녹색과 갈색이다. 황량한 풍경 속 낮은 산들이 검게 물든 하늘로 에워싸여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은 단연코 직설적이면서도 정중앙이면서 강렬하다. 그뤼네발트에게 그리스도는 고통받는 육신의 그리스도이다. 그분의 손은 일그러져있고, 팔은 고통스럽게 늘어져 있으며, 발은 쇠못으로 접혀 있다. 몸은 누렇게 변색되어 상처투성이이며, 가시로 범벅이 된 머리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고, 얼굴은 처져있고 창백하며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십자가의 가로축마저 그리스도의 고통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듯 휘어진다. 작품은 폭력성, 강렬함, 묘한 아름다움이 어우러지면서 보는 이에게 충격과 놀라움을 선물한다. 이렇게 공포와 아름다움을 함께 놓는 장면은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의 저서 <숭고함과 美 관념의 기원에 관한 철학적 탐구(A Philosophical Enquiry into the Origin of Our Ideas of the Sublime and Beautiful, 1756년)>를 미리 예견하는 듯하다:
「자연 속에서 웅대하고 숭고한 것을 목격하며 뛰는 가슴은, 실로 표현이 안 되는 경악이요 경이로움이다. 경이驚異란 영혼의 모든 움직임이 일시에 멈추고, 거기에 어느 정도의 공포가 섞여 있는 상태이다. 이 경우 마음은 그 대상에 완전히 사로잡혀 다른 어떤 것도 받아들일 수 없으며,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그 대상에 대해서조차 이성적으로 사유할 수 없다. 여기서 숭고함이 지니는 위대한 힘이 생겨난다. 즉, 그것은 우리의 사유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사유에 앞서서 우리를 붙잡아 거역할 수 없는 힘으로 우리를 몰아간다.」
기괴한 이 그림의 사실주의는 수도원에 들어오는 맥각 중독 환자들에게 위로의 샘이 되도록 의도되었다. 그들은 그뤼네발트가 그린 고통의 모습에서 자신들의 아픔과 고통을 볼 수 있었다. 한스 J. 힐러브란트는 그의 저서 <그리스도론, 시각 예술 속의 예수(Christology, Jesus in The Visual Arts)>에서 이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그뤼네발트는 십자가형으로 만신창이가 된 예수의 몸을 묘사하면서도, 그 끔찍한 고통 속에 담긴 그리스도교의 핵심 메시지를 예리하게 불러일으킨다. 원래 병원을 위해 제작된 이 제단화는 병자들에게 위로와 평화를 주기 위해 고안되었을 가능성이 분명하다.」
십자가형의 장면에서 그뤼네발트는 성모 마리아,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 마리아 막달레나와 함께 시간상으로 맞지 않는 세례자 요한과 어린양을 등장시킨다.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 왕의 명령으로 이미 기원후 29년에 참수되었을 것이므로 예수님의 십자가형을 직접적으로 목격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림에 등장한 세례자 요한은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느 작아져야 한다.(라틴어. Illum oportet crescere me autem minui.)”(요한 3,30)라고 외치는 예언자이며, 그의 곁에 있는 어린양은 그가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라고 외치며 그가 가리켰던 그리스도이시다.
그뤼네발트의 십자가형은 구원하는 고통의 힘을 강조하는 가톨릭적 묵상을 깊게 반영한다. 파스카 신비(그리스도의 수난, 죽음, 부활, 승천)는 가톨릭교회 교리서 613항이 전하는 가톨릭의 핵심 교리이자 진리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을 통해서 인류의 결정적인 속량을 완성하는 파스카의 희생 제사이며, 동시에 인간을 하느님과 화해시키고 일치시키는 새로운 계약의 희생 제사이다. 신약의 이 제사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신 성자의 피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젠하임의 십자가형은 파스카 희생 제사를 반영하며, 그리스도, 성모 마리아, 그리고 그분의 제자들 역시 이 세상에서 우리가 모두 겪는 어둠, 아픔, 폭력, 고통, 슬픔을 견뎌냈음을 말해준다. 이 그림은 우리의 고통을 그리스도의 고통과 하나가 되도록 하라고 우리를 초대한다. 우리의 마음을 그리스도께로 더욱 가까이 이끌면서 우리의 고통을 그분의 십자가 고통과 결합할 때 우리는 이 세상의 고통과 악을 견디며 이를 뛰어넘을 수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구원에 이르는 고통(Salvifici Doloris)>은 「…고통 속에는 인간을 내적으로 그리스도께로 가까이 이끌어가는 특별한 힘이, 특별한 은총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이 은총 덕분에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나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과 같은 여러 성인들이 깊은 회심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회심의 결과는 비단 개인이 고통의 구원적 의미를 발견하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가 완전히 새로운 인간이 된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는 이를테면 자기 온 삶과 소명의 새로운 차원을 발견하게 됩니다.…(제26항)」라고 말한다.
고통에 관한 이러한 해석에 따르자면, 고통은 벌罰이 아니라 그리스도께로 가까이 이끄는 특별한 힘이요 은총이다. 그래서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는 “만일 하느님께서 당신이 많은 고통을 겪게 하신다면, 이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위해 원대한 계획을 세우셨다는 것이며, 하느님께서 당신이 성인이 되도록 하실 것이 분명합니다.”라고 말한다.
교회의 가르침과 역사가 가르쳐주는 바에 따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자기의 아픔을 받아들이는 고통은 영혼을 정화하고 단련하며 그리스도, 그리고 하느님과 더욱 깊은 관계를 맺도록 한다. 이젠하임의 십자가 수난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그분의 수난뿐 아니라, 온 인류의 고통과도 더욱 깊이 우리를 일치하게 하고 깊은 관계를 맺도록 우리를 이끈다. 그뤼네발트의 십자가 수난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고통뿐 아니라, 온 세상 곳곳에서 고통받고 있는 수많은 형제자매의 고통을 보게 된다. 이젠하임의 십자가 수난은 우리의 마음에 다가와 우리의 관심뿐만 아니라 연민과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하느님의 사랑과 우리 자신이 지닌 사랑의 능력을 바라보게 하는 특별한 창이 된다.
1528년 그뤼네발트의 사망 후 그는 한때 잊혀졌고, 그의 많은 작품은 알브레흐트 뒤러Albrecht Dürer의 작품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는 19세기 낭만주의 절정기에 이르러 요리스-칼 휘스만스, 베르메르, 마르셀 프루스트 같은 모더니스트들에게 재발견되면서 다시 이름을 찾게 된다. 그뤼네발트의 작품에서 보이는 고딕적이고 노골적인 과장의 요소들은 독일 표현주의, 특별히 오토 딕스Otto Dix나 에른스트 루드빅 키르크너Ernst Ludwig Kirchner의 작품들을 예고한다. 작곡가 폴 힌데르미쓰Paul Hindemith는 1938년의 오페라 마티스 데르 말러Mathis der Maler를 그뤼네발트의 삶을 바탕으로 만들면서 이젠하임 제단화의 장면들을 재연하고자 했었다. 아마도 멜 깁슨의 2004년 작품인 ‘그리스도의 수난’ 역시 그뤼네발트의 영향이었을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멜 깁슨의 작품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이 대단히 세밀하게 묘사되면서 이는 관객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현대인들이 그리스도의 수난과 희생을 다시 한번 생각하도록 만드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뤼네발트의 유산은 여전히 그리스도교 세계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2000년의 저술인 <전례의 정신(The Spirit of the Liturgy)>을 통해 그뤼네발트와 이젠하임의 제단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뤼네발트의 제단화는 예수님의 수난에 관한 사실성을 극단적으로 끌어 올리면서도 결국 위로의 이미지로 남는다. 안토니오 수도원의 형제들이 보살피고 있던 역병 환자들은 이 그림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고통받는 그들의 운명 안에서 그들과 똑같이 되시고, 그들의 고통 속에 내려오셨으며, 자기들이 겪는 고통이 하느님의 고통 속에 숨겨져 있음을 깨달았다.」
이젠하임 제단화는 예술을 초월하는 고통의 상징으로서 그리스도의 구원 능력과 희생을 선포하며, 우리 모두에게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이사 53,5)라는 위로의 메시지를 전달해준다.
※더 읽기: 세례자 요한의 손가락 https://benjikim.com/?p=8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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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글, 글쓴이 매튜 말로네Matthew Malone는 현재 호주 멜버른에서 살며 싱어송라이터이자 라디오 쇼 진행자이고 프리랜서 기자이기도 하다. 영어 원문은 다음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www.wordonfire.org/articles/the-suffering-of-all-mankind-in-grunewalds-altarpie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