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러울 오汚

*한겨레21(일러스트레이션-부분, 김대중)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다. 탁한 구정물처럼 누군가, 무엇인가가 그를 휘저어 놓아 타인이 그에게서 자기 얼굴을 볼 수 없게 된 사람이었다. 누군가에게서 자기 얼굴을 볼 수 없을 때 사람들은 불안해한다. 그는 공관복음이 모두 전하는 <마귀들과 돼지 떼(마르 5,1-20 마태 8,28-34 루카 8,26-39)>라는 소제목의 일화 속에 등장한다. 맨 먼저 쓰였다고 알려지는 마르코 복음은 그와 예수님과의 만남을 매우 구체적이면서도 자세하게 전한다.

예수님께서 어느 날 그와 마주치신다. 그에게는 언제인지 모르게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더러운 영(오귀污鬼)”이 달라붙어 있었다. “더러움”은 혼자일 수 없어 기생寄生으로 자기를 드러내기 때문이었다. 더러운 영에 붙들린 그가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 “큰 소리로”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마십시오.”라며 대들 듯이 말한다. 그의 말이 아니라 사실은 더러운 영의 말이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시대에도 그랬거니와 오늘날까지도 영혼의 고통과 질병, 마음과 정신에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으로 분류하여 이러한 현상을 이해하려 든다. 예나 지금이나 정상이 아닌 ‘이상한 사람’이라는 이런 이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늘 우리 곁에 일정 비율로 있게 마련이다. 그런 이들은 다수의 묵시적인 동의 아래, 살았어도 죽은 사람이어서 무덤에서 살아가는 존재가 되고 만다.

그는 시간의 리듬을 잊어 밤인지 낮인지 모르고 살며,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는 사람이다. 너무나도 답답하여 때로는 자신의 몸까지도 스스로 상하게 하며, 말을 잃어 괴성으로 소동을 부린다. 내면의 유령들이 그를 죽음으로 내모는 듯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행동한다. 누구에게나 더러움과 깨끗함의 반반이 있게 마련이면서도 자기의 더러운 반쪽은 눈감아 제쳐두는 인간의 위선적인 습성에 따라 더러움과 깨끗함의 구분은 늘 다수나 주류에 빌붙은 자들의 개념이요 논리이다. 소위 정상이라고 자기를 분류하는 이들은 비정상으로 분류해놓은 그런 사람들이 겪는 고통의 원인을 찾아주려 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위험한 사람’이라는 이름을 붙여 통제하고 격리하며 관리하기 위하여 쇠사슬이나 족쇄마저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이내 “아무도 그를 휘어잡을 수 없게 되면서” 묶으려는 이들이 오히려 어떤 형태로든 묶이게 된다는 것이 인류의 역사가 주는 교훈이다.

폭력의 메커니즘은 이처럼 누군가를 붙잡아 맴으로써 그의 문제가 그의 문제일 뿐 나와는 상관없는 문제라고 여기려 든다. 어려움을 겪는 이들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보려 하거나 나의 시선을 바꾸어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를 고민하지 않고, 돕기를 거부한다. 모진 사람들은 그저 자기 삶에 위협이나 귀찮음이 찾아들지 않기만을 바란다. 그럴 때 가장 손쉬운 방법은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라는 이름을 붙여 그가 우리와는 다른 사람이라면서 시야에서 치워버리는 것이다. 사람들은 누군가가 이 세상과 나에게 온몸으로 절규하는 바를 회피하려 든다. 그러나 폭력은 더 큰 폭력과 두려움으로 되돌아오게 마련이다.

복음은 “무덤에서 살아온 그에게”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라고 이미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래서 “멀리서 예수님께 뛰어왔다”라고 기록한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이 소리를 지르고 난동을 부리며 다른 이들의 통제를 벗어나 쇠사슬과 족쇄를 끊고 당신께 달려오기도 전에 이미 그에게 말씀하고 계셨다. 거친 말, 겁마저 들게 하는 불결한 외모, 예측할 수 없는 태도를 지닌 그의 내면에 숨은 고통을 예수님께서는 이미 듣고 계셨으며 명령으로 그를 부르셨다. 그렇게 다가온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신다. 그의 고통을 들으시며 그와 관계를 맺고자 하신다. 예수님께서 몸소 그를 불러 초대하시며 그에게서 듣고자 하신다.

진심 어린 듣기는 자기의 앎을 버리는 것이다. 누군가를 듣기 위해서 그동안 그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것들을 버리는 것이다. 진정 몰라서 궁금해하고 찾는 것이다. 그동안의 앎을 바탕으로 이어가는 계획적인 연구가 아니다. 내 안에 이미 내재한 편견이나 선입견, 고정 관념을 재확인하려는 것이 아니고, 누군가에 대한 영향력이나 권력을 행사하려는 것도 아니다. 설령 그를 향한 선한 의도라 하더라도 그것마저 배제하고, 있는 그대로의 그를 듣는 것이다. 잘 듣기 위해서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들음은 마음으로 여미는 사랑이다.

무덤에서 살아온 그 사람 안에 있었던 악령더러 “나가라!” 하고 이미 말씀하셨던 예수님께서 이제는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신다. 명령이 물음으로 바뀐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자신의 고통을 털어놓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시고, 사람들이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라 붙여놓은 라벨을 개의치 않으신다. 그가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께, 곧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진 자가 되도록 하신다.

그래서 그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사람, 듣고 싶은 것을 찾는 사람, 타인의 말을 듣는 사람이 된다. 세상으로부터 받은 폭력에 다쳐 맹렬한 공격성으로 발광을 할 수밖에 없던 그가 자기 이름을 묻는 친절하고 온유한 분을 만나 자신이 누군가에게서 진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자기에게도 듣고자 하는 분이 계신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말과 침묵의 교차 속에서 그가 자신의 인간성을 되찾는다. 소리 지르는 것을 멈추고, 자기의 이름부터 시작해서 다소곳이 대답하며, 예수님께 “간곡히 청한다.”(마르 6,10) 그렇게 무덤에 살고 있던 이가 살아있는 이들의 세상으로 돌아온다. 해방의 시작이다.

시작이라기보다 집 나간 자식의 옷을 하염없는 눈물로 깨끗이 빨아 풀 먹여 가지런히 정리해놓고 이제나저제나 하며 기다리던, 결코 포기를 모르는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그렇게 열린다. 사람은 자기 스스로 깨끗하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치명적인 오류汚流(*참조. 誤謬)와 이단 속에 사는 존재이지만, 그는 예수님을 만난 행운을 입어 더러운 영을 그렇게 떨쳐버릴 수가 있었다. “깨끗한 사람”이 되어 “하느님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참조. 마태 5,8) “하느님, 저를 깨끗하게 만들어주시고 굳건한 영을 제 안에 새롭게 하소서.”(참조. 시편 51,12) 하며 늘 기도해야 한다. 그의 이야기가 하느님 앞에 선 나의 더러운 모습, 더러운 영이 들린 나의 모습임을 보라는 신호이며 메시지임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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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마르 5,2) – 「희랍어: ἄνθρωπος ἐν πνεύματι ἀκαθάρτῳ(anthrōpos en pneumati akathartō) / 영어: a man who had an unclean spirit / 이탈리아어: un uomo posseduto da uno spirito immon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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