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날 일정 부분 우리 교회에 유다 이스카리옷의 이미지를 복원해보려는 시도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참회나 회개와는 별개로 하느님의 자비를 선포하려는 시도를 반영한다. 최근 2021년 4월 1일자 교황청 기관지(L’Osservatore Romano) 1면에, 그것도 성주간을 여는 시점에 ‘우리의 형제 유다(Nostro fratello Giuda)라는 제목으로 프리모 마쫄라리 신부의 강론이 실리게 된 것도 이러한 시도 중 하나일 것이며(참조. 유다를 어깨에 지신 예수님 https://benjikim.com/?p=1461)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같은 견해를 가지고 계시는가 싶지만, 이에 관해서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로세르바토르 로마노라는 신문의 위상이나 구독 범위를 고려할 때 현대의 일반적인 오류, 곧 적절한 회개와 참회라는 전제가 없이 하느님의 자비를 선포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이는 자칫 하느님께서는 누군가가 은총을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저 자비를 베푸신다는 전제에 대한 논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유다에 관해 우리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현대의 여러 독자에게 유다가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인 것은 사실이다. 이는 우리의 다소 결함이 있는 도덕적 추론, 즉 행위 자체의 객관적 도덕성은 간과하면서 주관적인 문제(의도나 감정) 등을 과장해서 강조하려는 추론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의 동조 의식에는 우리도 그와 같은 부류 중 하나이고 따라서 우리도 동정을 받을 만하다는 의식이 깔려있다) 어떤 행위에 대한 객관적인 도덕성 여부와 주관적인 문제 두 가지 모두가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현대는 개인적인 책임을 회피하면서 죄의 객관적인 해악을 간과하는 왜곡된 경향을 나을 수 있다.
엄밀하게 말해서 성경 본문 자체도 자신이 한 일을 깊이 후회하면서 자기가 받은 돈을 돌려주기까지 하는 유다에 관하여 이를 읽는 독자에게 어느 정도 동정심을 유발하는 것이 사실이다. 성경은 이 장면을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는 그분께서 사형 선고를 받으신 것을 보고 뉘우치고서는, 그 은돈 서른 닢을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에게 돌려주면서 말하였다. ‘죄 없는 분을 팔아넘겨 죽게 만들었으니 나는 죄를 지었소.’ 그러나 그들은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 그것은 네 일이다.’ 하였다. 유다는 그 은돈을 성전 안에다 내던지고 물러가서 목을 매달아 죽었다.”(마태 27,3-5)라고 기록한다.
유다가 자신의 죄에 대해 슬퍼한 것은 분명하며, 이는 분명 우리가 회개와 통회라고 부르는 내용이다. 그는 자신의 죄를 의식하고 받았던 돈을 돌려주면서 자신의 죄로 그 어떤 이득도 취할 의사가 없음을 표현하기까지 한다. 그렇지만 모든 뉘우침이 하느님을 향한 것은 아니다. 때때로 우리가 회개(통회)라고 부르는 내용은 “내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 라든가, “내가 이런 짓을 저질렀으니 나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는 식의 두려움이나 교만의 일종일 때가 많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목을 매달아 죽었다는 사실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그의 행위는 슬픔의 표현이면서 동시에 객관적으로 절망의 행동으로 남는다. 유다는 주님께로 돌아가는 대신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섰고, 주님 앞에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겸손하게 주님과 주님의 몸인 교회의 용서와 자비를 구하는 대신 자신의 죄책감이라는 고통을 자신이 스스로 마감 짓고자 했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유다는 베드로와 상당히 다르다. 베드로는 처음에 주님을 배반하고 슬픔을 못 이겨 도망쳤지만, 유다처럼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선 것이 아니다. 오히려 베드로는 자신의 배신과 비겁함을 무릅쓰고 초대 교회 공동체 안에 머물러 뿌리를 박으면서 호숫가에서 주님을 만나 진솔하게 대화하고 마침내 치유를 얻는다.(참조. 요한 21장) 이 모든 일이 베드로에게 그리 쉽지 않았을 것은 분명하다. 분명히 그는 주님과 사람들에게서 자신의 죄책감과 수치심을 숨기면서 도망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다와는 달리 베드로는 교회 공동체 안에 머물면서 주님께서 자기를 찾아주시기만을 바랐다.
유다와 베드로의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 죄에 대한 두 가지 종류의 슬픔을 역설하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읽을 필요가 있다: “내가 그 편지로 여러분을 슬프게 하였더라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사실 그 편지가 잠시나마 여러분을 슬프게 하였음을 압니다. 그러나 내가 한때 후회하였을지라도 이제는 기뻐합니다. 여러분이 슬퍼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슬퍼하여 마침내 회개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뜻에 맞게 슬퍼한 것이니, 우리 때문에 손해를 본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맞는 슬픔은 회개를 자아내어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현세적 슬픔은 죽음을 가져올 뿐입니다. 보십시오, 하느님의 뜻에 맞는 바로 그 슬픔이 여러분에게 얼마나 큰 열성을 불러일으켰는지! 게다가 여러분의 그 솔직한 해명, 그 의분, 그 두려움, 그 그리움, 그 열정, 그 징계도 불러일으켰습니다. 여러분은 그 일과 관련하여 모든 면에서 잘못이 없음을 보여 주었습니다.”(2코린 7,8-11) 보다시피 바오로 사도는 회개에 이어 구원을 가져오는 하느님의 뜻에 맞는 슬픔과 죽음을 가져올 뿐이 현세적 슬픔이라는 두 가지 슬픔을 역설한다. 하느님의 뜻에 맞는 슬픔은 우리를 치유하고 자비하신 주님과의 관계를 복원한다.
이렇게 본다면 유다의 슬픔은 구원 곧 예수님께로 돌아서지 않는 슬픔이었으며, 자기 행위에 대한 유감만이 남아 결국 낙담과 절망에 이르렀으며 예수님과의 관계 복원에는 실패한 슬픔이었다.
왜 그랬을까? 한 마디로 이를 설명하기는 참 어렵다. 아마도 공동체와 예수님을 감히 마주하기에는 너무 부끄러웠을 것이다. 그러한 수치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수치를 진정으로 겸손하게 나누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주님께로 향하는 대신 자신을 향했고, 주님과 주님의 몸인 교회가 아닌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신의 고통을 끝내려고 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현세적 슬픔은 죽음을 가져올 뿐입니다.”라고 분명하고도 아주 단순하게 말씀하신다. 이런 식의 슬픔은 분리, 고립, 자기 자신에게로 파고들기, 그리고 마침내 영적이고도 육체적인 죽음에 이르게 한다. 유다가 자신이 저지른 행동에 대해 슬픔을 느낀 것은 맞지만, 그 슬픔은 잘못된 종류의 슬픔, 죽음을 낳는 최악의 슬픔이었을 뿐이다.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과연 구원을 얻을 수 있었을까?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를 믿는 이들은 그래도 예수님께서 그를 구원해주시지 않았을까 하고 기대한다. 그렇지만 그 누구도 이 점에 관해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유다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에 따를 때 다소 슬픈 단서를 엿보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마르 14,21)라는 말씀을 남기신다.
예수님께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셨는데도 유다가 구원에 들었을 것으로 상상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아무리 예수님의 자비를 강조한다고 해도 인간적인 눈으로 보기에 이 말씀은 유다에게 그리 긍정적으로 작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행동에 대해서 우리는 책임이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계시며, 우리의 회개에서조차도 그 뿌리가 교만에 닿아있다면 그 회개가 참된 회개가 아니며 하느님을 향하지 않는 회개일 수도 있다고 가르치신다.
유다를 향한 우리의 동정심에는 이해할만한 측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도 결정적인 것은 그의 뉘우침과 후회(그와 베드로의 근본적인 차이점)는 결국 주님이 아닌 자신을 향해 후회했다는 점이다. 누구나 걷다 보면 넘어질 때가 있지만 예수님께로, 반드시 예수님의 품으로 넘어져야만 한다!
어떤 이들은 유다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라고 항변하기도 한다. 그에게는 어떤 의미에서 예정되어 있었던, 반드시 수행했었어야만 하는 역할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물론 인간의 자유 의지와 존엄성을 간과하는 관건이 된다. 하느님께서 유다가 자기 자유 의지로 어떻게 할 것인지를 항상 아셨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느님께서는 영원으로부터 이미 이것을 꿰뚫어 아셨다. 그런데도 그것이 유다를 밀어붙인 것은 아니었다. 미리 아셨다고 해서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유다에게 강요하지는 않으셨다는 말이다. 오후 2시에 병원에 가야 한다는 것을 아는 사실이 당신을 꼭 병원에 가도록 밀어붙이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유다는 자유롭게 자기 자유 의지에 따라 행동했다. 하느님께서는 그가 어떤 죄를 지을지 아셨고, 그에 따라 당신의 계획을 세우셨다. 그렇다고 해서 유다가 꼭두각시였던 것은 아니었고, 각본과 대사에 따라 자기 역할을 하도록 강요받은 배우도 아니었다. 그는 자기 자유 의사에 따라 자기 주도적으로 행동한 자유로운 인간이었다.
슬픈 유다 이야기에 관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유다가 슬픔과 고뇌에 가득한 채 (은밀하게라도) 예수님을 찾아와 용서를 청하고 예수님의 자비에 의탁할 수 있었더라면 하는 가정假定의 전개이다. 하느님께도 영광이었고 인간에게도 영광이었을 것이다. 온 세상에 유다 이스카리옷을 기리는 수천수만 개의 성당을 생각해보는 것만으로 얼마나 아름다운 일일 것인가? 성 유다를 기리며 배반자의 피난처, 잃어버린 영혼의 수호성인을 기리며 온 세상이 바치는 9일 기도, 합당한 고백성사를 위한 성 유다의 가르침……이런 상상만으로도 우리는 행복해진다.
그럴 때 바오로 사도의 “현세적 슬픔은 죽음을 가져올 뿐입니다.”라는 구절은 “죽음을 가져올 뿐인 슬픔에서 주님, 저희를 구하소서!”가 돼야 했을 것이다.
유다의 구원을 두고 막연하면서도 낙관적인 생각은 성경이 가르쳐주시는 더욱 어려운 진리, 곧 자비와 회개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도 죄와 그 죄가 치러야 할 대가, 하느님과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자비를 거부하는 이들이 맞을 심판에 대한 경고 등, 많은 성경의 진리를 왜곡하거나 간과할 경향이 있다.
인간인 우리로서는 유다의 운명을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고도 단순하게 그이 결말에 관한 내용을 말씀하신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하느님의 자비에 의탁하여 어지간하면 대부분 구원을 받을 것이라든가 인간을 그토록 사랑하시는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설마 인간을 벌하고자 지옥을 만드셨을까 하는 식의 우스개와 같은 견해는 인간의 자유, 회개와 미덕의 필요, 어둠을 선호하는 인간의 성향(참조. 요한 3,21)을 간과하는 것이 된다.
유다는 알 수 없는 사람이지만, 주님의 자비와 진리를 거부하는 이들에게 주님 몸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마르 14,21) 하신 그대로 하염없이 비극적인 존재이다.
<이 글은 2021년 4월 25일 National Catholic Register에 기고한 몬시뇰 찰스 포프(Msgr. Charles Pope, 1961년~)의 글 ‘자비와 유다의 죄-Mercy and the Scandal of Judas’의 번역문임. 몬시뇰 찰스 포프는 현재 워싱턴 DC 대교구에서 활동 중이며 2005년 몬시뇰에 임명되었고, 자신의 홈페이지 https://msgrpope.com/를 운영 중이다. 번역 원문은 다음 링크에서 읽을 수 있다: https://www.ncregister.com/blog/mercy-and-the-scandal-of-judas>
※참고: 故 프란치스코 교황님이나 교황청 기관지의 다소 유다 편향적인 경향을 조목조목 반박하고자 하는 미국의 <Tradition, Family, and Property: https://www.tfp.org/> 사이트의 다음 글을 더 읽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