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廣野

「“광야”는 광야의 사람인 세례자 요한과 그의 의식주가 그러했던 것처럼 “주님의 길을 닦기”(이사 40,3) 위해 본질적인 것만을 들어야 하는 자리이다. 광야는 바위, 돌, 거친 관목들, 파충류, 메마름, 야수 같은 것들이 횡행하는 곳이다. 4세기에 사막의 교부들이 마귀들과 싸우러 나간다고 했던 광야는 분명한 진실을 뒤엎으려는 거짓이 드러나는 자리이고, 불타오르는 뜨거운 사랑에 찬물을 끼얹으려는 이기심이 드러나는 자리이며, 예수님의 이름을 지우려는 미움과 시기, 질투가 드러나는 자리이고, 희망과 생명을 앗아가려는 절망과 두려움이 드러나는 자리이다. 우리 인생이라는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가 그러했던 것처럼 불평과 반역, 그리고 저항의 자리인 동시에 하느님과의 만남, 우정, 사랑이 어우러져 하느님과의 관계가 정상화되는 자리이다.(참조. 호세 2,16-22 예레 2,2-3 신명 8,2 에제 16,23)」(김건중, 주일복음강해-사순 제1주일 ‘나’해, https://benjikim.com/?p=8614)

예수님께서 광야로 가시어,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루카 4,1) 광야는 “위험한” 장소이다. 공생활 전 예수님께서 처음 들리신 곳은 “위험한” 장소인 광야이다. 예수님은 떠돌이 설교자로서의 활동을 시작하기 직전, 광야에서 자기 자신을 만나신다. 예수님은 처음으로 자신이 스스로와 다르며, 낯선 존재임을 생각하신다. 자신이 ‘다른 존재’임을 발견하시고, 자신 안에 존재하는 ‘다른 목소리들’을 들으신다. 자신을 둘러싼 모순과 갈등을 보신다.

결국 가장 “위험한” 장소는 자신의 내면이다. 유혹 이야기(마태 4,1-11 루카 4,1-13)는 그래서 가장 위험한 장소에 관한 이야기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내면에서 전능과 절대적인 지배력을 꿈꾸는 욕망을 발견하신다. 무적이 되고 싶은 환상을 직면하신다. 하느님과 인간을 위해 존재하고자 하는 갈망과 그들을 자신의 뜻대로 조종하고 싶어 하는 유혹을 동시에 마주하신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내면의 혼란을 피하지 않으신다. 자신과의 만남에서 오는 두려움을 직면하신다. 혼돈을 받아들이시고, 그 안에 자리를 마련하신다. 그렇지만 혼자가 아니시다! “성령으로 가득”하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백성의 성경과 함께 이 과정을 겪으신다. 자신의 힘만을 의지하지 않고, 성경을 통해 자신의 혼란을 듣고, 성부 하느님과 신앙 공동체의 경험 속에서 해석할 방법을 찾으신다.

폭풍이 몰아칠 때, 자신의 힘만을 믿지 말 것, 현실을 자신만의 시각으로 판단하지 말 것, 이는 아주 중요한 통찰이다. 자신이라는 중심에서 벗어나야 하고 자신을 해체해야 한다. 신앙인으로서는 하느님의 말씀(성경)을 통해 현실에 대한 하느님의 판단을 듣는 것이 필요하고, 인간으로서는 타인의 경험을 듣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의식하신다. 자신을 ‘느끼는’ 존재가 되신다. 그리고 성경을 왜곡하는 위험한 해석, 인간의 육체를 부정하는 해석이 잘못되었음을 생각하신다. 인간의 실제 몸, 각기 다르게 새겨진 죽음이라는 한계, 그것을 무시하는 해석은 잘못이다. 하느님과 인간의 육체는 절대 대립하지 않는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혼란과 모순 속에도 함께하신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2) 한 하늘의 소리대로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아들은 복잡하고 모순적인 인간이시다. 육체가 없는 존재가 아니시다. 그리고 하느님이시다.

몸, 자기 자신의 몸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본질의 체험이다.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 현실을 바라보는 관점, 감정과 욕망은 모두 몸에서 비롯된다. 자신의 몸을 느끼고, 불편함을 겪으며, 갈등을 경험하고,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 그 안에서 우리가 느끼는 내면의 모순, “나는 복잡다단하다, 내 안에 많은 것들이 있다”라는 자각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우연한 발생도, 극복해야 할 과정도 아니다. 오히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불완전하고 유한한 존재임을 가장 깊이 깨닫는 순간이다. 바로 그렇게 우리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현실의 중심에 선다.

광야의 만남을 통해 예수님은 자신의 몸이라는 한계를 도망쳐야 할 것이 아니라, 새롭게 의미를 부여해야 할 것으로 보신다. 한계로부터의 자유 추구가 아니라, 한계 안에서 자유와 해방을 찾으신다. 참다운 권위(Authority)가 몸과 육체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의 것임을 생각하신다.

자신이 불완전한 존재임을, 그리고 자신 안의 모순과 다양한 세계들을 인정하는 것, 이것들이 예수님께서 만나시게 될 모든 이들과 평등하고 형제적인 관계를 맺도록 이끈다. 예수님은 높은 곳에 군림하지 않으시며, 일방적인 관계 속에 머물지도 않으신다. 그분께서 “우리의 병고를 떠맡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졌다.”(마태 8,17)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한정된 인간의 조건을 받아들이셨음을 의미할 수 있다. 그렇게 예수님은 떠돌이 설교자로서의 여정을 시작하신다.

시작하는 삶에는 언제나 이처럼 ‘광야 하기(카를로 카레토, fare il deserto, make the desert)’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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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사막 하기(광야 하기)’는 스스로 고립을 자청하는 것, 분명하고 건강한 정신으로 사람과 사물에서 분리되는 것이다. 사막 하기는 자율에 익숙해지면서, 자기 생각과 기도, 그리고 숙명에 머무르는 것이다. 사막 하기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숨을 다시 쉬기 위해, 그리고 평화를 다시 찾기 위해 사막 교회 안에 홀로 머무르는 것…사막 하기는 기도에 온종일을 바치는 것, 고독한 하루를 위해 떠나는 것, 기도하기 위해 밤에 일어나는 것.(Fare il deserto significa isolarsi, distaccarsi dalle cose e dagli uomini, principio indiscusso di sanità mentale. Fare il deserto significa abituarsi all’autonomia personale e restare con i propri pensieri, la propria preghiera, il proprio destino. Fare il deserto significa chiudersi in una camera, restare soli in una chiesa deserta… per riprendere il respiro, ritrovare la pace. Fare il deserto significa di tanto in tanto dedicare una giornata completa alla preghiera, significa partire per una giornata solitaria, significa alzarsi nella notte a pregare.)」(카를로 카레토C. Carretto, 1910~19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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