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오로 사도께서는 전통적으로 필리피서, 콜로새서, 필레몬서와 함께 ‘옥중 서간’이라고 불리는 에페소서(총 6장)의 마지막 부분을 “영적 투쟁”에 관한 내용으로 구성하면서 전쟁터에서 무장한 전사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기술한다. 이는 오늘날 “악마의 간계”(에페 6,11) 아래 끊임없이 위협당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삶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반드시 거듭 읽어야 하는 대목이다.
영적 투쟁이 벌어지는 곳, 마음
영적 투쟁이 벌어지는 곳은 정확히 말해서 ‘마음’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모든 영적인 삶은 성경이 “마음(심장, 히브리어 – לב, Lev, 희랍어 – καρδία, kardía)”이라고 부르는 인간의 핵심적 기관에서 이루어진다. 앙투안 기욤(Antoine Guillaumont, 1915~2000년)이 “민감한 삶, 정서적인 삶, 지적인 삶의 자리로서 마음은 우리가 소위 ‘인격’이라고 부르는 구성 요소를 모두 담고 있다”라고 말한 것처럼, 마음은 우리의 지성, 기억, 의지, 욕구, 사랑, 용기가 발생하는 자리로서 우리 삶을 총체적으로 대표하는 기관이다.
“사람의 속과 마음은 헤아리기 어렵습니다.”(시편 64,7) 한 그대로 하느님만이 아시는 곳, 진실을 식별하고 점검할 수 있는 곳에 관하여 말하는 것은 성경이 누누이 말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다: “당신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아시니, 그 모든 행실에 따라 갚아 주십시오. 당신만이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십니다.”(1열왕 8,39) “마음과 속을 꿰뚫어 보시는 분 하느님께서는 의로우시다.”(시편 7,10)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더 교활하여 치유될 가망이 없으니 누가 그 마음을 알리오? 내가 바로 마음을 살피고 속을 떠보는 주님이다. 나는 사람마다 제 길에 따라, 제 행실의 결과에 따라 갚는다.”(예레 17,9-10)
우리 안에 하느님의 모습이 새겨지는 곳은 모든 인간의 가장 은밀한 부분인 마음이다. 엄밀한 개념이라는 것을 넘어서서 상징적 언어를 통해 관통할 수 있는 이 마음이라는 공간에서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말씀을 건네시고, 응답하도록 인간을 초대하시며, 인간의 마음 문을 열어 인간과 대화를 나누신다.(참조. 호세 2,16-17) 그렇게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다가오실 때, 인간의 마음은 매일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씨앗을 받아들여 열매를 맺으려 애쓰는(참조. 마르 4,1-9과 병행구) “듣는 마음(לב שומע, lev shomea‘)”(1열왕 3,9), 그리고 말씀에 둔감하여 신약성경이 믿음이 없는 “완고한 마음(σκληροκαρδία, sklerokardía)”(마태 19,8 마르 10,5;16,14)이라고 정의한 마음, 그 둘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하게 된다.
말씀이 떨어지는 마음 밭이 영적 투쟁이 뿌리를 내리는 바로 그 자리인 것은 분명하다. 마음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친밀함과 만남, 언약의 장소이면서 동시에 예수님께서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마르 7,21-22)라고 분명하게 말씀해주신 대로 악의 힘으로 조성되는 그릇된 것들의 자리이다. 따라서 마음은 사탄의 계략과 하느님 은총의 활동이 부딪히는 장소이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를 때 마음은 그리 똑똑하지 못하여 깨닫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며, 식별하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하며(참조. 마르 6,52;8,17-21), 자비에 눈을 감을 수 있으며(참조. 마르 3,5), 미움과 중상中傷(근거 없는 말로 남을 헐뜯어 명예나 지위를 손상함)으로 양분을 얻어 자라고(참조. 레위 19,16-17), “모진 시기심과 이기심”(야고 3,14)을 키우며, 구약에서 문자 그대로 하나의 마음과 또 다른 하나의 마음이 있는 상태(lev va-lev, 참조. 시편 12,3)인 “두 마음(δίψυχος, dípsychos)”(야고 1,8;4,8)이다. 예수님께서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마태 5,28) 하신 것처럼 모든 죄는 겉으로 드러나 하느님에게서 떨어지는 죽음의 길에 들어서기 전에 이미 우리의 마음에서 완성된다.
마음은 보이지 않는 전쟁터이다. 마음은 “온(전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돌아서는 회심(참조. 예레 3,10;29,13)의 시작점이 될 수도 있고, 죄의 유혹에 떨어지고 우상 숭배라는 노예 상태로 전락하고 마는 귀결점이 될 수도 있다. “제 마음을 모아 주소서.”(시편 86,11) 하고 시편 기자가 기록한 대로, 성령의 권능 안에서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우리 안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일하시는 하느님과 협력하며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일은 무척 힘든 싸움이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받은 부르심이다.
영적 투쟁, 무장武裝
그리스도인은 기본 소명인 영적 투쟁에 어떻게 맞서야 할까? 그리스도교 전통은 이러한 전쟁을 수행하는 데에 적합한 도구, 곧 특정한 무기들을 식별해왔다. 이러한 식별에 관해서는 신약성경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으며, 그중에서도 특별히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의 마지막 장인 에페 6,10-18은 영적 투쟁에서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하는 무기들에 관한 고전 중의 고전이라 할 수 있다. “경기(투쟁)를 하는 사람도 규칙대로 경기를 하지 않으면 승리의 화관을 얻지 못합니다.”(2티모 2,5)라는 말씀을 염두에 두면서, 그리스도인들이 사탄의 올무에 맞서기 위해 자신을 어떻게 무장해야 하는가를 언급한 에페소서의 대목을 재구성해 읽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주님 안에서 그분의 강한 힘을 받아 굳세어지십시오.”(에페 6,10)라는 구절로 영적 투쟁에 관한 내용을 시작하는 바오로 사도는 ‘강해지다, 요새화되다’라는 뜻을 담은 ‘엔듀나무스테(ἐνδυναμοῦσθε, endunamoûsthe)라는 말, 곧 “굳세어지십시오.”라는 명령어로 시작한다. 그 앞에는 “그분의 강한 힘을 받아”라는 말이 더해져 있다. 인간이 하느님의 힘을 받을 때 그 행동은 생각할 수 없는 시너지로 굳세어진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힘과 은총을 받아야만 굳세어진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다른 서간문에서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주어지는 은총으로 굳세어지십시오.”(2티모 2,1) “나는 내 안에서 힘차게 작용하는 그리스도의 기운을 받아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콜로 1,29) 하며 이를 분명히 강조한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이미 에페소서의 첫 장인 1장에서 “우리 믿는 이들을 위한 그분의 힘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그분의 강한 능력의 활동으로 알게 되기를 비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능력을 펼치시어,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하늘에 올리시어 당신 오른쪽에 앉히셨습니다.”(에페 1,19-20) 하면서, 그리스도의 힘이 그분 부활의 권능으로 드러났음을 밝힌다.
그리스도인의 보이지 않는 투쟁은 성령의 권능으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기초한다. 실로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의 권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당신의 죽음으로 파멸”(히브 2,14)시키신 결정적인 승리의 사건이다. 모든 죄가 궁극에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맞서보려는 서투른 시도들이라면, 이러한 죄와 맞서고자 하는 싸움에서 가장 효과적인 무기는 바로 부활에 대한 믿음이다. 대전제 격인 이러한 믿음을 분명히 한 바오로 사도는 계속해서 영적 투쟁에 관한 구체적인 말씀을 이어간다.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 우리의 전투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권력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들입니다. 그러므로 악한 날에 그들에게 대항할 수 있도록, 그리고 모든 채비를 마치고서 그들에게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한 무장을 갖추십시오.”(에페 6,11-13)
바오로 사도는 전쟁 용어를 사용하여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마련해주신 “하느님의 무기”로 무장하라고 권고한다. 물론 바오로 사도께서는 구약의 하느님께서 당신의 구원 계획을 이루시고자 못된 것들을 내려치시려고 당신 몸소 무장하신 하느님의 무기와 무장을 염두에 두었을 것임은 자명하다: “그분께서는 정의를 갑옷처럼 입으시고 구원의 투구를 머리에 쓰셨다. 응보의 옷을 입으시고 열정을 겉옷처럼 두르셨다.”(이사 59,17) “주님께서는 당신의 원수들을 징벌하시려고 당신의 열정을 갑옷으로 입으시고 온 피조물을 무장시키실 것이다. 또 정의를 가슴받이로 두르시고 어김없는 공정을 투구로 쓰시며 거룩함을 무적의 방패로 잡으시고 준엄한 진노를 갈아 칼로 만드실 것이다. 그러면 온 세상이 주님 편에 서서 미친 자들과 싸울 것이다.”(지혜 5,17-20) “힘없는 이들을 정의로 재판하고 이 땅의 가련한 이들을 정당하게 심판하리라. 그는 자기 입에서 나오는 막대로 무뢰배를 내리치고 자기 입술에서 나오는 바람으로 악인을 죽이리라. 정의가 그의 허리를 두르는 띠가 되고 신의가 그의 몸을 두르는 띠가 되리라.”(이사 11,4-5)
신약성경의 예수님 말씀에서도 ‘파노플리아(πανοπλία, panoplía, 전사의 완전 무장된 갑옷과 무기 세트)’라는 용어가 등장하고 있다는 점은 참 흥미롭다. 이 말은 루카복음에서 예수님을 두고 사람들이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루카 11,15)라고 말할 때, 예수님께서 “힘센 자가 완전히 무장하고 자기 저택을 지키면 그의 재산은 안전하다. 그러나 더 힘센 자가 덤벼들어 그를 이기면, 그자는 그가 의지하던 무장을 빼앗고 저희끼리 전리품을 나눈다.”(루카 11,21-22)라고 응대하셨다는 장면에서 유일하게 등장한다. 루카는 예수님의 ‘완전무장’이 마귀의 ‘완전무장’보다 강하며, 따라서 예수님께서 결국 마귀를 무장해제 하신다고 기록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예수님의 무장으로 그분 안에서 무장하고 그분을 통해서 싸울 때만 원수의 무장해제가 가능해진다.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서에서 용어만 달리할 뿐 바로 이 예수님의 무장을 언급하고 있다. 바오로 사도는 복음의 “마귀” 혹은 “마귀 우두머리”를 “우리의 전투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권력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들”(에페 6,12)이자 “악한 자”(에페 6,16)로 묘사한다. 바오로 사도가 묘사하는 그리스도인의 전투 상대는 인간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을 세례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려는 악한 의도를 가지고 접근하는 악한 세력들을 통칭한다.(로마노 펜나Romano Penna, 1937~2025년)」
악령들, 곧 “이 세상의 풍조에 따라, 공중을 다스리는 지배자, 곧 지금도 순종하지 않는 자들 안에서 작용하는 영들”(에페 2,2)이라는 이 사악한 영들에 투쟁하기 위해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첫 번째 태도는 “맞설 수 있도록”(에페 6,11), “대항할 수 있도록”(에페 6,13), “굳건히 서십시오.”(에페 6,14) 한 그대로 ‘맞서는’ 것이고 ‘대항하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 ‘굳건히 서는’ 것이다. 이러한 굳건한 태도는 무엇보다도 원수의 공격에 맞서는 것이고, 그 앞에서 도망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탄의 유혹에 두려움 없이 정면으로 맞서 사십일 동안 광야에서 사탄을 대적하셨던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모범이다. 이러한 적극적인 굳건함의 태도를 지닌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바오로 사도가 말한 대로 스스로 “의로움의 도구”(로마 6,13)가 되어 “오른손과 왼손에 의로움의 무기를 들고”(2코린 6,7), “빛의 갑옷”(로마 13,12)을 입고, “하느님 덕분에 어떠한 요새라도 무너뜨릴 수 있을 만큼 강력”(2코린 10,4)해진다.
굳건한 태도를 지닌 그리스도인에게는 “정의가 그의 허리를 두르는 띠가 되고 신의가 그의 몸을 두르는 띠가”(이사 11,5) 되고, “정의를 갑옷처럼 입고”(이사 59,17), “산 위에 서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저 발!”(이사 52,7)이라고 노래하는 발로 딛고 선 이이다. 그는 “거룩함을 무적의 방패로 잡아”(지혜 5,19) “믿음의 방패를 잡으십시오. 여러분은 악한 자가 쏘는 불화살을 그 방패로 막아서 끌 수 있을 것입니다.”(에페 6,16) 한 그대로 악한 자들이 쏘아대는 그 어떤 불화살이라도 꺾어버리는 자이며, “구원의 투구를 머리에 쓰고, 응보의 옷을 입고 열정을 겉옷처럼 둘러”(이사 59,17)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에페 6,17) 한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성령의 검을 손에 쥔 사람이다.
바오로 사도는 세밀하게 구약의 무장을 인용하면서 그리스도인의 무장을 설명한다. 그렇지만 이는 이미 믿음으로 눈이 밝아진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하느님의 생명, 곧 인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얻은 생명에 하나가 되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입기
그리스도인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로마 13,14)라는 말씀 그대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라는 부르심을 받은 존재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그리스도인의 무장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무장이다. 그렇게 무장한 그리스도인은 “여러분은 늘 성령 안에서 온갖 기도와 간구를 올려 간청하십시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인내를 다하고 모든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며 깨어 있으십시오.”(에페 6,18)라는 말씀 그대로 “기도와 간구”의 땅에서 불철주야 깨어 훈련하고 연마하며 투쟁에 대비한다.
“형제 여러분,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의 사랑으로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나를 위하여 하느님께 기도드리며 나와 함께 싸워 주십시오.”(로마 15,30) “하느님의 모든 뜻에 확신을 가진 사람으로 굳건히 서 있도록 언제나 여러분을 위하여 열렬히 기도하고 있습니다.”(콜로 4,12)라고 바오로 사도께서 기록한 대로 “기도”는 그 자체로 진정한 투쟁이요 싸움이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1테살 5,17)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기도는 ‘모든 순간에(en pantì kairô)’ 한 시도 멈춤 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다고 그런 기도가 어떤 정형화된 틀을 반복하고 되풀이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교회의 교부들이 ‘하느님 기억’이라고 표현하는바, 이는 우리 안에 살아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항상 의식하기 위해 노력하며 고군분투하는 과정의 존재가 되는 것을 말한다.
바오로 사도는 “성령 안에서(ἐν Πνεύματι, en pneúmati)” 기도할 것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자신이 주인공이 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자신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기도하시기를 간청하며 그 성령의 인도를 따라 기도한다. 성령을 따라 기도할 때 기도를 드리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삶이 바뀜을 안다. 그리고 그러한 기도는 항상 “모든 성도들을 위한 기도”로서, 형제자매들과 하나가 되는 기도가 된다.
바오로 사도는 “깨어 있으십시오”라는 말로 영적 투쟁에 관한 말씀을 마친다. 주님께서도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6) 하셨다. 기도는 “개어 있음”이라는 덕을 필요로 한다. 그리스도인의 “깨어 있음”은 주님의 현존을 의식하고 식별하기 위한 내적 긴장의 태도이다. 주님께서 오실 것을 대비하여 자신 안에 그분을 위한 공간을 마련함이다. 경건한 영적 명징明澄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깨어 있음”은 그리스도인을 단련하여 영적 투쟁의 전사가 되게한다. 그리스도인의 “깨어 있음”은 우상 숭배로 타락한 그릇된 열정이나 끊어진 생명 에너지를 하느님, 형제자매, 모든 피조물에 대한 사랑 에너지로 전환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깨어 있음”은 모든 그리스도인 덕목의 열쇠이다.
지금이 제가 깨어있어야 할 시간인 것 같습니다.
창조주 성령 하느님,
“온(전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돌아서는 회심으로 성령 하느님 안에서 간절히 기도합니다.
늘 주님 사랑안에 깨어 있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굳셈으로 점점 더 커지는 이 모든 어두운 영의 유혹들을 물리치게 하소서.
그리하여 주님 안에 더욱 더 튼튼하게 성장하고 성숙하는 주님의 고귀하고 품위있는 아들이 되게 해 주십시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