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새김’의 어원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우리가 흔히 ‘묵상meditatio’이라고 일컫는 것이 애초에 어떤 뜻이었는지를 먼저 말씀드려야 합니다.[1] 국어사전에는 대체로 ‘묵묵히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이라 풀이되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 말은 대개 어떤 영적 주제를 놓고 사색하거나 스스로의 내면을 성찰한다는 뜻으로 쓰입니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것은 단순히 단어나 구절을 입으로 소리 내어 거듭 읊는 것을 지칭하는 말이었습니다. ‘묵상’이란 말의 출처가 된 라틴말 meditari뿐 아니라[2] 그리스 말 μελετάω, meletao 동사는 원래 그런 뜻도 지니고 있었습니다.[3] 이것은 생각이나 추리推理 같은 정신 활동이라기보다 차라리 신체 활동에 가까운 것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머리만 쓰는 일이 아니라, 입과 ‘안광眼光이 지배紙背를 철徹하는’ 눈(양주동), 책장을 넘기는 손가락, 적당히 흔드는 상체 등, 한마디로 몸 전체를 쓰는 일이었으니까요. 그리하여 독서 행위에 전인全人이 투입되는 것입니다.[4] 요컨대 초세기 교부들과 중세의 스승들에게 ‘묵상’은 무엇보다도 마음으로 그 뜻을 되새기며 성경 본문을 소리 내어 되풀이 읽는 행위, 즉 ‘구송口誦’ 혹은 ‘암송暗誦’을 뜻했습니다.[5]
‘전자문화’ 시대를 사는 오늘날에는 사실 구송 위주의 이런 독서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지만,[6] 그리 오래지 않은 옛날 우리네 선비들도 글 읽을 때는 언제나 이렇게 읽었습니다. ‘백 번을 읽으면 그 뜻이 저절로 나타난다’(문리文理가 통한다, 독서백편讀書百遍 의자현意自見)고들 하시지 않던가요! 성경뿐 아니라 좋은 글은, 특히 시의 경우, 자기 입으로 두런두런 소리 내어 읽어야 그 맛이 느껴지고 때로 뼈에 저리도록 알아듣게도 되는 법입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원래 동물 생리학 용어였던 ‘되새김질’이란 말이 거룩한 독서의 아주 중요한 방법을 지칭하는 말로 쉽게 차용된 것이 절로 이해가 갑니다. 되새김질 혹은 반추反芻란 이른바 ‘되새김 동물’들의 소화 행위를 두고 일컫는 말입니다. 소나 염소 등, 위를 네 개씩이나 가진 이 짐승들은 풀이 보이면 우선 되도록 많이 뜯어 삼킨 다음, 틈만 나면 다시 끄집어내어 되새김질하지요. 그들의 입은 그래서 거의 언제나 우물우물 씹느라 움직이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틈 날 때마다 말씀을 주워듣고 끊임없이 중얼거리고 다니던 사막 수도승들과 얼마나 비슷합니까. 사실 ‘되새김질’이란 말이 이렇게 그리스도교 영성의 용어로 사용되는 것은 회수도승會修道僧 생활의 원조라 일컫는 이집트의 파코미우스(297~347년)계 문헌에서 제일 먼저 발견된다고 합니다. 그 이후에도 예를 다 들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대 교부들과 중세 스승들이 그 중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짐승의 되새김질이 ‘읽고 듣고 이해한 하느님 말씀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활동’이란 뜻으로 말하자면 ‘거룩한 변화(성변화聖變化)’를 이룬 것입니다.
우리는 중요하다고 느껴지는 어떤 말을 들으면 대개 그것을 자기도 모르게 되뇌게 됩니다. 그것은 들은 말을 더 깊이 알아듣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또 마음에 새겨 기억하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거룩한 독서에서도 되새김은 이렇듯 자연 발생적으로 생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영성의 역사에서는 되새김이 하나의 수행修行 방법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특히 수도승 생활의 경우 그들의 영성은 거룩한 독서와 분리될 수 없고, 또한 그들의 거룩한 독서는 되새김과 분리될 수 없다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7] 그러면 되새김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인가요. 너무나 단순합니다. 한마디로 성경의 특정 구절(가능하면 짧은 구절)을 끊임없이 되뇌고 곱씹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들은 말씀을 마치 자기 몸의 일부로 만들기라도 할 것처럼 마음속에 깊이 각인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한 구절을 단순히 반복하여 중얼거리는 것이 어떤 효과를 내는지, 체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모릅니다. 되새김을 통하여 내 ‘바깥’에 있던 본문이 내 ‘안’으로 들어오게 되고, 그리하여 이제 신앙인은 책으로 된 성경 대신 자기 마음에 새겨진 말씀으로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의 깊게 마음으로 그 뜻을 따라가면서 곱씹고 되뇌일 때, 그 성경 구절에 담긴 형언할 수 없는 ‘맛’을 느끼게 됩니다. 단순하기 짝이 없는 이 방법이 성경 구절을 참으로 깊이 이해하는 데 어떤 역할을 하는지, 달고도 구수한 주님 말씀의 맛을 어떻게 전달해주는지 설명할 길 없어 답답할 따름입니다. 그저 독자 여러분도 속는 셈 치고 몸소 한번 해보라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음으로 되새김의 역할 혹은 기능은 무엇인지 보겠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기억’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기억은 머리로만 암기한 결과로서의 기억과는 사뭇 다릅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사람의 무의식에까지 각인되는 종류의 기억입니다. 머리로만 기억한 것은 허무할 정도로 쉽게 잊혀집니다. 학생들이라면 시험이 끝나면서 애써 공부한 것을 죄다 잊어버린 일을 더러 체험했을 것입니다. 시험과 함께, 외운 것을 선생님께 ‘반납’해 버리는 현상이지요. 그러나 되새김으로 생기는 기억은 머리가 기억하기 이전에 ‘근육이 기억mémoir musculaire’하는 것이어서[8] 잊어버리는 일이 없거니와 마치 내 몸의 일부처럼 자연스레 내 존재를 형성하게 됩니다. 내 느낌과 판단, 사색과 실천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은 참으로 ‘기억으로 사는 법’이지요. 지난 장에 말씀드렸던 미드라쉬 독서도 우리 기억의 저장고에 이런 식으로 말씀이 소화되어 쌓이게 되는 것과 깊은 관계에 있습니다. 되새김을 통해 성경 구절마다 그 표현을 더 깊이 알아듣게 되면, 성경 전체를 통해서 해당 구절의 메아리를 절로 듣게 되는 법입니다.
이미 소개한 적이 있는 귀고 2세는 ‘독서가 단단한 음식을 입으로 가져가는 것이라면, 묵상은 그것을 잘게 씹어 가루로 만드는 것’이라는 말로 되새김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반찬 없이 밥만 씹어본 경험이 있으신 분들을 아실 것입니다. 맛없는 밥알들이 씹혀 가루가 되면서 얼마나 단맛을 내는지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무미건조한 구절들을 마음과 입으로 되새김 할 때 우리도 “당신 말씀이 제 혀에 얼마나 감미롭습니까! 그 말씀 제 입에 꿀보다도 답니다”(시편 119,103)라고, 혹은 “당신 말씀을 발견하고 그것을 받아먹었더니 그 말씀이 제게 기쁨이 되고 제 마음에 즐거움이 되었습니다”(예레 15,16)라고 시나브로 기쁨에 겨워 고백하게 됩니다. 사실 오늘날도 거룩한 독서를 진행하면서 오직 이 되새김의 방법만으로도 쏠쏠한 재미를 보는 분들이 많습니다. 본문을 여러 번 주의 깊게 읽고 나서, 가장 마음에 와 닿은 구절을 단순하게, 마음을 다하여, 입으로 혹은 마음속으로 반복하여 되뇌는 것입니다.
그러나 되새김의 가장 큰 장점은 뭐니뭐니해도 일상 전체를 통해 실천할 수 있다는 점에 있을 것입니다. 거룩한 독서가 하루의 특정 시간에 한정되는 것이어서는 안 되고, 온 일상 전체가 어떤 의미에서 더 진정한 거룩한 독서의 현장이 되어야 한다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성경을 읽는 동일한 눈으로 보면, 나의 사소한 일상사, 사건, 사람들은 모두 그 속에 말씀의 현존을 감춘 또 하나의 성경 본문입니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만 보인다는 말로 태조 이성계를 무색하게 한 무학대사의 일화가 있듯이, 말씀의 눈에는 이미 말씀 아닌 것이 없는 법입니다. 되새김을 끊임없이 수행함으로써 우리는 “당신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에 빛입니다”(시편 119,105)라는 말씀의 뜻을 우리 체험으로 깨닫게 됩니다. 지하철 안에서, 운전 중에, 길을 걸으면서, 설거지나 빨래를 하면서, 한마디로 우리 일상 전체를 통해, 마음에 저장된 하느님 말씀을 끄집어내어 조용히 되새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빛으로 내가 맞이하는 모든 만남이나 사건을 비추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수행이기에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닙니다만,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말씀은 너희에게 가까이 있다. 너희의 입과 너희의 마음에 있기 때문”입니다.(신명 30,14 로마 10,8) 그렇습니다. 거룩한 독서 자체가 그런 것처럼, 되새김도 방법을 몰라서 못 하는 경우보다는 마음이 없어서 못 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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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J. Lecleccq, L’amour des lettres et le désir de Dieu, Pris 1957, 21-23 ckawh
[2] 장 르클레르 신부님은 이에 대해 위의 책, 22-23;72-73에서 풍부한 용례를 제시해 놓았습니다. 같은 저자의 Etude sur le vocabuulaire monastique du moyen âge, Roma 1961, 134-135쪽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3] A Patristic Greek Lexicon, ed. by G.W.H.Lampe, Oxford 1961, 840 참조
[4] 예컨대 <동몽선습>에서 가르치는 독서법 (<성서사도직회보> 제11호, ‘유학의 경학체계와 독서법’, 9-15)을 보노라면, 구송의 이 독서법이 우리 땅 옛 선비들의 독서법과 얼마나 유사한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5] 독특하고 뛰어난 생태 사상가이자 교육자 이반 일리치(1926~2002년)는, 생 빅토르의 후고(1095~1141년)의 <교수법Didascalicon>이란 작품을 해설하면서 ‘구송’의 독서문화가 오늘날에도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많이 강조하였습니다. 정보information의 효과적이고 빠른 입수만 강조하는 오늘날의 독서 행태는 전인격의 형성formation을 겨냥했던 고대인들의 구송 독서법으로 보완 극복되어야 한다는 취지이겠습니다.(In the Vinyard of the Text : A Commentary to Hugh’s Didascalicon, Chicago 1993 참조). 렉시오 디비나에 온전히 초점을 맞추고 쓴 다음의 독일어 논문도 소개합니다. Lectio Divina, in Schriftlichkeit im früben Mittelalter, ed. : Ursula Schaefer, Tübingen 1993, 19-35, 후고의 <교수법>을 기점으로, 구송을 중심으로 한 독서 문화는 스콜라 시대부터 중대한 변화를 맞게 됩니다. 예컨대 독서 문화의 중심점이 되새김ruminatio으로부터 ‘강독lecturs’으로 넘어가고, 출판되는 책의 체제도 고전 저술가들의 ‘권위auctoritas’를 논거로 더 쉽게 인용하기 위해 오늘날처럼 페이지마다 숫자를 달고 알파벳 순의 색인index을 다는 등, 책은 독자의 몸과 삶으로부터 점점 멀어져서 마침내 추상적 정신 활동을 위한 참고서로 변질된 것입니다. 위에 언급한 일리치의 책에도 이런 변천이 잘 기술되어 있지만, ‘독서’란 주제로 최근에 번역되어 나온 흥미로운 책 한 권에도 비교적 잘 소개되어 있습니다. <읽는다는 것의 역사>, 로제 샤르티에·굴리엘모 카발로 엮음, 이종삼 역,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2006(특히 중세 초기 수도원의 관습을 다룬 3장과 스콜라 시대를 다룬 4장, 중세 후기를 다룬 5장 참조).
[6] 미국의 예수회원 월터 J. 옹신부님은 원래 구술口述에 토대를 둔 언어생활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문자를 쓰거나 인쇄하는 것에 토대를 둔 ‘문자문화’ 시대를 지나 오늘의 ‘전자문화’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르는지를 잘 정리해 준 바 있습니다. 월터 J. 옹,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이기우·임명진 역, 문예출판사 1995 참조.
[7] 고대 수도승 문헌의 최고 권위자로 꼽히는 A. 드 보귀에 신부님이 이 점에 대해 쓴 글이 번역되어 있습니다: 아달베르 드 보귀에, ‘일·독서·되새김, 김의자 역, <코이노니아 선집> 5, 성 베네딕토 왜관수도원 2004, 410-425
[8] 이 기막힌 표현은 르클레르 신부님의 작품입니다.(J. Leclercq, L’amour des lettres et le désir de Dieu, Paris 1957, 72)
*글과 글 쓴 이(이연학, 성경은 읽는 이와 함께 자란다, 성서와 함께, 2006년, 62-6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