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아동兒童

우리말에서 ‘어린이’라는 말은 ‘어리 + ㄴ + 이’가 결합한 말이라고 풀이한다. 이 말이 문헌에 나타나는 것은 17세기부터인데, 중세 국어에서 ‘어리석다’는 뜻으로 쓰이다가 점차 ‘나이가 적다’는 뜻으로 변한 ‘어리다’의 관형사형 ‘어린’에 의존 명사 ‘이’가 결합된 말로 ‘어린 사람’을 뜻하다가 방정환 선생이 1920년에 ‘어린이’라는 말을 새롭게 쓰면서 높임의 뜻이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참조. 이화여대 국어문화원)

어린이는 한자말로 ‘아동兒童’이다. ‘아이 아兒’는 정수리가 아직 완전히 봉합되지 않은 아이의 모습으로서 머리가 몸체보다 큰 아이들의 비대칭 구조를 형상화했고, 숨골을 상징하는 위쪽이 벌어진 모습 아래에 ‘사람 인儿’를 붙여 생겨난 글자이다. 여기에 아직 뿔이 나지 않은 염소나 소 같은 것을 뜻하면서 사람에게서는 열대여섯 아래 나이의 아이를 가리키는 ‘아이 동童’을 붙여 ‘아동’이라는 말이 된다. ‘아이 동童’은 윗부분이 문신 칼(신辛)이고 중간이 눈(목目)이며 아랫부분이 소리부인 동(동東)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글자로서 반항하는 힘을 줄이고자 한쪽 눈(目)을 칼(辛)로 도려낸 남자 노예 아이를 묘사하던 글자였다.(*참조. 하영삼, 한자어원사전)

이처럼 한자 문화권이나 우리 문화에서는 다소 부정적인 뜻으로 어리석고 미숙하며 아직 완전한 인간이 아닌 인간처럼 생각하던 어린이를 예수님께서는 그들처럼 되어야만 하늘 나라를 차지하리라고 하신다.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와 축복해주시라고 하자 제자들이 이를 가로막았는데, 이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꾸짖으시고 언짢아하시며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 19,14 마르 10,14 루카 18,16) 하신다. 과연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흔히 해석하듯 어린이가 어른에게 철저히 의존적이듯 인간은 하느님의 은총에 온전히 의존하는 존재여야만 한다는 뜻일까, 아니면 「즐겁게 노는 어린이처럼 푸르른 하늘 우러러보며 이 세상 근심 잊어버리고 꿈속에서 살리라」 하고 늘 성가에서 불렀던 대로 만사를 잊고 꿈속에서만 사는 존재여야 한다는 말씀일까?

어린이는, 호기심이 많은 이들 /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이 없는 이들 / 숨은 의도를 가지고 교묘하게 행동할지를 모르는 이들 / 언제 어느 상황에서라도 우정을 맺을 줄 아는 이들 / 하느님께서 지으신 대로 원초적 토양을 그대로 지닌 이들 / 자신의 숨은 의도를 감추지 못하는 이들 / 있는 그대로 말하는 이들 /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무언가에 몰입할 수 있는 이들 / 쓸데없는 많은 것에 열정을 지니고 놀라워하는 이들 / “어린이들만이 자기들이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안다.” 하는 말처럼 무엇인가를 열심히 찾는 이들 / 별이나 꽃, 동물, 숲 같은 이들 / 세상과 사람들을 마음의 눈으로 보는 이들 / “눈먼 인도자들…작은 벌레들은 걸러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자들”(마태 23,24)과는 정 반대편에 있는 이들……일까?

어린이는 귀뚜라미가 자기 집에서 빠져나오는 모습, 벌이 집을 짓는 모습, 노을, 새의 울음소리처럼 경이로움이다. 어린이는 샘솟는 호기심의 분출, 장애가 있든 없든, 피부색이 어떻든…언제 어디서나 어떤 것도 가리지 않는 자발적인 우정의 기술을 지녔고, 누군가가 내가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기쁨도 지녔다.

“Kids say the darndest things.”라는 말처럼 어린이들은 항상 이상하게 말한다. 그렇다고 어린이와 같다는 것이 세련되지 않거나, 유치하며, 시쳇말로 속이 없다는 것과는 다를 것이다. ‘darndest’라는 말에는 ‘멍청한’이란 뜻도 있으나 ‘놀라운, 기대하지 않았던, 재미있는, 영리한, 생각지도 않았던’이란 뜻도 있으니 말이다.

중세의 지성이었고, 뛰어난 석학이었던 성 토마스 아퀴나스를 두고 항상 묘사되는 수식어는 ‘childlike’, ‘innocent’, 곧 ‘어린이 같고 순진하며 천진난만하다’는 것이었다. 정신과 의사인 이브 프리겐트Yves Prigent는 “어린이는 매 순간 자기 존재의 가능성과 맛을 즐기고, 매 순간 인생을 발명해가며, 현재의 순간을 은총으로 살고, 만족하지 않고도 항상 행복하며, 모든 몸짓에서 꿈을 꾸고, 모든 꿈을 현실화하려고 행동한다.”(Y. Prigent, L’expérience dépressive, DDB, Paris 2005, p. 136)라고 말한다.

어린이의 건너편에는 어린 왕자가 이상하게 여겼던 이들, 지구라는 별에 도착하기까지 여섯 개의 별을 거치는 어린 왕자의 사연에 등장하는 왕, 허영에 빠진 사람, 술꾼, 사업가, 수학자, 가로등 켜는 사람, 지리학자들이 있어 존재의 비밀을 놓친다. 그들은 자신과 자신이 수행하는 과업에 너무 열중하느라 그렇다.

어린이는 “너의 천막 터를 넓혀라. 네 장막의 휘장을 아낌없이 펼쳐라.”(이사 54,2) 한 그대로 원 없이, 아낌없이 넓혀지고 펼쳐져야 할 시기를 산다. 예수님께서는 어른들에게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 18,3-5)하시고,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 19,4) 하시며, 어린이를 데려다가 제자들 가운데에 세우시고 그를 껴안으시고(마르 9,36),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주셨다.”(마르 10,16)

누구라도 익히 아는 “어린 왕자”는 「“내 비밀은 말이야. 그건 매우 단순해. 사람들이 마음으로 봐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거야. 본질적인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And now here is my secret, a very simple secret: It is only with the heart that one can see rightly; what is essential is invisible to the eye.)”」(어린 왕자, 제21장)라고 말한다. 어린 왕자의 저자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의 많은 성찰 가운데 노랫말의 후렴처럼 반복되는 내용 중 “나는 과연 나의 어린 시절 이후를 내가 살았는지 확실하지 않다.”(LMS 98, p. 192.)라는 말이 있다. 앙투안은 어린 시절의 영혼을 가장 큰 보물처럼 간직하여 어린 왕자를 썼다.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 작가 조르주 베르나노스Georges Bernanos는 “동심에 충실해야 합니다. 어른들은 어린 동심에 대항하여 음모를 꾸밉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복음을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G. Bernanos, Essais et écrits de combat, Gallimard, Paris 1972, p. 765)라고 말한다.

어린 왕자를 만난 앙투안은 「하나의 별, 지구라는 내 행성에, 달래야 할 어린 왕자가 있었다! 나는 그를 팔로 안았다. 나는 그를 흔들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네가 사랑하는 그 꽃은 위험하지 않아…내가 네 양에게 주둥이 망을 그려줄게…네 꽃을 위해 울타리도 그릴 거야… 나는…….”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나는 몹시 서툴렀다. 나는 그곳에 어떻게 다다라야 할지, 어디서 만나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것은 그렇게도 비밀스러운, 눈물의 땅이었다.」(어린 왕자, 제7장)라고 기록한다.

축복하시고 껴안으시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시면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어린이는 아마도……. 내 안에서, 그리고 세상에서 울고 있는 수많은 어린 왕자들을 위해 양을 그리고, 그 양의 부리에 부리망을 그리며, 어린 왕자의 장미꽃에 울타리를 치는 그런 사람일 것이다.(*이미지-구글)

※ 아기가 되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참으로 세상의 어린 왕자이셨다. 만나는 사람마다 그들에게 하늘 나라의 비밀을 알려주셨는데도 사람들은 어린 왕자가 지나온 여섯 개의 별들에 살던 이상한 사람들이었다. 본질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어린 왕자의 비밀을 그들은 끝내 알아듣지 못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그분을 이해하지 못하였으며, 오히려 그분을 향해 음모를 꾸몄고, 마침내 그분을 죽이기까지 하였다.

그렇지만 그분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끝까지”(요한 13,1) 이 세상을 사랑하셨다.

3 thoughts on “어린이·아동兒童

  1. ‘동심을 알기 위해서는 복음을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 무언가를 많이 하지 않아도 주님의 길을 잃지 않을것 같아 위로가 됩니다.

  2. 학교에 커다란 연못이 있습니다.

    우리 1학년 아이들을 데리고
    점심 때 늘 연못 부터 들려가곤 했지요.
    정말 신기한건 제 눈에 늘 똑같은 연못을
    아이들은 항상~와 하고 환호성을 떠트린답니다.

    정작 연못 보다는 아이들이 날마다
    감탄하는
    그 모습이 오히려 신기했답니다.
    어린이 같은 마음.
    그 마음이 계속 남아있도록….
    소망해봅니다.

  3. 예수님께서 어린 왕자 같다고 하신 말씀에 갑자기 세상이 아름다운 동화의 나라가 된 기분입니다. 평소에 어린왕자를 좋아하는 저로서는 이 글에서 일로 겪는 복잡한 감정의 살타래가 편하게 풀어지고 바라보게 되는 느낌입니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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