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만난 여든 넘은 할머니 수녀님께서는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니 깨끗이 빨래해서 햇볕에 널려고 가다가 땅바닥에 엎어버린 꼴이라고 한숨과 눈물을 지으셨다. 정갈하게 살자고 수녀가 되었으나 하느님 앞에 갈 날을 가늠하여 돌아보니 오직 참이신 하느님 앞에서는 하염없이 거짓이고만 지난 날들이었다는 회한悔恨이었다)
‘거짓 가假’라는 글자는 ‘거짓 가’, ‘멀 하’, ‘(어느 목적지에)이를 격’이라는 뜻과 소리를 지닌다. 가면假面, 가장假裝, 가상假像, 가정假定, 가령假令 등에 쓰이는 이 글자의 구성은 ‘사람 인人’과 ‘빌릴 가叚’가 합해져 이루어진다. 이를 풀이하려면 ‘사람 人’이야 더 말할 나위 없이 익히 아는 글자이고, 문제는 ‘빌릴 가叚’가 관건이다. 어떤 이는 이 ‘빌릴 가叚’를 놓고 농부가 자신의 농기구를 가지고 땅 주인에게 가서 땅을 빌리는 것을 나타낸 회의 글자이므로 농부가 이러저러한 농사를 지을 수 있다고 ‘꾸며낸’ 계획으로 땅을 ‘빌리는’ 상황이라 하고, 사람(人)이 말을 꾸며내는(叚) 것이 어느 정도 ‘거짓’을 담고, 남에게 빌리는 것이므로 제 것이 아니고 ‘임시, 잠시’ 남의 것을 ‘빌리다’는 뜻이 되었다고 풀이한다. 또 어떤 이는 ‘빌릴 가叚’를 가죽(尸) 털(二) 연장(그) 손(又)으로 분해하면서 사람들이 동물의 가죽 같은 것을 뒤집어쓰기 위해 동물로부터 가죽과 털을 빌려 손과 연장으로 다듬고 있는 모습이라면서 털과 가죽으로 꾸미기 위함이고 꾸몄기 때문에 가짜라는 뜻을 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가장 설득력 있는 풀이는 ‘빌릴 가叚’를 ‘층계 단段’의 속자俗字로 보면서 요즘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암벽등반처럼 언덕에 발판을 내어 손으로 잡고 한 칸씩 오르는 모양을 묘사한 것이라는 풀이이다. 그래서 이 글자가 붙게 되면 ‘오르다’, ‘타다’, ‘먼 곳에 가다’라는 뜻이 있고, 또 손을 빌리는 데서 임시나 거짓의 뜻이 있다 한다. 사전의 풀이도 『회의 문자로서 왼쪽은 벼랑을, 오른쪽은 두 손을 그려, 두 손을 이용하여 벼랑을 기어오르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이로부터 ‘빌다’, ‘의지하다’의 뜻이 나와…‘사람 인人’을 더한 ‘거짓 가假’가 나왔고, ‘빌다’, ‘가짜’ 등의 뜻으로 분화했다.(하영삼, 한자어원사전)』 한다.
거짓은 가짜이다. 파멜라 메이어Pamela Meyer라는 미국의 유명한 ‘거짓’ 연구자는 인간의 거짓말은 인생의 초기인 아기 때부터 시작해서 점점 그 빈도와 내용이 강해진다는 내용을 바탕으로 거짓말을 어떻게 식별해 낼 수 있는가를 설파한다. 거짓으로 울다 멈추면서 누가 오는지를 살펴 다시 우는 아기, 웃음으로 속내를 감추는 아기, 어른들이 얘기하는 ‘뻥’을 익혀가는 두 살배기 아이, 본격적인 거짓말쟁이가 되는 다섯 살짜리, 천연덕스럽게 거짓으로 자신을 숨기는 아홉 살, 어머니와의 5번의 대화 중 1번은 거짓말을 하는 스무 살 전후, 사회생활에 뛰어들어 한 가정의 가장이 될 때쯤에는 스팸메일, 가짜 인터넷 친구, 가짜 뉴스, 자기 취향대로 꾸며내 여론을 조작하는 매체, 부당한 개인정보 취득과 판매, 다단계, 전화 금융사기, 각종 ‘속임수’라는 전염병…등에 휩싸여서 어떤 작가가 일컬은 대로 ‘거짓말 이후’의 사회에 들어서서 내 인생의 대본을 내가 쓰지 못하고 남이 써 준 대본대로 살아간다. 어쩌면 인류가 발명한 ‘학교’라는 시스템은 남이 쓴 대본을 살아가도록 서로 속고 속이면서 사람들을 훈련하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그게 사실이라면 세계적으로 유례없이 문맹률이 낮고 교육 수준이 높은 한국 사회는 그에 비례해서 거짓의 수준도 세계적이 아닐까?
내가 어려운 일을 겪을 때 비장하고도 안타까운 표정으로 나와 함께 술잔을 기울이는 친구들도 어쩌면 자기 자신이 겪는 어려움에 대해 위로를 얻으려고 나의 고통을 이용하는 것일 수 있고, 연인들이 밀어를 속삭이는 자리의 조명이 어두워야 하는 것은 상상력이 마음껏 활개를 쳐 환상을 이룰 수 있게 하기 위함일 수 있으며, 상품의 판매원이 상품의 좋은 면만을 소개하고 약점은 감추듯이 심지어 복음을 전한다는 이들마저도 환영받고 싶어서 십자가의 고통이 아니라 낙원만을 역설할 수도 있다.
인간의 인생 자체가 그렇고 역사 역시 끊임없는 거짓과 진실의 뒤죽박죽이고 대결 국면인데도 유달리 현대에 거짓이 극성을 부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어쩌면 영상의 시대요 미디어 시대이기 때문이다. 눈을 통해 정신을 기만하기 위한 온갖 영상매체는 본성적으로 거짓으로 치장하고 거짓을 창작하면서 진짜 불행을 외면하고 가짜 행복을 추구하도록 부추긴다. 대중매체를 바탕으로 손쉬운 정보의 범람에 편승하는 익명성의 비겁이 횡행하면서는 거짓이 더 많은 세상이 되기도 한다. 고요한 호수 위의 달과 하늘의 달이 둘이어도 달은 하나이듯이 하느님은 한 분이시지만, 결코 홀로 있는 법이 없는 거짓의 하수인들은 무리를 지어 사람들을 흔들어놓는다. 그럴 때 우리는 내심 거짓인 줄 알면서도 오만가지 방식으로 거짓희망을 품고, 그래도 거짓보다는 참이 많아서 아직 인생은 살만하다는 신념이 강하게 흔들리며, 속임수와 거짓이 가장 건전한 진실로 존중을 받고 진실이 거짓으로 여겨질 때는 마약 중독자가 마약을 할 때 느끼는 행복 같은 것에 너도 취하고 나도 취한다. 그러다가 문득 약효가 떨어지는 순간이 오면 절망이 엄습한다.
세상에는 그럴듯하게 이야기를 꾸며내는 작가들이 많고 지푸라기로 굴비를 엮듯이 이것저것을 엮어내는 사람들이 참 많다. 거짓은 누군가의 입 밖으로 나오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힘이 없지만, 다른 누군가가 그 거짓을 믿는 데에 동의함으로써 그 힘이 생겨나는데, 그 힘이 강해져서 거짓이 참이 될 때는 그 거짓의 독침으로 간혹 누군가가 죽기도 한다. 그러나 거짓이 아무리 강한 척해도 정말 강하지는 않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Henry David Thoreau는 이 세상에 홍수범람을 알리는 수위 계측기 대신에 거짓 계측기나 진실 계측기를 달아보자고 하면서 『우리는 평생 몸에 맞지도 않는, 숙명적인 외투 아래 눌려 숨이 막힐 듯 살아갑니다.…물론 외투 중에서 가장 얇은 외투는 의도적인 거짓말이나 속임수입니다. 그 외투의 천은 얄팍하고 다 닳아 있습니다. 그런 외투는 촘촘히 짜여 있지 않고 엉성하게 되어있습니다. 실이 교차하는 부분에서 거짓이 끼어들 틈이 생깁니다. 그러나 진실은 씨실을 채워 넣어 튼튼한 옷감을 만듭니다.(구도자에게 보낸 편지:Letters To A Spiritual Seeker)』 한다.
신앙은 온 땅을 지배하시는 하느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는 것을 온전히 믿으면서 그분의 약속을 신뢰하는 것이다. 차가운 눈(雪)과 뜨거운 불이 공존하기 어렵듯이 하느님의 사랑 앞에 인간과 세상의 거짓이 성공할 수 없다는 믿음이다. 성경은 “거만한 눈과 거짓말하는 혀 무고한 피를 흘리는 손”(잠언 6,17)을 가진 인간의 거짓이 하느님의 사랑 앞에 설 자리가 없음을 밝히는 말씀이다. 인간이 “거짓말을 거듭하면 끝이 좋지 않다.”(집회 7,13) 하느님을 잊고 거짓을 의지하는 이들은 “불행하여라, 거짓의 끈으로 죄를 끌어당기고 수레의 줄을 당기듯 죄악을 끌어당기는 자들!”(이사 5,18)이다. 그러나 신앙인은 “행복하여라, 주님께 신뢰를 두며 오만한 자들과 거짓된 변절자들에게 돌아서지 않는 사람!”(시편 40,5)이고자 한다.(20190809 *이미지-구글)
하느님께 의지하는 마음이 저절로 가져지는게 아니기에 더더욱 은총이란 생각이 든다. 그 마음, 하느님을 만나고 싶은, 만날 수 있다는 믿음이 정말 소중한것이 뭔지를 찾고 회개하는 마음도 갖게 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