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간 화요일(요한 13,21ㄴ-33.36-38)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앉은 식탁에서 유다의 배반을 말씀하신다. 이에 베드로가 고갯짓하고 요한이 묻는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에게 빵을 적셔서 주시고, 유다는 어두운 밤 밖으로 나간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하신다. 베드로가 나서서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물으며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라 답하신다.

1. 빛과 어둠의 신비

오늘 전례의 두 텍스트(제1독서인 이사야서와 요한복음)는 ‘빛’과 ‘밤’이라는 두 가지 근원적인 상징으로 특징지어진다. 우리는 마치 창조의 시작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지만, 이번 경우에는 낮과 빛을 밤의 어둠과 가르는 것이 하느님의 행위만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라는 점이 다르다.

이사야서의 텍스트(이사 50,4-9ㄴ)는 ‘주님의 종의 두 번째 노래’이다. 이는 주님과 부름받은 이 사이의 대화로 나타나는데, 여기에는 약간의 어려움이 섞여 있다. 하느님의 ‘비전’이 자신의 실망감을 토로하는 종의 비전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종은 주님께서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은사들을 주셨음을 인정한다.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시고 당신 손그늘에 나를 숨겨 주셨다. 나를 날카로운 화살로 만드셔서 당신 화살통에 넣어 두셨다.” 그러나 부름받은 이는 사명을 완수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가 선포하도록 부름받은 ‘말씀’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어려움 앞에서 주님은 종을 위로하시는 대신, 오히려 그 사명의 지평을 넓히신다. 그를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시고 땅끝까지 구원을 선포하는 이로 부르신다. 이는 훗날 안티오키아에서 바오로와 바르나바에게 일어난 일이기도 하다. 유다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자, 그들은 기쁨에 넘쳐 사도들을 맞이하는 다른 민족들에게로 향했다.(사도 11장 참조)

이 빛나는 이미지 안에서 우리는 유다의 비극적인 선택 이후, 당신이 아버지의 뜻을 완수했음을 알고 계셨던 예수님의 말씀을 발견한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하느님께서도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렇게 하실 것이다.” 하느님 종이 주님의 뜻에 온전히 일치하는 이 모습 안에는 거대한 빛의 신비가 자리 잡고 있다. 이 일치야말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조건이 된다.

하지만 거기에는 어둠과 밤도 존재한다.

그 밤은 예수님을 배반하기로 선택한 유다가 빠져든 밤이다. 또한 배반의 예고 앞에서 서로를 바라보던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처한 밤이기도 하다. 나아가 예수님의 떠나심을 듣고도 자신의 취약한 마음을 보지 못했던 베드로의 밤이다. 그 마음은 결국 그날 밤 그를 예수님을 부인하는 길로 이끌었다.

빛과 어둠의 신비, 영광과 배반의 신비. 다가오는 파스카는 우리 모두에게 어둠에서 빛으로 건너갈 것을 요구한다. 제자들에게 문제는 어둠 속에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부활의 빛으로 인도받기 위해 예수님을 신뢰하며 그분의 인도를 따르느냐에 달려 있다. 그곳에는 더 이상 밤도, 고통도, 슬픔도, 울음도 없으며 하느님과 함께하는 평화와 기쁨만이 있을 것이다.(출처: parolacondivisa.blog)

2. 어둠의 심연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우리가 어릴 적 교리 수업을 들을 때, 아무도 유다 역할을 맡고 싶어 하지 않았다. 아마도 이 질문이 주는 당혹스러움 속에 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모두는 누가 범인인지 알고 있었지만, 설령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결국 우리 각자가 범인이라는 사실이 모두의 눈앞에 드러날까 봐 두려워했다. 제자들이 배반자의 이름을 알아내려고 과도하게 호기심을 보인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그 이름을 알아내기 위해 ‘사랑받던 제자’라는 카드까지 꺼내 든다.

“제자들은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몰라 어리둥절하여 서로 바라보기만 하였다.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아 있었는데, 그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였다. 그래서 시몬 베드로가 그에게 고갯짓을 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람이 누구인지 여쭈어보게 하였다. 그 제자가 예수님께 더 다가가,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 하고 대답하셨다.(요한 13,22-26)

우리가 만약 이 이야기의 단순한 몸짓에만 머문다면, 예수님께서 직접 빵 조각을 건네주심으로써 배반자를 명확히 지목하셨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성사적 관점에서 보자면, 예수님은 유다에게 분명한 친밀함의 몸짓을 보여주신다. 그러나 이 친밀함은 그에게 구원이 되는 대신 ‘어둠의 심연’이 되고 만다.

”빵을 적신 다음 그것을 들어 시몬 이스카리옷의 아들 유다에게 주셨다. 유다가 그 빵을 받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요한 13,26ㄴ-27)

너무나 자주 우리는 그리스도교적 관습을 구원이 아닌 ‘부적’처럼 여기며 스스로 안전하다고 느낀다. 매일 성체를 모시거나 기도를 바치기 때문에 당연히 안전하고 올바른 편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탄은 성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특히 사람이 진지하게 회개하기로 결심하지 않은 채 성사를 대할 때 더욱 그러하다. 오히려 역설적으로, 진정한 회개의 갈망 없이 성사에 다가가는 것은 우리를 지켜주기는커녕 성 바오로의 말처럼 “자신의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참조. 1코린 11,27-29)이 될 뿐이다.(루이지 마리아 에피코코Luigi Maria Epicoco 신부)

3. 섬김 안에 항구하십시오

우리가 들은 이사야의 예언은 메시아와 구원자에 대한 예언이기도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과 하느님의 백성, 곧 우리 각자에 대한 예언이기도 합니다. 본질적으로 이 예언은 주님께서 당신의 종을 모태에서부터 선택하셨음을 강조합니다. 두 번이나 그렇게 말합니다.(참조. 이사 49,1) 당신의 종은 시작부터, 태어나기 전부터 선택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백성도, 우리 각자도 태어나기 전에 선택되었습니다. 우리 중 누구도 세상에 우연히 떨어진 존재가 아닙니다. 누구나 운명을, 하느님의 선택이라는 자유로운 운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하느님의 종이 되는 운명, 곧 섬기고 건설하고 세우는 사명을 띠고 태어났습니다. 그것도 모태에서부터 말입니다.

야훼의 종이신 예수님은 죽기까지 섬기셨습니다. 그것은 패배처럼 보였지만, 그것이 바로 섬기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삶에서 취해야 할 섬김의 방식을 강조합니다. 섬기는 것은 자신을 내어주는 것, 타인에게 자신을 주는 것입니다. 섬기는 것은 섬김 그 자체 외에 자신을 위한 어떤 이득도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섬기는 것이 곧 영광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당신 자신을 비우기까지,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섬기는 것이었습니다(필리 2,8 참조).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종이십니다. 하느님의 백성 역시 종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이 이러한 섬김의 태도에서 멀어질 때, 그 백성은 배교하는 백성이 됩니다. 하느님이 주신 소명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섬김의 소명에서 멀어질 때,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멀어집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랑들, 때로는 우상 숭배적인 사랑들 위에 세우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를 모태에서부터 선택하셨습니다. 삶에는 넘어짐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죄인이며 넘어질 수 있고, 실제로 넘어졌습니다. 오직 성모님과 예수님만이 죄가 없으실 뿐,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나를 선택하시고 종으로 기름 부으신 하느님 앞에 서는 태도입니다. 그것은 베드로처럼 용서 청할 줄 아는 죄인의 태도입니다. 베드로는 “주님, 저는 절대로 당신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맹세했지만, 닭이 울자 울었습니다. 그는 회개했습니다(마태 26,75 참조). 미끄러지고 넘어졌을 때 용서를 청하는 것, 이것이 종의 길입니다.

반면, 자신이 넘어졌음을 깨닫지 못할 때, 그릇된 열정이 우상 숭배로 이끌 만큼 그를 사로잡을 때, 그는 마음을 사탄에게 열어주어 밤으로 들어갑니다. 그것이 유다에게 일어난 일입니다.(마태 27,3-10 참조)

오늘 섬김에 충실하신 종, 예수님을 생각합시다. 그분의 소명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 백성의 일원인 우리 각자를 생각합시다. 우리는 종입니다. 우리의 소명은 섬기는 것이지, 교회 안의 내 자리를 이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섬기십시오. 항상 섬김의 현장에 머무십시오.

섬김 안에 항구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합시다. 때로는 미끄러지고 넘어지겠지만, 적어도 베드로가 흘렸던 그 눈물만이라도 흘릴 수 있는 은총을 청합시다.(교황 프란치스코, 2020년 4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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