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간 수요일(마태 26,14-25)

유다 이스카리옷이 수석 사제들로부터 은돈 서른 닢을 받고 예수님을 넘길 기회를 노린다. 제자들은 파스카 축제 지낼 곳을 예수님께 여쭙고, 예수님께서는 ‘아무개 집’을 지정하신다. 식탁에 앉으신 예수님께서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라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저마다 “저는 아니겠지요?” 하며 근심한다. 유다 역시 예수님께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여쭙는데, 예수님께서는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라고 대답하신다.

1.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제1독서인 이사야서 50,4-9ㄴ에 실린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는 주님께서 제자로 양성하신 부름받은 이가 겪게 될 거대한 시련의 상황을 묘사한다. 이 종은 박해와 폭력을 겪게 되지만, 주님께서 도와주실 것을 확신하며 온전히 그분께 신뢰를 둔다.

오늘 복음에서는 유다의 배반이 완결된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였으나 결국 그분을 적들의 손에 넘기기로 결정한 한 인간 마음의 거대한 신비이다. 유다의 배반에 대한 해석은 넘쳐나지만, 복음서는 우리의 호기심을 해결하는 데 관심이 없으며 매우 간결하게 서술할 뿐이다. 어떤 이들은 유다가 배반을 통해 예수님이 악에 맞서 강력한 하느님의 메시아로 드러나도록 등을 떠밀려 했다고 주장한다. 우리 역시 하느님께서 정하신 길을 걷기보다, 하느님을 우리 방식대로 끌고 가려는 유혹에 빠지곤 한다.

이 복음 대목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제자 중 누군가 배반할 것이라는 예고 앞에서 제자들이 각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 혹시 저입니까?”라고 묻는다는 사실이다. 유다를 심판하는 태도보다 제자들의 이 진솔한 자문이 우리에게 더 유익해 보인다.

오늘 우리도 자문해야 한다. 우리 역시 스승이자 주님이신 분을 배반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우리는 이사야서의 종처럼, 길이 험난해지고 반대가 거세질 때도 뒤로 물러나지 않고 귀를 열어 하느님을 향한 신뢰를 지켜낼 준비가 되어 있을까?

특별히 2020년 팬데믹 당시 이 성경 구절 중 한 문장이 큰 울림을 주었다. “나의 때가 가까웠으니 내가 너의 집에서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축제를 지내겠다.”(마태 26,18) 비록 전염병으로 인해 많은 제약 속에서 파스카를 지냈으나, 주님께서 친히 우리 집으로 오셔서 파스카를 지내려 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주님께서 주실 많은 선물을 받기 위해 우리도 우리 마음의 집을 열어드려야 한다.(출처: parolacondivisa.blog)

2. 무상성(Gratuity)을 배우기

“그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 이스카리옷이라는 자가 수석 사제들에게 가서,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은돈 서른 닢을 내주었다.”(마태 26,14-15)

사랑에 가격을 매길 수 있을까?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랑하는 대신 더 높은 가격을 부르는 쪽을 선택할 때마다 사랑을 거래하곤 한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편의(Convenience)’일 뿐이다. 우리는 편의에 따라 하느님을 이용하고, 친구를 이용하며, 이웃을 이용한다. 상대를 사랑할 사람이 아니라 ‘사용할 도구’로 보기에 우리는 사랑할 능력을 잃어버린다. 이것이 유다의 진짜 문제이며, 우리 각자의 심각한 문제이다.

우리가 ‘무상(거저 줌)’의 사람이 되지 않는 한 진정한 회개는 불가능하다. 대가 없이 사랑하고, 대가 없이 곁에 머물며, 대가 없이 기도해야 한다. 그리스도에게조차 가격을 매겼던 유다의 ‘상업적 마인드’를 머리에서 지우지 않는 한 파스카는 불가능하다. 대신 더음과 같이 말하는 무상성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주님, 제 기도를 하나도 들어주지 않으셔도 저는 당신을 믿고 사랑합니다. 당신을 향한 제 사랑은 증거나 결과가 필요 없습니다. 그냥 사랑할 뿐입니다.”

이런 무상성에 도달할 때, 어쩌면 우리의 기도는 응답받을 것이다. 그때 우리는 기회주의적인 배반자가 아니라 자유로운 사람으로서 응답을 받는 것이다. 이 엄중한 말씀은 유다만을 향한 것이 아니다. 우리 안에 살고 있는 배반자, 우리 사고방식 속에 교묘히 숨어 있는 기회주의자를 향한 것이다. 유다는 우리 각자의 거울이다. 유다를 가혹하게 비난할수록 우리는 자신을 더 숨기려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 역시 조금은 유다와 닮았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할 때, 비로소 자비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루이지 마리아 에피코코Luigi Maria Epicoco 신부)

3. 유다야, 너 어디 있느냐?

성 수요일은 교회가 유다의 배반을 묵상하는 ‘배반의 수요일’입니다. 유다는 스승을 팔아넘깁니다.

사람을 파는 행위를 생각할 때, 우리는 과거 아프리카 노예무역이나 최근 다에시(Daesh)에 팔려 간 야지디족 소녀들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멀리 볼 필요 없습니다. 오늘도 사람을 파는 행위는 매일 일어납니다. 정당한 임금을 지불하지 않고 착취하며 형제자매를 파는 유다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가장 소중한 것을 팔기도 합니다. 편안함을 위해 부모님을 양로원에 모셔두고 다시는 찾아가지 않는 것, 그것도 파는 행위입니다. “제 어머니도 팔아먹을 놈”이라는 속담이 있듯, 사람들은 정말 그렇게 합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요? 예수님은 하느님과 돈, 이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루카 16,13 참조)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섬겨 자유로운 예배와 봉사의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돈을 섬겨 돈의 노예가 될 것인가. 많은 이가 하느님과 돈을 동시에 섬기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결국 하느님을 섬기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돈을 섬기게 됩니다. 그들은 사회적으로는 결점 없어 보이지만 탁자 밑에서 사람을 거래하는 숨겨진 착취자들입니다.

유다는 떠났지만, 제자들을 남겼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 악마의 제자들입니다. 유다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아마 평범한 소년이었고 하느님을 향한 열망도 있었기에 부르심을 받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제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이사야서에서 읽은 것처럼 제자의 입과 제자의 마음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는 약했지만, 예수님은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돈을 좋아했습니다. 라자로의 집에서 마리아가 비싼 향유를 발라드릴 때 그는 가난한 이들을 걱정하는 척했지만, 요한은 그가 ‘도둑’이었기 때문이라고 폭로합니다. 돈에 대한 집착이 그를 도둑질로, 그리고 배반으로 이끌었습니다. 돈을 너무 사랑하면 더 갖기 위해 배반하게 됩니다. 이것은 정해진 이치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예수님께서 그를 한 번도 “배반자”라고 부르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배반당할 것이라고는 하셨지만, 그에게 직접 “이 배반자야, 나가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를 “친구”라 부르며 입을 맞추셨습니다. 이것이 유다의 신비입니다. 베즐레 성당의 기둥 조각에는 목을 맨 유다를 어깨에 메고 가는 착한 목자 예수님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유다가 지옥에 갔을까요? 저는 모릅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여전히 그를 “친구”라고 부르시는 음성을 들을 뿐입니다.

악마는 신용 없는 지불자입니다. 모든 것을 약속하지만 결국 당신을 절망 속에 버려두고 목을 매게 합니다. 탐욕과 예수님을 향한 사랑(사랑으로 완성되지 못한 사랑) 사이에서 고통받던 유다의 마음은 사제들에게 돌아가 구원을 청하지만, 그들은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며 그를 절망에 빠뜨립니다.

이 세상의 구조화된 유다들, 사람을 착취하는 이들을 생각합시다. 그리고 우리 각자 안에 있는 ‘작은 유다’를 생각합시다. 의리와 이익 사이에서 선택해야 할 때, 우리에게도 배반하고 팔아넘길 능력이 있습니다. 돈과 안락함에 이끌려 주님을 팔아버릴 가능성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유다야, 너 어디 있느냐?” 이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던져봅시다. “내 안에 있는 작은 유다야,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교황 프란치스코, 2020년 4월 8일)

※ 더 읽기: 유다의 구원?   /  유다 이스타리옷   /  유다를 어깨에 지신 예수님 

답글 남기기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
*

이 사이트는 Akismet을 사용하여 스팸을 줄입니다. 댓글 데이터가 어떻게 처리되는지 알아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