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몽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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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r Sogno a Venezia | Wall Art | 3+1

어떤 시험장에서 시험지에 답을 써야 했다. 여럿이 함께 있는 시험장이었는데, 각양각색의 무더기로 놓인 종이들 가운데서 자기가 원하는 시험지를 골라 서술형 답을 쓰는 방식이었다. 잠시 미적거리다 종이 더미에 다가갔을 때, 내가 좋아하는 양면 백지는 이미 모두 사라지고 여러 종류의 이면지만 잔뜩 남아 있었다. 답을 어떻게 써야 할지는 알고 있었고, 대략 어떤 순서로 써 내려갈지도 계산해 두었다. 다만 마땅한 종이를 찾기 위해 이면지들을 뒤적이는 동안 시간이 흘렀다. 어떤 것은 누렇게 바랬고, 어떤 것은 한쪽이 찢어져 있었으며, 또 어떤 것은 이미 글이 적혀 있었고, 어떤 것은 크기가 지나치게 작았다.

마침내 아주 깨끗하고, 다른 종이들보다 약간 길쭉해 마음에 드는 이면지를 발견했다. 두 장을 추켜들고 자리로 돌아와 답을 쓰려는 순간, 머릿속에 세워 두었던 답의 골격 가운데 두 번째 항목만 떠오를 뿐, 첫 대목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곧 떠오르겠지.’ 스스로를 다독이며 이런저런 생각을 더듬고 있었는데, 어느새 마감 시간이 임박해 있었다. 알고 있는 답을 한 줄도 써 보지 못한 채 시험이 끝나 버릴 것 같다는 안타까움과 속상함 속에서 그만 잠이 깼다. 꿈이었다.

때로는 ‘맹’이라 발음하며 ‘캄캄하다’를 뜻하기도 하는 ‘꿈 몽夢’이라는 글자를 풀어보면, ‘풀 초艹’(눈꺼풀) + ‘눈 목罒’(눈) + ‘덮을 멱冖’(덮다) + ‘저녁 석夕’(밤)으로 해석되곤 한다. 글자의 생김을 기억하기 쉽게 풀어낸 설명으로는, “침대에 누워 잠들었다가 악몽에 놀라 눈을 부릅뜨고 머리털이 곤두선 사람의 모습”을 본뜬 것이라는 대중적 풀이가 전해진다. 그러나 사전적 설명에 따르면 ‘저녁 석夕’이 의미부이고, 생략된 형태의 ‘어두울 몽瞢’이 소리부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이 글자는 본래 침상(爿)에 누운 사람(人)의 모습에서 눈(目)이나 눈꺼풀(눈썹 미眉)을 강조해 그린 데서 연유했다는 설명이 일반적이며, 혹자는 침상에 누운 사람이 손으로 눈을 가린 모습이라 보기도 한다.

현몽現夢(예지몽豫知夢), 계시몽啓示夢, 길몽吉夢, 흉몽凶夢, 태몽胎夢, 허몽虛夢, 자각몽自覺夢, 백일몽白日夢, 비몽사몽非夢似夢, 여진여몽如眞如夢, 일장춘몽一場春夢, 동상이몽同床異夢, 동상각몽同床各夢, 호접지몽胡蝶之夢, 삼도지몽三刀之夢, 나부지몽羅浮之夢, 남가일몽南柯一夢, 무산지몽巫山之夢 등, 꿈의 갈래와 관련 고사성어는 참으로 많다. 꿈은 젊은이들에게 희망이자 낭만이며 추구의 대상이지만, ‘꿈 몽夢’이라는 글자는 세월 깊은 한자 문화권에서 종종 부질없음과 무상無常의 정서를 품어 왔다.

성경, 특히 구약에서는 인간이 쉽게 알아들을 수 없는 하느님의 계시가 ‘꿈’을 통해 전해지는 장면이 수없이 등장한다. 그러나 신약의 복음서에서는 마태오복음에서만 예수님의 탄생을 둘러싼 하느님의 계시(마태 1–2장), 그리고 예수님의 판결을 앞두고 빌라도의 아내가 꿈으로 경고하는 대목(마태 27,19)을 제외하면, 꿈에 관한 언급이 거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의 꿈은 계시이며, 복음은 계시로 이루어진 실제라 할 수 있다.

꿈은 아직 오지 않은 미지이며 미래이고, 확신이며, 눈을 감기만 하면 누구에게나 허락되는 무상의 영역이다. 모두가 같은 꿈을 꾸지는 않지만, 대체로 삶을 견디게 하는 장밋빛 낭만이기도 하고, 동시에 가시가 무성한 가시밭길이기도 하다.

현실과 지식과 역사를 넘어 나를 열정으로 채근하는 꿈은 분명 힘이 있다. 그러나 때로 꿈은 나를 그 안에 가두어 소진시키는 위험한 자위行爲가 되기도 한다. 좁쌀밥 한 공기가 다 익기도 전의 찰나처럼, 구름이 일었다 사라지듯 허상이고 부질없는 한바탕이다. 망망대해에 떠 있는 알맹이 없는 껍질처럼, 떠 있다고 말하기도 애매한 떠 있음이다.

하느님 편에서 보자면, 잠든 인간을 위해서도 쉬지 않고 창조하시는 ‘세 번 거룩하신 분’의 깨어 있음이 있고, 인간 편에서는 꿈에라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욕망과 꿈에서조차 더럽지 않기를 바라는 소망이 있다. 앞뒤가 맞지 않아 사람들이 정신착란이라 부르더라도, 꿈은 간절한 소망과 짝을 이루어 우주의 섭리 속에서 현실로 다가오는 듯한 착각 아닌 착각을 낳는다. 그 과정에서 꿈은 점차 현실이 되어 나를 강화하는 신화이고 이유이며 자유이며 용기가 된다.

꿈의 가까운 말은 소망이나 열정이고, 반대편에는 두려움이 있다. 간절한 소망과 짝을 이루었더라도 ‘반드시 이루어야 한다’는 두려움이 소망을 압도할 때, 그것은 이미 꿈이 아니다. 반대로 소망이 두려움을 넘어설 때, 평범한 사람은 비범한 사람이 된다. 꿈이라는 선택과 결정의 문턱에서 두려움과 망설임은 핑계와 희생양을 찾아 두리번거린다. 꿈은 성취와 와해 사이를 오가는 리듬이다. 화려한 성취가 주는 숨 가쁜 떨림은 하루하루를 새롭게 하지만, 고통과 체념, 비겁함으로 치장된 와해는 우울하다. 그런데도 사람은 자기 미화를 찾아내는 재주가 있어, 울지 않고도 슬픔을 견디고 때로는 즐길 줄 안다. 그것이 꿈이 남기는 교훈이다.

꿈은 말과 기호와 시간이 어우러지는 유희이며, 꿈꾼 것과 꿈조차 꾸지 못한 것 사이의 간극이다. 길 떠난 이에게 바람이라도 전해주고 싶은 편지이며, 실현과 좌절 사이에서 좌절 쪽으로 기운 저울이고, 꿈인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는 미지未知다. 꿈은 아픔을 피하면서도 아픔을 즐기는 불장난이기에 운명의 올가미이자 함정이며, 되돌릴 수 없는 심연을 건너버린 뒤의 후회이기도 하다. 타인의 강요와 압박으로 가장되기도 하지만, 결국은 혼자만의 결정이고 책임이다.

꿈은 ‘꾸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과 ‘끝까지 밀고 가는’ 사람의 차이를 드러낸다. 무엇이 되려는 시도가 아니라 이미 무엇으로 살아가고 있는가의 문제다. 꿈이었을까 싶은 날들을 돌아보며 내뱉는 말이자, 결국 꿈 밖으로 되돌아가 버린 다수의 일상이다. 그럴 때 꿈은 차마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것들을 혼자서만 즐기는 유희가 되고, 내 꿈에 우주의 음모가 협력한다고 믿는 과정이 된다. 꿈에 대한 믿음이 사라질 때, 그리고 섭리가 나를 다른 길로 이끌 때에만 꿈은 비현실이 된다.

꿈은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며, 모든 사랑 이야기가 그러하듯 하나의 사랑이 사라질 때 다른 사랑이 찾아오는 방식이다.

무슨 꿈인지도 모른 채 살아가기보다, 나를 잃는 아픔을 감수하겠다는 선택이며, 이쪽과 저쪽을 넘어 사랑만 남는 지점이다. 참으로 다루기 어렵고 이해하기도 쉽지 않으며, 말로 온전히 해명할 수도 없다.

꿈은 낯선 나라에서도 모국어로 꾸어지는 것이고, 밤의 언어이며, 멈출 수 없는 것이다. 시간이 없다고, 삶이 모험임을 포기하겠다고 말하는 순간 꿈은 죽는다. 꿈이 죽으면 결국 나도 서서히 썩어간다. 꿈속에서도 깨어 있을 때의 기억으로 숨 쉬듯, 죽은 이도 그에 대한 기억으로 사랑할 수 있게 하는 힘이 꿈이다. 내 안의 이상이 시들고 날개가 꺾일 때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해 헤매는 방황이며, 매일 밤 세상의 소음과 이미지의 유혹에 방해받는 연약함이다. 그래서 꿈은 몸과 감정과 영혼을 함께 돌보지 않으면 살 수 없다.

꿈은 평생 온 세상을 떠돌며 살고 싶은 욕망이기도 하고, 아파트의 밝은 전등 아래보다 산사의 촛불 아래에서 더 친숙한 무엇이기도 하다. 나의 꿈에 수많은 사람이 따라 죽을 수도 있기에 내가 우는 것이고, 생산하는 사람에게는 목숨과 책임을 요구하는 숙명이다. 달콤하면서도 씁쓸하다. 꿈은 눈앞에 펼쳐진 한없는 바다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바라보는 일이자, 낭만과 이상을 소비와 일회성으로 바꾸려는 악마의 장난이기도 하다. 그래서 반드시 대가를 요구하는, 몹시 위험한 것이다.

꿈은 부모가 읽어주는 동화 속에서 잠들어 자라는 어린아이이며, 정말로 내가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무언가를 찾아 의지와 역량을 단련하는 과정이다. 몇 해를 두고 누군가를 찾아 헤매는 갈망이지만, 막상 마주했을 때의 실망이거나, 다시 다른 누군가를 찾으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도달한 자리에서 애초에 찾던 것과 얼마나 멀어졌는지를 깨닫는 자각이며, 엄마를 잊을 즈음에야 마주하게 되는 현실이다. 끝 간 데 없는, 끊임없이 변주되는 존재—그것이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