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21,25-28.34-36(대림 제1주일 ‘다’해)

전례력으로 새로운 새해를 시작하는 대림 제1주일이다.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시기인 대림절待臨節(기다릴 대·임할 림/임, 대림시기)을 영어로는 Advent라 한다. 전례력을 따라 매주 주일을 거듭하면서 교회는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신비, 예수님의 탄생부터 시간의 끝에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주님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의 온 생애에 담겨있는 구원의 역동성을 거행하고 기념한다. 새로이 맞은 이 ‘다’해에는 루카복음을 따라갈 것이다. 루카복음은 우리 가운데에 오신

요한 18,33ㄴ-37(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나’해)

우리는 전례력을 따라서 마르코복음을 들었던 ‘나’해의 마지막 주일에 도달했다. 지난 주일에 마지막으로 들은 마르코복음의 “사람의 아들”이 다시 오심에 관한 선포는(참조. 마르 13,26) 우리를 행복하게 했다. 주님께서 영광중에 어서 다시 오시기를 우리가 간절히 희망하고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다시 오시는 영광의 주님을 기리면서 ‘나’해를 마감하는 전례 복음으로서 네 번째 복음, 그중에서도 나자렛 사람 예수의

마르 13,24-32(연중 제33주일 ‘나’해)

오늘 복음으로 ‘나’해의 전례에서 마르코복음 낭독을 마감한다. 오늘 복음 말씀은 ‘종말에 관한 예고문’ 형식인 13장의 마지막으로서 예수님의 공생활 말기, 수난과 죽음이 임박한 중에 가르침과 위로 및 당부를 하시는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13장의 서두에서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마르 13,1) 성전이 대단하다고 말씀드리자 예수님께서는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하시며 성전이 “다 허물어지고 말 것”이라고

마르 12,38-44 또는 12,41-44(연중 제32주일 ‘나’해)

오늘 복음의 전반부에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과 교만을 향해, 어찌 보면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는 모습을 향해, 혹독하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다. 그러나 그 안에는 ‘의롭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가르침이 담겨있으므로 그저 비판과 비방으로만 끝나지 않기 위해 지혜로운 해석이 필요한 대목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1.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 율법 학자들은 어린

마르 12,28ㄱㄷ-34(연중 제31주일 ‘나’해)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과 부활에 관한 논쟁을 벌였는데(참조. 마르 12,18-27), 이렇게 “토론하는 것을 듣고 있다가 예수님께서 대답을 잘하시는 것을 보고”(마르 12,28) 예수님의 지혜에 감탄한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마르 12,28) 사실, 이 질문은 예수님 당시 종교 분야에서 상당히 널리 알려진 논제였다. 당시 유다인들은 바빌로니아의 탈무드에

마르 10,46ㄴ-52(연중 제30주일 ‘나’해)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른바 예수님의 예루살렘 상경기, 곧 사형 선고를 받으시고 죽음에 이르시게 되는 길을 가시는 동안 제자들에게 이러저러한 여러 가르침을 주시면서 당신을 따르던 이들과 당신께서 형성하신 공동체 양성 이야기를 오늘 복음으로 마감한다. 마르코복음 10장의 오늘 마지막 대목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축제의 분위기에서 군중들이 예수님을 “다윗의 나라”, 다윗의 자손, 곧 메시아로 열렬히 환영하는 가운데(참조. 마르 11,7-11)

마르 10,35-45 또는 10,42-45(연중 제29주일 ‘나’해)

※ 전교주일을 지내는 곳에서는 http://benjikim.com/?p=11823 에서 별도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음 ———————— 예수님의 세 번째 수난예고가 이루어진 직후에 열두 사도 중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다가와 특별한 청을 드린다. 마르코가 전하는 바에 따를 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중에 세 번에 걸쳐 당신께서 장차 받으실 수난을 예고하셨는데, 그 예고 뒤에 매번 제자들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엉뚱한 반응을

마태 28,16-20(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전교주일 ‘나’해)

오늘은 연중 제29주일이나 전교주일이므로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를 드릴 수 있다.(교황 비오 11세, 자의 교서 Romanorum Pontificium, 1922년 5월 3일, 인류복음화성 총회 결정, 1992년 4월 27-30일) 우리나라는 전교 지역이기 때문에 인류복음화성 총회의 결정에 따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를 드린다. 교회는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라는 그리스도의 이 장엄한 분부에 따라, 신자들의

마르 10,17-30 또는 10,17-27(연중 제28주일 ‘나’해)

지난주 복음이 창조주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어” “둘이 아니라 한 몸”이 되어 살아가도록 마련하신 혼인 계약의 아름다움과 그에 관한 하느님의 의도에 관한 내용(참조. 마르 10,6-9)이었다면, 이번 주 복음은 그렇게 형성된 가족일지라도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상대화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혼인과 가정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상적인 길이라면, “나(그리스도)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마르 10,29) 실제 열두 제자들에게

마르 10,2-16 또는 10,2-12(연중 제27주일 ‘나’해)

복음의 전반부에서 몇몇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조상들이 이혼 가능성을 허락한 경우를 두고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며 시비를 걸어와 예수님과 논란을 일으킨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이혼을 반대하는 것이 부당하며, 그렇게 되면 율법을 준수하지 않는 상황이 된다는 것처럼 몰아붙인다. 이 논쟁은 이미 당시 샴마이Shammai라고 하는 엄격주의자들(간음의 경우 이외에는 이혼 절대 불가)과 힐렐Hillel이라고 하는 자유주의자들(어떤 이유라도 이유가 닿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