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

‘배(腹)를 그러안고(抱) 고꾸라져 넘어질(倒) 정도로 몹시, 끊어지게(絶) 웃는다’는 뜻으로 ‘포복절도抱腹絶倒’라는 말이 있다. 이를 두고 누군가가 유식함을 뽐내느라 ‘포복졸도抱腹卒倒’라고 적어놓은 것을 보고 사람들은 한 번 더 웃었다. 세상을 살다 보면 포복절도할 만큼 웃을 일이 그리 많지는 않다. 그래도 조용한 미소라도 자주 띠며 살아야 한다. 삶이 때로는 무겁고 팍팍할지라도, 웃음은 마음을 가볍게 하고 영혼을 숨 쉬게 한다.
봉헌생활을 하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웃음은 수도자의 삶에서 결코 사치가 아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슬픈 수녀는 나쁜 수녀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하느님께 봉헌된 삶은 근본적으로 기쁨의 삶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성인은 영혼을 뛰놀게 하고 은총의 빛을 향해 마음을 열어 두는 중요한 영적 도구로 웃음을 이해해 왔다. 성경은 “내 마음 즐겁고, 영혼은 봄놀고, 육신마저 편안”하리라 노래한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길”이며 “하느님을 모시고 누리는 흐뭇할 기꺼움이자 하느님 오른편에서 영원히 누릴 즐거움”의 원형이라 한다.(참조. 시편 15,9.11 최민순 역)
가톨릭 전통은 종종 그 어조가 진지하고 엄숙하지만, 기쁨과 웃음의 필요성을 결코 외면하지 않는다. 사막교부들의 전승에서는 “형제여, 당신의 입에 미소가 있다면 당신의 영혼에도 평화가 있다.”라는 말을 전해 준다. G.K. 체스터턴은 “천사들이 날 수 있는 이유는 자기 자신을 가볍게 여기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자신을 지나치게 무겁게 여기지 않으면서 웃음으로 부풀어 오른 가벼운 마음은 우리가 삶의 사소한 짐들을 넘어, 정말로 중요한 가치들과 조화를 이루며 살 수 있도록 도와준다. 천박하거나 경박한 웃음이 아니라면, 웃음은 거룩함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룩함의 징표일 수 있다.
‘기쁨의 사도’로 불리는 성 필립보 네리는 장난기 넘치는 영성으로 유명하다. 그의 기쁨은 전염성이 강했고, 그의 농담은 종종 긴장된 분위기를 부드럽게 풀어주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죄를 피하는 방법을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당신이 겪는 유혹 때문에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우리에게 어느 덕을 주고자 하실 때, 종종 그 반대되는 악덕에 먼저 유혹받도록 허락하시기도 합니다.” 그는 이렇게 유쾌한 어조로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을 너무 심각하게 여기지 말라고, 적어도 늘 그렇게 살지는 말라고 일깨워 주었다. 기쁨이야말로 사람들을 하느님께 더 가까이 이끄는 강한 전염성을 지니고 있음을 그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웃는 예수님의 그림을 가끔 보게 된다. 그렇다면 복음서 안에는 우리를 웃게 하는 장면이 있을까? 복음서에서 ‘웃음’을 직접 언급한 구절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루카 6,21)라는 말씀은 있지만, 이는 고통받는 이들을 위로하는 약속의 말씀이다. 오히려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루카 6,25)이라거나 야고보 서간에서 “탄식하고 슬퍼하며 우십시오. 여러분의 웃음을 슬픔으로 바꾸고 기쁨을 근심으로 바꾸십시오.”(야고 4,9)라는 구절을 보면 마치 웃음을 경계하는 듯한 인상마저 받는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서를 읽으면서 웃음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지 않다. 그러나 성경의 서사 안에는 분명 장난스럽거나 반어적인 요소들이 숨어 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에서 나타나엘은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46)라며 냉소적으로 말한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요한 1,47)라고 말씀하신다. 나타나엘의 직설적인 태도를 기분 좋은 재치로 받아들이시는 듯한 이 미묘한 반전은, 예수님께서 인간적인 재치와 유머를 두려워하지 않으셨음을 암시한다.
성경은 단순한 희극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지만, 그 안에는 비극적인 현실 속에서도 웃음과 눈물이 함께 어우러지는 희극적인 요소가 함께 어우러지는, ‘트래지코믹(tragicomic)’한 장면들이 적지 않다. 더 깊은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 등장하는 아이러니(irony)와 반어법 역시 곳곳에 숨어 있다.
그리스도의 사명은 분명 엄중했지만, 그분은 심오한 단순함으로 메시지를 전하셨다. 때로는 약간 과장되고 엉뚱해 보이는 비유를 통해 진리를 드러내기도 하셨다.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고 나서는 사람의 비유가 그렇다.(참조. 마태 7,3-5) 이 비유는 처음에 다소 우스꽝스럽게마저 느껴질 수도 있지만, 바로 그 과장된 이미지 덕분에 우리의 위선을 정확히 비추어 준다.
「죽기 위한 시간은 항상 있으나 웃기 위한 시간은 늘 부족하다. 웃음과 조화調和, 웃음과 평화, 웃음과 성덕聖德은 언제나 가까이에서 손을 맞잡는다. 조화와 평화, 성덕이 온 세상 곳곳에서 사라져 가고 있을 때, 웃음이 그것들을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다.(R. Kern 모음, 사막교부들의 재치와 웃음, 김건중 역, 돈보스코미디어, 2001년, 서문에서)」
웃음은 지혜롭게 사용될 때 은총으로 나아가는 길이 될 수 있다. 시편은 “우리 입은 웃음이 가득하고, 흥겨운 노래가락 혀에 넘쳤나이다.”(시편 125,2 최민순 역)라고 노래한다. 성경 구절 곳곳에 농담이 흩어져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우리는 그 안에서 우리를 지탱해 주는 깊은 기쁨을 발견한다. 그리고 때로는 작은 웃음 하나가 우리의 마음을 하늘로 들어 올리는 가장 직접적인 길이 될 수도 있음을 안다. 거룩함은 얼굴을 굳히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마음이 자유로워지는 데서 시작한다. 웃음은 하느님 창조의 선함에 대한 동의이다.
마음을 드높이(Sursum cord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