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 6,1-6(연중 제14주일 ‘나’해)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마르 6,4) Christ in silence by Odilon Redon

전도 여행을 나선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고향 나자렛으로 가신다. 이미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던 많은 이들이 주시하며 예수님을 관찰한다. 고향 사람들은 자기들이 지닌 선입견, 천한 노동 계급이라는 예수님의 출신 배경, 그 배경을 잘 안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거부하고 못마땅하게 여긴다.

오늘 복음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일상생활 안에서 우리의 습관적인 태도에 관해 질문을 던진다. 일상 안에서 그저 그 무엇도 색다를 것이 없고 기다릴 일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가 지나가는 것에 익숙한 상황에서 우리는 누군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나 상황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전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살아가려는 태도를 보인다. 그 누군가가 우리가 가까이서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또 다른 한편으로 뭔가 ‘특별한’ 사람이나 상황, 그리고 오히려 우리가 전혀 모르는 사람이 어떤 얘기를 해 오면 그것에 관해서는 쉽게 확신하거나 믿으려는 태도를 보인다. 이러한 우리의 태도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방해하기도 하고, 설령 기적이 일어난다 해도 이를 쉽게 놓쳐 발견하지 못하거나, 알아차리지도 못하며 무의미한 일로 지나치기가 일쑤이다. 그렇게 해서 많은 표징은 그 표징이 도달해야 할 목표에 이르지 못한 채 사라지고 만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복음은 우리가 지닌 믿음의 태도, 또 우리가 정말 뭔가를 믿으려고 하는가에 관한 태도를 깊이 돌아보게 한다. 예수님께서는 평범한 보통 유다인 가정에서 태어나셨다. 아버지는 목수 장인이셨고, 어머니는 시골의 주부와도 같은 분이셨으며, 당시 동양적인 문화라고 볼 수 있는 형제와 자매, 사촌과 친인척 혈연으로 넓게 얽힌 대가족의 배경을 지니셨다. 어렸을 때 여느 유다인 가정의 아이처럼 매일 목수인 아버지를 도와드렸고, “마리아의 아들”로서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마르 6,3), 그리고 자매들과 함께 놀며 자랐다. 당신의 소명과 독특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평범하게 그렇게 성장하셨다.

그러던 중, 로버트 아론(Robert Aron, 1898~1975년)이 ‘예수님의 숨겨진 시기(The Hidden Years)’라고 불렀던 그 기간, 일부 유다인들이 주님이 오시는 날을 기다리며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깨어있고자 개별적으로, 혹은 집단으로 사해와 유다의 광야, 그리고 요르단 강변을 중심으로 살아갔던 기간이 예수님께는 언제 어떻게 시작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마르 1,7)라는 세례자 요한의 말로 미루어볼 때 예수님께서는 일정 시점에 이미 그러한 생활을 하고 있었던 세례자 요한의 그룹에 합류하셨고, 그의 제자 중 한 사람이 되셨던 것으로 추정할 수는 있다. 그리고 하느님의 부르심과 성령의 임하심이 이어졌고, 이어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란 지역)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4-15) 하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셨다.

1. “고향으로 가셨는데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함께 지내게 된 제자 그룹이 형성되었을 때(참조. 마르 3,13-19) 제자들과 함께 마을에서 마을로 옮겨 다니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셨는데, 그러던 어느 안식일에 “고향”이자 조상들의 땅이었던 나자렛에 있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마르 6,1-2) 타지에서 일정 기간 활약하신 뒤에 고향에 돌아오셨으므로 사람들은 예수님을 아무개 누구누구네 집의 식구요 형제로 기억하였다. 회당에 들어가신 예수님께서는 율법(모세오경, 토라, Torah, 파라샤, parashah)과 예언서(Prophets, 하프타라, haftarah)를 낭독하고 해설하는 순간이 오자, 사제도 아니었고 공식적으로 인정된 라삐도 아니었지만, 하느님과의 거룩한 계약을 믿는 유다인, 계약의 아들로서 열두 살 이상이면 누구에게나 자격이 주어지는 규정과 관례에 따라 단壇에 오르시어 말씀을 읽고 해설하셨다.

같은 이야기를 전하는 루카와는 달리(참조. 루카 4,16-30) 마르코는 예수님께서 낭독하신 성경 대목이나 그에 관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전해주지는 않고 그저 그 말을 들은 청중의 반응만을 전해준다. 루카는 예수께서 읽은 성경이 이사야서 61,1-2이었다고 알려준다.(루카 4,18)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기도 전에 그분에 관한 소문이 더 빨리 왔다. 모처럼 고향에 돌아오신 예수님은 마치 위대한 스승이요 라삐처럼 알려졌고, 예수님의 손으로 이루어진 기적들과 치유들을 두고는 예언자와도 같은 능력을 지니신 분으로 여겨지기에 충분했다. 사람들의 첫 번째 반응은 놀라움과 감탄이었다. 사람들은 “놀라서”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마르 6,2) 한다. 카파르나움 회당에서처럼(참조. 마르 1,27) 또다시 예수님의 정체성을 두고 의문을 품는다. 이러한 반응은 예수님 안에 임하신 성령과 그 성령의 작용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표현일 수도 있지만(참조. 마르 1,10;3,29-30), 다른 한편에서 예수님께 악령과 마귀가 씌었고, 악령의 작용이라며 예수님을 불신하고 거부하는 표현일 수도 있다.(참조. 마르 3,22)

그저 피상적으로만 놀랐던 사람들의 반응은 곧바로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마르 6,3) 하는 의문으로 이어진다. 사실 이러한 의문 자체가 상당히 모멸적이다. 목수 일만 아는 사람이 어떻게 남들을 가르칠 수 있다는 말인가 하는 것이고, 아버지를 거론하지 않고 마리아의 아들이라고만 칭하고 있으며, 가족들 대부분을 잘 알 뿐만 아니라 마을에 함께 살고 있으니 별다른 것이 없다는 것이다. 도대체 예수님께서는 도통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었지만, 뭔가 특별한 사명을 위해 뭔가 다른 사람이고 특별한 사람인 척이라도 해야 했다는 말일까? 예수님께서는 다른 이와 전혀 다를 것이 없이 연약하기 짝이 없는 여느 인간과 같은 분이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전혀 드러내시지 않은 채, 당신을 동행하는 이들에 둘러싸여 특별한 권위적 의식이나 유별난 치장도 없이, 그렇게 아주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하나로서 사람들 사이에 등장하신다. 특별한 영광이나 특수한 모습이나 형식이 전혀 없이 너무너무 평범한 일상 안에서, 너무나도 평범한 보통성과 일상성 안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신다.

2. “못마땅하게 여겼다

사람들이 너무나 인간적이고, 특별한 것도 전혀 없는데, 예수님의 가르침을 왜 받아야만 하느냐고 항변하는 듯하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존경해 달라거나 존중 받을 만하다는 식의 그 어떤 말이나 태도를 보이지 않고 요구하지도 않으신다. 너무나 인간적이고 자기들과 다를 바 없는 예수님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겼다.(에스칸달리존토 엔 아우토, ἐσκανδαλίζοντο ἐν αὐτῷ, eskandalízonto en autô)”(마르 6,3) 그러니까 사람들은 자기들이 보는 대로만 보려고 했고, 너무나도 평범한 그분의 인간성이 장애가 되어 그분의 말씀을 통해 그분을 믿는 것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사람들의 생각은 그 자체로 그들에게 장애가 되었고, 걸림돌이 되었으며, 구원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방해가 되고, 회복할 수 없는 손해가 된다. 사람들은 인간적인 “속된 기준으로”(2코린 5,16) 예수님을 알았으나 진정으로 예수님을 알 기회를 잃고 만다.

결국, 예수님의 고향 방문은 실패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르 6,4) 하신다.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동향인이라고 여기던 사람들, 가족과도 같은 이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실제로는 알지 못하고 나아가 경멸하고 무시하는 것으로 끝난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앞선 3장에서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마르 3,21)라고 기록한 바 있다. 이제 6장에 이른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고향 나자렛의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부정적으로 판단한다. 사람들은 그분의 모습이 너무 인간적이고, 자기들이 생각하는 하느님의 거룩함과는 거리가 멀며, 너무 모양새가 안 나고, 자기들이 기다리던 메시아요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분으로 모시기에는 알아 왔던 법과 규정에 안 맞는다고 생각한다.

『나자렛 주민들이 보기에, 하느님은 그처럼 단순한 한 인간을 통하여 말씀하시려고 스스로를 낮추시기에는 너무나 위대한 분이십니다! 강생 신비의 스캔들입니다. 곧, 인간의 정신으로 생각하고, 인간의 손으로 활동하고 일하며, 인간의 마음으로 사랑하고, 우리 가운데 한 사람처럼 고생하며 먹고 잠자는, 인간이 되신 하느님에 대해 혼란스러워하게 된 사건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모든 인간적인 도식을 뒤집으십니다. 제자들이 주님의 발을 씻어드린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요한 13,1-20 참조). 이는 그 시대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에, 오늘까지도 스캔들과 불신의 이유가 됩니다.

주님께서는 겸허한 경청과 온순한 기다림의 자세를 갖추라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은총은 종종 우리의 기대에는 전혀 부응하지 않는 놀라운 방식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콜카타의 성녀 마더 테레사를 함께 생각해봅시다. 이 아주 작은 수녀는(아무도 그녀를 위해 10리라를 주지 않았습니다),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도록 임종자들을 거두기 위해 거리로 나섰습니다. 이 작은 수녀는 기도와 활동을 통해 놀라운 기적을 이뤄냈습니다! 한 여인의 작음이 교회 안에 사랑의 행위를 크게 변화시켰습니다. 우리 시대의 (훌륭한) 사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편견을 따르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신적 현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마음과 지성을 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신앙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곧, 신앙의 결핍은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장애물입니다. 세례받은 수많은 사람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존재하시지 않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신앙의 몸짓과 표지를 되풀이하지만, 예수님과 그분의 복음에 대한 참된 신앙에는 부응하지 못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우리 모두, 우리 각자는, 이러한 근본적인 소속감을 심화시키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삶의 일관된 행동으로 신앙을 증거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러한 삶의 안내자는 항상 사랑이 될 것입니다.(교황 프란치스코, 2018년 7월 8일 삼종기도)』

우리도 누군가를 싫어하고 이해하기를 거부하면, 나는 나 자신이 가진 것 외에 다른 것을 보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며, 받아들이지 않게 된다. 우리 중 누군가가 예수님처럼 너그럽고 거룩한 사람일 때, ‘네까짓 게 뭔데?’ 하는 마음이나 질투와 이기심으로 못마땅하게 여길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 그 형제나 자매를 통해 나에게 다가오신 것일 수도 있다. 또 가끔 내 안에서 성령께서 일으켜주시는 거룩함에로의 열정 앞에서도 ‘내가 뭐라고? 내가 어떻게?’ 하는 천박한 영으로 이를 무시할 것도 아니다. 이는 성령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3.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마르 6,5) 기적은 불신이 믿음으로 변화되는 곳에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었다. 마르코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라고 나자렛의 그 누구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듯이 기록한다. 예수님께서 능력을 발휘하실 수 없이 무능으로 남으시고 그 어떤 좋은 일조차 하실 수 없었다 한다. 예수님의 주변에 있던 이들에게서 최소한의 믿음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예수님의 잘못이 무엇이었을까?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들과 달리 너무 멀리 내다보셨고, 너무 빨리 앞서가셨고, 다른 이들이 생각지도 못하는 것을 생각하셨다는 것일까? 너무나도 인간적이었고, 너무나도 평범했으며, 너무나도 일상적이었다는 데에 그분의 문제가 있었을까? 예수님께서는 인간적이고 또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분이셨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사람들이 잘못 알았던 예수님의 모습을 듣는다. 파견된 이들 앞에서 아무리 외쳐도 귀를 막고 듣지도 않는 예언자, 가깝다고 생각했던 이들이 오히려 더 멀리하고 무시하는 분, 구원을 주러 왔으나 받아주지 않아서 그 어떤 선한 일조차 해 줄 수 없는 치유자이신 예수님이시다.

설령 아주 조그마한 한 조각일지라도 하느님의 은총을 기대하는 이는 누구나 그 은총을 받는다. 그렇지만 그것이 별로라고 생각하는 이는 차라리 모든 것을 그만두고 믿음을 버리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에 이르고 만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마르 6,6) 하지만, 흔들리지 않으신다. 당신을 보내신 분의 뜻에 순종하며 계속하여 성실하게 당신 사명을 수행하시고 가르치시며 좋은 일을 이루시고자 다른 곳으로 가신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곳에서는 회개도, 치유도, 더는 좋은 일도 없다. 아멘!

2 thoughts on “마르 6,1-6(연중 제14주일 ‘나’해)

  1. 늘 감사한 마음으로 신자분들과 함께 풍요로움을 나누고 있습니다. 덕분에요. 상쾌한 여름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2. “많은 표징이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고 사라지고 만다.” 내가 외면 해버려 눈앞에서 사라졌을 표징들에 대해 주님께 용서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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