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애론(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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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은 우리 마음에 영감靈感을 주심으로써 당신을 사랑하게 하신다

“나는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너에게 한결같이 자애를 베풀었다.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다시 세우면 네가 일어서리라.”(예레 31,3-4ㄱ) 이것은 하느님의 말씀이며, 이 말씀으로써 약속하시는 바가 있으니, 곧, 세상에 오시는 구세주께서는 당신의 교회 안에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실 것인데, 이 교회는 곧 처녀다운 배필이며 진정한 영신적 이스라엘이라는 것이다.

테오티모여, 보다시피,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심은 우리가 행한 정의의 업적에 의해서가 아니라, 당신 “자비에 따른”(티토 3,5) 것이며 하느님의 섭리를 움직이신 옛날의 영원한 인애로써 우리를 당신께로 이끄시는 것이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앉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요한 6,44)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만일 아버지께서 우리를 이끌지 않으시면, 우리는 결코 우리 구세주이신 성자께로 갈 수 없고, 결과적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는 것이다.

테오티모여, 다리가 너무 짧고 작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아포데스(Apodes란 무족자無足者라는 뜻의 새 이름으로 De Historia amimalium I권 1장에 나온다. Afous-odso)라고 부르던 새가 있다. 이 새는 다리가 너무나 짧고 힘이 없어서 아무짝에도 쓸데없고,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래서 한 번 어느 곳에 나 앉으면, 제 스스로는 다시 날아갈 수 없기 때문에, 언제까지고 그냥 주저앉아 있게 마련이다. 즉, 다리도 발도, 모두 그러해서 제대로 서지도 날지도 못한다. 그리하여 어디나 일단 한번 앉게 되면 여간해서는 날기가 힘들어 그대로 머물러 있어야 한다. 바람이나 일어야 겨우 조금 도움을 받아 나를 수 있으며, 지구의 표면에서 일어나는 회오리바람이나 다른 강풍이 일기를 기다려 바람을 타고 이동하게 되지 않는 한, 이 새는 그 자리에서 그냥 죽고 마는 수도 없지 않다. 그러나 바람만 일면, 바람을 타고 비로소 날게 되니, 바람이 이 새에게 첫 동작을 일으켜 주는 것이 된다. 그리하여 계속되는 바람에 이끌리면서 차차 날게 된다.

테오티모여, 천사들은 극락조라는 새와 비슷하다. 이 새는 지닌 아름다움과 희귀성 때문에 낙원의 새들birds-of-paradise이라고 불리며, 죽을 때에만 땅 위에 내려온다고 한다. 이와같이 저 천상의 천사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떠나 자애심에 떨어지자마자 죽은 자들처럼 지옥에 떨어졌던 것이다. 마치 인간이 죽을 때에는 죽음을 지닌 생명에서 영원히 떠나는 것처럼, 천사들은 타락하자마자, 영원한 생명에서 영구히 떠났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죽을 인생들은 오히려 아포데스 새를 많이 닮은 것 같다. 우리가 하느님을 거역할 때마다 하느님의 사랑을 떠나 땅 위에 떨어져 피조물에게 집착하는 것이 된다. 그런 경우 우리는 죽은 것과 다름없으나 아주 죽은 것은 아니기에 얼마간의 운동력은 남아 있는 것이다. 마치 그 새에게 있는 것 같은 발과 다리 즉 매우 미약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사랑을 표시 할 수 있는 감정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자신만으로는 너무나 무능하여 우리의 마음을 죄에서 떼어 내지 못하며 또 거룩한 사랑의 비약으로 스스로는 재출발하지 못하는데 이는 우리가 고의로 배은망덕의 배신행위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상, 우리가 그러한 불충실로 하느님을 저버렸으니 우리도 마땅히 하느님의 저버림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영원하신 사랑은 당신의 정의로 하여금 징벌을 내리지 못하게 하시고, 오히려 당신 연민의 정을 발하시어 우리를 비참에서 구해 주셨던 것이다. 당신의 지극히 거룩한 영감의 은혜로운 바람을 우리에게 보내시어, 부드럽고 온화한 폭력으로 우리의 마음에 불게 하심으로써 우리 마음을 사로잡으시고 움직이시며, 우리의 생각을 들어 올리시고 우리의 애정을 하느님의 사랑의 하늘 위로 옮기도록 하신다.

그런데 하느님이 우리 마음을 선에 기울게 하시려고 보내시는 첫 비약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기는 하지만, 그러나 우리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그런 것을 생각하기 전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러한 것을 생각할 수 있기 전에 이미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 스스로 무엇인가 해냈다고 여긴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의 자격은 하느님에게서 옵니다.”(2코린 3,5) 한 그대로이다. 그런데 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존재하기 전부터 우리를 사랑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를 끝까지, 또 우리가 거룩해질 수 있도록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은 당신의 아버지다운 자애로써 미리 축복하시어 우리의 영혼을 자극하심으로써 거룩한 통회와 회심에로 나아가게 하신다. 테오티모여, 잘 살펴보기 바란다. 사도들의 으뜸께서는 자기 스승이 수난하시는 그 쓰라린 밤에, 자기 죄 때문에 정신이 나가 버렸으나, 자기 죄로 인한 애통한 생각은 더 이상 하지 않고 오히려 천상에서 오신 자기의 구세주를 알아 뵙지 못했던 것을 슬퍼하였다. 하느님 섭리의 도구로써 닭 울음이 그의 귀를 울려 주고 인자하신 구세주께서는 자비의 시선을, 마치 사랑의 창槍과도 같이 그에게 던지시어 돌 같은 그 마음, 마치 옛날 사막에서 모세가 두들겨 많은 물을 내게 한 바위 같은 그의 마음을, 꿰뚫지 않으셨으면 땅에 떨어진 비참한 아포데스 새처럼 결코 다시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거룩한 사도께서 헤로데의 감옥에서 두 사슬에 묶여 잠이 들어 있던 것을 상상해 보라! 거기서 물론 그는 순교자의 자격으로 있었으나 상징적으로는 사탄에게 포로와 종이 되어 있어 죄 중에서 잠자는 불쌍한 인생을 뜻하기도 한다. 슬프다! 누가 그를 구해 주겠는가!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 그의 곁에서, 이 위대한 사도 “베드로의 옆구리를 두드려 깨우면서, ‘빨리 일어나라!’ 하고 말하였다.”(사도 12,7) 이처럼 하늘에서의 영감은 우리에게 천사처럼 내려와서 불쌍한 죄인의 마음을 두드리고 흔들어 자기 죄악에서 깨어나 일어서게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테오티모여, 어느 영혼에게 사랑으로 오시는 하느님이 그 마음을 일깨워 주시고 죄를 끊어버리게 자극해 주시며, 당신께로 되돌아오게 하실 때, 그 영혼이 속속들이 깨닫게 되는 이 첫 감동과 충격은 우리 안에서, 우리를 위해서 일어나는 것이지만 우리 힘에 달려 있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깨기는 하지만 우리 스스로가 즉, 우리가 우리 자신을 깨우지는 못한다. 우리 자신을 깨우는 것은 우리를 흔드는 것이든가 아니면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지 우리가 아니다. 저 경건한 정배는 말한다. “나는 잠들었지만 내 마음은 깨어 있었지요.”(아가 5,2)

자, 보라! 그는 애인의 이름으로 우리를 불러 깨우나니 우리는 그 목소리를 듣고 그이임을 아노라! 하느님이 당신의 영감으로써 우리를 부르시고 깨우신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았고 또 뜻밖의 것이며, 성 베르나르도의 말과 같이, “은총의 시작에 있어서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다만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주시는 것을 느낄 따름이나, 그것은 우리 밖에서, 즉 우리 없이 우리에게 되는 일이다.”(성 베르나르도의 De gratia et libertatem, 14장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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