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성모님’

그리스도교 영성과 침묵에 관한 코스나 강좌를 개설하여 10여년 넘게 운영하고 있는 카푸친 수도회의 에밀리아노 안테누치Emiliano Antenucci 신부에 의해 프란치스코 교황님에게까지 소개되어 바티칸에 소장되게 된 아이콘이다. 우리나라에서는 2020년 ‘성서와 함께’를 통하여 <침묵의 성모>라는 소책자로 소개되기도 했다. 에밀리아노 신부는 “침묵은 혁명입니다. 침묵은 말이 진정으로 태어나는 자궁입니다.”라고 말한다. 오랜 침묵을 살았던 토머스 머튼 역시 “침묵은 우리 내적 생활의 힘입니다.…우리가 우리의 삶을 침묵으로 채울 수 있다면, 그때 비로소 우리는 희망 속에 살 수 있게 됩니다.”라고 말한다. 침묵은 실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다양한 도전을 성찰하고 이를 하느님과 나누면서, 그 도전의 의미와 역할을 이해하고 대처할 수 있게 하는 데 필수적이다. 침묵은 하느님의 약속과 그분의 정의를 바라는 우리의 희망을 유지하도록 우리를 도와준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현대인은 모든 것을 “소비하고 소유하려 드는 탐욕의 태도”로 살아간다고 지적하고, 이를 경계할 것, 진정으로 쉴 줄 알고 진정한 자비의 능력을 갖추도록 멈출 수 있는 태도를 배워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에 더하여 안테누치 신부 역시 “휴식이 성찰, 창의성, 그리고 수면의 새로운 차원을 열어 준다. 우리 삶에서 멈춤은 기본적이며 악보의 쉼표처럼 숨을 고르고 멈추었다가 더욱 멋있는 연주나 노래로 이어지게 하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다. 그는 작은 일들에서 큰일이 생겨나듯이, 또 우리가 작아도 성모님이 위대하시다는 생각으로 기도하면서 ‘침묵의 성모님’을 기리는 전례와 미사를 준비하였고, 마침내 아베짜노Avezzano의 피에트로 산토로Pietro Santoro 주교의 집전으로 2020년 8월 1일 침묵의 성모님을 기리는 축일 미사를 거행하기에 이르렀으며, 이러한 정성은 2020년 11월 1일 교황청 ‘거룩한 전례와 성사성’의 로버트 사라Robert Sarah 추기경으로부터 침묵의 성모님을 기리는 미사와 전례에 관한 규범의 인준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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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하느님의 말씀에 근거한 절대적 진리는 편향적, 악의적, 선동적이라는 비난에 직면하고 있다. 간단한 예를 들어 하느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짝지으셨다는 창세기에 근거하여 이것이야말로 혼인이라고 옹호하면, 이는 이미 수명을 다한 낡은 종교적 편견에 불과하다고 비난을 받는다. 이렇게 가족의 기초가 무너지면서 이제는 사회 자체가 서 있을 기반이 없어지기도 한다. 이렇게 나아가다 보면 정부와 법이 외부로부터 우리의 삶을 더욱 강하게 통제할 수밖에 없어진다. 부모에게 주어진 자녀를 이끌어가고 인도해야 할 책임은 이제 정부의 것이 되고, 정부가 하느님처럼 무소불위의 힘을 과시한다. 그렇지만 젊은 세대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목소리를 내고 그 결과에 직면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점은 우리에게 희망을 품게 한다. 우리가 젊은 세대를 이끌어가는 것 같아도 젊은이들이 항상 우리의 선봉에 서 있다는 사실이 위안을 준다.

희망은 침묵 속에서 태어난다. 애가는 “주님의 구원을 잠자코 기다림이 좋다네.”(애가 3,26)라고 우리를 다독인다. 희망은 침묵의 성찰 속에서 자신을 표현할 용기를 얻는다. 우리의 희망은 하느님의 다스림을 반대하는 모든 것에 목소리를 높이는 것, 그리고 젊은이들이 우리보다는 분명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내리라는 믿음으로 그들을 용감하게 동행하는 것 두 가지 사이에서 표현을 찾아야 한다.

침묵의 성모님 상 앞에서 깊이 성찰하면서 우리는 불의에 맞서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면서 우리의 희망은 계속되고 채워져 간다. 정의와 평화는 문제 제거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정의와 평화는 오직 하느님과 하느님의 면전에서, 진정한 침묵에서만 찾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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