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13,24-43(연중 제16주일 ‘가’해)

“좋은 씨…밀…가라지…겨자씨…누룩…숨겨진 것” *그림 by Rikka Ayasaki

지난주에 이어 마태오복음 13장에 나오는 비유의 말씀 중 다른 비유들을 듣는다. ‘가라지’와 ‘겨자씨’, ‘누룩’에 관한 비유들과 그에 따른 예수님의 설명이다. 지난주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가 씨가 떨어진 ‘토양’에 관한 비유였다면, 이번 주는 ‘’, 특별히 좋은 씨에 관한 비유들이라 할 것이다.

1. “좋은 씨…가라지들도 드러났다”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의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들도 드러났다.”(마태 13,24-25) 하는 가라지 비유는 마태오 복음만이 전한다. “가라지”라는 말마디가 성경 전체에서 이곳에서만 등장한다. 밀을 심었는데 “밀 가운데에” 가라지가 생겼다. wheat와 weed의 공존이다. 밀밭의 풍성한 수확을 위협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런 일은 인생과 세상의 역사 안에서도 왕왕 발생한다. “자고 있는 동안”에 “원수”가 그랬다. 원수가 어두운 밤에 몰래 숨어서, 이런 일들을 꾸몄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깨어 기도하여라.”(마태 26,41) 하셨다. 훗날 바오로 사도는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 잠자는 이들은 밤에 자고 술에 취하는 이들은 밤에 취합니다.”(1테살 5,6-7)라고 한다. 우리가 깨어 있지 않고 방심하는 사이에 우리의 영혼 안에도 선의 씨앗이 자라지만, 동시에 악의 가라지도 돋아난다. 우리들의 공동체 안에도밀 가운데에가라지가 있고, 밀과 가라지는 자주 뒤섞여 있다. 악의 신비(?)이다.

가라지는 열매를 맺지는 않고 밭만 차지하면서 좋은 밀 씨가 숨 막히게 만든다. 밀이 자라면서 가라지도 함께 자라나 드러난다. 자칫하면 풍성한 수확은 고사하고 아무 열매조차 맺지 못하게 될까 싶은 위협이 된다. 자기 밭에서 가라지를 발견한 농부는 놀라고 슬퍼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싶다. 농부는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미리 발견하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 안타깝다. 선善의 주변에 악惡이 존재하는 이유를 묻는 물음이다.

우리의 존재 안에서도 어느 순간에 악의 존재를 발견한다. 도대체 누가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주변에 악을 끌어들인 것일까? 왜 우리가 미리 눈치채지 못한 것일까? 이런 물음의 순간은 우리 자신과 우리 인생에 대해 식별을 요구하는 괴로운 순간이다. 우리가 “좋은 땅”이 되어 말씀을 받아 묵상하고 지키면서 “듣고 깨달아서…열매를 맺으며”(마태 13,23), 실현하고자 하는데, 마치 우리 손으로 악을 지어낸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다.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나 교회도, 강한 자와 약한 자, 단순한 자와 복잡한 자,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함께 어우러져 감히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것처럼 보일 때 같은 체험을 한다. 예수님의 작은 공동체에도 배신자가 있었고, 예수님을 부인한 자가 있었으며, 겁에 질려 비겁한 자가 있었고, 도망친 자들이 있었다.

우리가 이렇게 괴로워할 때 우리는 비유에서 집주인에게 가서 “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마태 13,27) 하고 묻는 종들과 비슷하다. 비유에서 집주인은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마태 13,28) 하고 이미 원수의 장난인 것을 알고, 이에 종들은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마태 13,28) 한다. 종들은 가라지를 뽑아 밀이 가라지에게 양분이나 공간을 빼앗기지 않도록 거두어 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주인은 행여 밀이 다칠세라 저절로 가라지와 밀이 분리될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의 눈을 가진다. 주인은 가라지를 솎아내려다가 밀을 다치게 하거나 적어도 완전히 뽑아낼 수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주인은 좋은 밀 곁에 나쁜 잡초들을 그대로 두는 인내의 온유를 발휘한다.

우리도 자칫하면 종의 마음처럼 가라지를 제거하고 싶은 엄격주의완벽주의의 강박관념에 사로잡힐 수 있다. 내 안에 그 어떤 사악함이나 잡스러움도 자리 잡지 못하게 하려다가 자칫 완벽주의라는 오류에 빠질 수가 있고, 우리의 공동체 안에서도 원수의 장난이 판을 치지 못하도록 하려다가 엄격주의라는 오류에 빠질 수도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인간들의 ‘순수와 완벽’이라는 기준은 그 경계가 명확하지 않을 때가 많다. 밀밭에 가라지가 있어서 다소 불편할 뿐, 가라지는 감히 밀을 해칠 수가 없다. 가라지는 가라지이고 밀은 밀이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수확의 시간, 심판의 시간이 반드시 온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가라지 비유를 설명해 주시면서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버릴 것이다.”(마태 13, 39-41) 하시면서, 좋은 밀로는 빵을 만들 것이며 가라지는 불에 태워버릴 것이라 하시고 그동안 인내와 온유로 기다리라 하신다.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절대 순결이 필요하다거나 의로운 이들만으로 공동체를 구성하려는 시도나 의도는 위험하다. 때로 선과 악, 혹은 정의와 불의의 경계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가라지의 비유’는 우리 교회 생활과 공동체에 대한 가르침이다. 어떤 때에는 합법적인 책임과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경우라 할지라도 자기의 권한이나 위임 기간을 넘겨 가면서까지라도 인내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신앙의 삶에서는 선을 목격하는 순간 동시에 악을 제거해야 한다는 유혹이 따른다. 이는 오로지 순수함과 정의를 위해서라는 명제 아래 때로 편협적이 되거나 패거리를 조장할 수 있고, 뭔가를 내 눈앞에서 당장 해결해 보려는 폭력이 될 수도 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354~430년)는 『‘밀’인 사람은 수확 때까지 견뎌 내도록 하십시오. ‘가라지’인 자들은 밀이 되도록 하십시오. 사람의 밭에서 밀과 가라지는 다릅니다. 밭에서 밀이었던 것은 밀이고, 가라지였던 것은 가라지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밭, 곧 교회에서는 때때로 밀이 가라지가 되기도 하고 가라지가 밀이 되기도 합니다. 내일 도대체 무엇일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하며 처음부터 가라지여서 좌절하는 영혼들마저도 희망의 끈을 놓지 말라 하신다.

2. “하늘 나라는 겨자씨…누룩과 같다”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마태 13,31)라는 짤막한 비유를 하나 더 말씀하신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겨자씨”의 작음을 강조하신다. 마당에 심을 수 있으면서도 씨앗이 아주 작은 풀같은 식물이다. 그러나 밭에 옮겨 심으면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둥지를 틀 수도 있는 나무처럼 되는 식물이다. 식물도감에서처럼 식물의 생장이나 종자가 아니라,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어떤 풀보다 커져”라는 크기의 대비에 비유의 핵심이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터무니없이 과장된 비유처럼 들리지만, 하늘 나라는 위대하고 큰 것이 아니라 겨자씨처럼 거의 보이지 않는 작음으로 이루어진 실재이다. 하늘 나라의 실재는 처음에 너무나도 작은 씨앗처럼 시작하므로 사람들이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기 일쑤이다. 그러나 그 작은 씨앗 하나하나에는 엄청난 크기로 성장할 힘의 가능성이 새겨져 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선포하시는 하늘 나라의 시작이 겨자씨처럼 눈에 띄지 않게 미미하다는 것을 알고 계시지만, 자라서 나무가 되고 그 가지에는 수많은 민족, 유다인이 아닌 사람들도, 이방인들도 모두 둥지를 틀 수 있게 하리라는 것을 알고 계신다. “복음은 먼저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주는 하느님의 힘”(로마 1,16)이지만, 겨자씨 안에 담긴 보이지 않는 힘, 나무가 되게 하는 힘은 그리스도인에게만 주어지는 힘이 아니라 하늘 나라의 힘이다. 나무는 교회가 아니라 하늘 나라이기 때문이다. 나무가 씨앗에게 자라날 힘을 주는 것이 아니라 씨앗이 나무로 자라날 힘이 있어 나무가 되게 한다.

하늘 나라에서도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 믿는 이들의 공동체가 오늘은 아주 작은 실체로 보이지만, 미래에는 아주 큰 실체가 된다. 예수님의 제자는 오늘과 미래의 대비를 보는 사람이다. 오늘의 작음에 미래가 달려있다는 것도 알아야만 한다. 비유는 계시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계시라는 말 그대로 하늘 나라의 장막을 걷어 크기나 외형적인 기준, 세속적인 기준이라는 것이 하늘 나라의 역사에는 적용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선포해야만 한다. 하늘 나라의 힘은 그때그때 달라지는 크기나 숫자, 특권이나 권력과도 같은 것에 연연해하지 않는다.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께서는 누룩의 비유, 곧 작은 누룩이 “밀가루 서 말을 온통 부풀어 오르게”(마태 13,33) 하는 비유를 말씀하신다. “밀가루 서 말”은 오늘날 용량 단위로 대략 40kg에 해당한다. 바오로의 서간에서 누룩은 부정적인 이미지로 사용(참조. 1코린 5,6-8 갈라 5,9)되지만, 여기서는 그러한 바오로 사도 식의 개념과는 정반대이다. 세상 속의 누룩이 되어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적극적으로 살아야 한다. 부정과 악惡만이 전염이 되는 것이 아니라 긍정과 선善도 전염이 된다.

한편, 겨자씨의 비유에서는 씨가 자라나 나무가 된 실체가 있지만, 여기 누룩의 비유에서는 밀가루 속에 들어간 누룩의 실체는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을 새길 필요가 있다. 누룩은 사라져도 밀가루 속에 들어간 누룩의”이 반죽을 부풀어 오르게 한다. 이런 내용이 강론에서나 교리 수업에서 많이 거론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주의해야 한다. 세상 속에서 누룩처럼 살아가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지만, 잘못하면 그리스도인이 주체가 될 위험이 있다. 누룩은 그리스도인이라기보다 하늘 나라이다. 세상을 발효하여 부풀어 오르게 하는 것은 하늘 나라 자체의 힘이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누룩도, 그렇다고 반죽도 아니고 반죽 안에 들어간 누룩의 힘이 반죽을 부풀어 오르게 하여 세상을 위해 쪼개지고 주님께 봉헌될 빵이 되게 한다. 성 폴리카르포(69~155/6년)는 86세에 장작 더미 위에 올려져 복음의 힘으로 그리스도께 자신을 봉헌하면서 세상을 위해 구워지고 쪼개어진 빵이 되기를 원했다.

“겨자씨”와 “누룩”은 주님께서 뿌리신 “좋은 씨앗”이며, 복음이고 그리스도 자신이다. 씨앗은 잠재적 능력과 힘을 지닌다. 교부들의 주석에 따르면 “겨자씨”나 “누룩”의 비유는, 개인적 차원에서 내적 인간에 뿌려지고 스며들어 커나가는 믿음을 상징한다. 작은 겨자씨로 자라난 큰 나무는 잎이 무성하고 열매가 풍성하여 온갖 날짐승이 둥지를 틀고 그늘에는 들짐승이 찾아들며 모든 생물과 모든 민족이 양식을 얻는 훌륭한 나무이다.(에제 17,23 다니 4,9.18 에제 31,6 참조)

겨자씨는 나의 성장, 누룩은 나를 통한 타인의 성장을 말하는 비유로 읽을 수도 있다. 『겨자씨를 받아들이는 ‘땅’, 누룩을 받아들이는 ‘밀가루 반죽’으로 비유를 읽는다면, 이 비유들은 ‘받아들임’의 비유가 되기도 한다.』(김혜숙, ‘혼인과 가정’, 76-77쪽 참조) 겨자씨와 누룩이 미소함에서 장대함으로 발전하는 희망의 의미를 담는다고 해서 즉각적인 눈앞의 대성공이나 숫자적인 성공, 혹은 짧은 시간 안에 더 큰 나무와 더 큰 덩어리를 만들려는 조급함의 유혹에 빠지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그것은 하느님의 방식이 아니다.

교부들은 “서 말”의 3이라는 숫자에 착안하여 인간 내면의 세 영역, 곧 ‘생각·감정·욕구’, 혹은 ‘육체·감각·이성’으로 이를 풀이하면서 우리 온 존재에 믿음의 누룩이 스며들어야 한다고 풀이하기도 한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를 두고 『우리 안에 있는모든 것들에 스며드는사랑이라는 누룩’』을 찬미한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밀가루들은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우리 자신에게서 흩어지는 생각과 감정들이며,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눈앞에서 우리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고 있는 세월이다. 사랑의 누룩, 은총의 누룩, 그리스도라는 누룩이 비로소 이 모든 것을 통합하여 많은 이가 먹을 양식이 되게 한다.

3. “숨겨진 것을 드러내리라”

가라지와 겨자씨의 두 비유의 결론처럼 마태오 복음사가는 시편 78장 2절을 인용하며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고…나는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리라. 세상 창조 때부터 숨겨진 것을 드러내리라”(마태 13,35) 하셨다고 기록한다. 마태오가 인용한 이 시편 구절은 아삽이라는 선견자가 하느님의 종이요 이스라엘의 목자인 다윗 왕을 칭송하는 내용의 첫 부분(참조. 2역대 29,30)으로서 시편 구절을 그대로 옮겨보면 “내가 입을 열어 격언을, 예로부터 내려오는 금언들을 말하리다.”인데, 이를 마태오는 “세상 창조 때부터 숨겨진 것을 드러내리라”라고 다소 말을 바꾸어 기록한다. 하느님께서는 마땅할 때가 올 때까지 드러내실 것들을 세상 창조 이전에 감춰두셨다. 밀가루 속에 숨겨진 누룩처럼 숨겨진 무엇인가는 좀 더 시간이 지나서야 찾아진다.

그렇게 우리는 주님께서 충만한 계시로 베일을 걷어내어 드러내신 계시, 숨겨졌으나 알아 모셔야만 할 계시, 결코 다함이 없는 신비, 예수님의 계시를 맞는다. 그리하여 우리가 “나는 죽음을 겪으시는 그분을 닮아, 그분과 그분 부활의 힘을 알고 그분 고난에 동참하는 법을 알고 싶습니다.”(필리 3,10) 하는 말씀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신 주님을 더욱 알 수 있게 된다. 그분을 더욱 알아 그분을 더욱 사랑하며 그분과 생명의 통교 안에서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마르 4,27) 하는 말씀처럼, 그렇게 우리가 싹이 터서 자란다. 아멘!

One thought on “마태 13,24-43(연중 제16주일 ‘가’해)

  1. 내 마음이 항상 하늘나라의 뜻이 중심되어, 계속 나아가야 할 시간이 나의 성장 뿐 아니라 타인의 성장이 될 수 있는 은총이 될 수 있도록 항상 말씀을 묵상하고 지혜를 찾고, 불필요한 것에 마음 두지 않는 생활을 더 습관화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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