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20,19-23(성령 강림 대축일 ‘가’해)

엘 그레코El Greco(1541~1614년), 성령 강림(부분화)

부활 대축일과 함께 성령 강림 대축일은 교회에서 거행해 온 가장 성대한 축일이자 가장 오래된 축일이다. 오늘 교회는 전례력으로 부활 시기를 마감하며 교회 공동체의 탄생(the birthday of the Church)을 경축한다. 성령 강림 대축일을 기점으로 탄생한 교회 공동체는 성령이 함께하시는 공동체로서 이제 두려움과 실망 속에서 문 뒤에 숨어 있던 공동체를 벗어나, 서로의 아픔과 상처들을 드러내놓는 공동체가 되며, 서로 평화를 빌어주고 용서를 선물하는 공동체가 된다. 교회는 오늘 제대 옆에 켜 두었던 부활초를 끄고, 부활 시기를 마감하기 위하여 부활 대축일 때처럼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후에 ‘알렐루야’를 두 번 덧붙인다.

성령 강림 대축일에 교회는 파스카를 지내고 50일이 되던 때, 곧 “오순절이 되었을 때” 사도들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성령이 내려오셨다는 말씀을 듣는다.(참조. 제1독서;사도 2,1-11) 이어서 오늘 복음인 요한복음에서 주님께서 부활하신 바로 그날, “주간 첫날 저녁”(요한 20,1)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3) 하셨다는 말씀을 듣는다. 인간적인 시간 차이 때문에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처럼 들리지만 이는 같은 사건을 두고 각각 다른 모습으로 이를 읽어냈던 교회의 아름다운 교향곡(연주)이자 증언이다.

사도행전의 기록을 통해서 루카는 옛날 이스라엘 민족이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내려주신 것을 기념하여 50일째에 축제(오순절)를 벌였듯이 하늘에 오르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공동체 위에 성령의 불꽃과 바람으로 이미 약속하신 바를 성취하신 것으로 묘사하려 한다. 루카에게는 성취의 성취, 곧 새로운 계약의 완전한 성취, 단순히 율법에 근거하지 않고 성령에 근거한 성취, 돌판이 아니고 믿는 이들의 마음에 새겨진 “새 계약”(참조. 예레 31,31-33)의 완성을 기록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는 곧 교회, 주님의 공동체로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성령께서 거하시는 공동체, 예루살렘으로부터 로마에 이르기까지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교회의 탄생에 대한 기록이었다.

반면에 요한 복음사가는 자기 복음을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의 내용으로 끝마친다. 이는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심으로써 구원이 온전히 이루어졌다는 내용을 담고자 한 것으로서, 이는 거룩하신 성령의 은총으로 지금부터는 하느님의 자비가 다스리시는 새로운 창조가 시작되고, 그래서 하느님의 자비로 용서를 얻어 세상의 죄가 사해지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 용서는 하느님께서 아무 조건도 없이 한없는 사랑으로 그저 베풀어주신 것이므로 이 용서를 받은 제자들도 인류에게 용서를 거저 베풀어야 한다. 이미 우리는 같은 말씀을 부활 제2주일에 듣고 강해講解하였지만, 옛글을 읽으면서도 오늘 새 마음으로 다시 들을 수 있도록 우리의 정신을 바꾸어주십사 하고 주님께 청하면서 다시 한번 이 말씀을 듣고 깊이 묵상해야 한다.

1. “주간 첫날…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셨다.”

그러니까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주간 첫날”, 기원 후 30년 4월 7일, 파스카 명절을 지낸 토요일의 다음 날에 있다. 이날은 예수님께서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셨으므로 무덤이 비었음을 확인한 날이다.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기에 바빴고, 자기들도 붙잡힐까 두려워, 그러니까 자기들의 스승이요 예언자이셨던 예수님을 붙잡았던 무리가 쳐들어올까 봐 예루살렘에 있던 자기들 집에 숨어 문을 닫아걸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루신 공동체의 적나라한 모습이었다. 예수님을 따른다고는 했었지만, 그분을 깊이 이해하지 못했고 확신이나 신념은 고사하고 도망하기에 바빴으며 두려움으로 마비되었던 사람들의 공동체였다. 그동안 수도 없이 들었던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루카 24,44)을 들었음에도 제자들의 마음과 공동체의 삶은 그 말씀의 무게와 크기를 알아듣기에 너무나 아둔했고, 잠들어있는 상태였다. 예수님과 함께 그 말씀을 들으면서 생각을 다듬었고, 하느님의 신비에 관한 이해를 넓혀왔으며,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수도 없이 들었으면서도 그 모양이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요한 20,2)가 “보고 믿었다”(요한 20,8) 하는 사실,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서 돌아와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 20,18) 하는 것을 듣고도 그런 꼴이었다.

그런 제자들 안에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셨다.”(요한 20,19) 제자들의 마음 안에서는 여전히 두려움과 믿음이 싸우고 있었다. 주님께서 부활하시어 살아계신 모습이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당신 제자들 가운데에 서시지만, 제자들의 눈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들의 마음 안에 그들이 원했던 바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볼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셨다.” 하지만, 우리가 보려고만 하면 언제나 우리 가운데에 서 계시고 현존하시는 주님이시다. 이것이 바로 오늘까지 모든 “주간 첫날”, 주일에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그 제자들이 우리보다 더 나은 특권을 누렸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의 중심이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 부족한 탓이거나, 부활하시어 살아계신 유일한 우리의 주님, 그분께서 서 계시는 자리를 우리가 차지해서 우리가 가운데에 서 있기 때문이다. “주님이십니다!”(요한 21,7) 하고 말할 수 있는 이들만이 주님을 보고 알아 뵙는다.

주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계신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지내는 동안 그들이 맞았던 가장 큰 유혹이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에 계시는가, 계시지 않는가?”(탈출 17,7) 하고 의심하는 데에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믿는 자라고 말을 하면서도 믿음이 약하다 하거나 혹은 믿음이 없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한다. 진실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우리를 버리시는 일 없이 항상 우리 가운데에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이시다. 그분께서는 이렇게 우리를 버리시는 일이 없는데도 겟세마니에서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다.”(마르 14,50 마태 26,56) 하는 것처럼 우리가 그분을 버리고 달아난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 세상 앞에서 베드로처럼 결국 “나는 당신들이 말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마르 14,71) 하는 사람이 되고 만다. 많은 이들이 주님을 증거하고 있으므로 마땅히 우리가 믿어야 하는데도 토마스처럼 계속 우리의 의심을 키워가고 불신하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이다.(참조. 요한 20,24-25)

2. “평화가 너희와 함께!…두 손과 옆구리”

이렇게 예수님께서 제자들 가운데에 오시자마자 예수님께서는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 하셨다고 요한 복음사가는 기록한다. “평화”, “샬롬”, 충만한 “생명”이다. “평화”를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의 동작이 뒤따른다.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제자들에게) 보여주셨다.”(요한 20,20) 한다. 제자들이 그동안 알고 지냈으며 상상했던 나자렛의 그 예수님이 아님을 확인하여 주신다. 시신屍身이 다시 그대로 생명을 되찾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생명으로 성령, 하느님의 영 안에서 영원히 하느님의 영을 호흡하시는 변모된 모습, 동정녀 성모님 안에서 육신을 취하시기 이전의 모습, 이 세상에 오시기 전의 모습으로 당신을 보여주신다. 그러나 그 부활의 영광 안에 계시는 몸에도 당신이 인간으로 사셨던 모습, 수난의 흔적을 담은 모습을 보여주신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기까지 하셨던(참조. 요한 15,13) 사랑의 모습으로 보여주신다. 그 흔적은 십자가의 상처였다. 창에 찔려 벌어진 옆구리의 상처는 당신 사랑이 흘러나와 온 인류를 용서하고, 정화하며, 하느님 아버지와 통교에로 나아가게 하는 사랑의 강물이 시작된 곳이었으니 그 강물에 온 인류를 잠그고자 하는 발원지였다. “목마른 사람” 모두가 “생수의 강”에 나아오도록 하는 “피와 물”의 원천이었다.(참조. 요한 7,37-39;19,34)

3. “숨을 불어 넣으며…성령을 받아라!”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요한 20,20) 마침내 제자들의 불신이 사라지고 그들의 인생에 개입해오신 예수님의 현존을 기뻐한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더는 인간의 숨이 아니고 성령의 숨인 “숨을 불어넣으며”(요한 20,22) 말씀하신다. “한처음”에 인간을 빚으시고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셨던 숨이요(참조. 창세 2,7), 마지막 창조 때에 불어올 영원한 생명의 바람(참조. 에제 37,9)이며, “조금 있으면”(요한 16,16-19) 그리스도인들이 그분을 알아모셔 그분을 부를 때마다 그들 공동체의 숨이 되시어 계속 호흡하실 성령이시다. 부활하신 주님의 이 숨은 그리스도인들의 숨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성령으로 숨을 쉰다. 성령의 숨은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에페 4,30) 하고 바오로 사도가 말하였듯이 우리 각자가 슬퍼해도 우리의 숨이 되어주시고, 우리 호흡처럼 우리가 항상 알아 모시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를 살게 하시는 숨이지만, 우리의 거역으로, 사랑과 하느님 생명의 거부로, 우리는 숨이 막히고 만다.

우리에게 들어와 우리의 숨이 되시는 이 숨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다. 하느님께서 더는 기억하지 않으실 모습으로 우리의 죄를 씻으시고, 지우신다. 이 “숨”은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요한 1,18)처럼 우리와 가장 가깝게 하나가 되신다. 우리가 매일매일 사랑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가 아닌데도 더는 고아가 되지 않고 한없는 사랑으로 사랑하시는 숨이시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 하는 말씀은 ‘축하한다. 선물이다!’ 하시는 말씀이다. 오직 한 가지,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13) 하시는 말씀처럼 거부하지만 않는다면 언제나 받을 수 있는 선물이다. 성령은 충만한 생명의 선물이다. 우리가 도저히 다 살 수 없을 만큼의 크나큰 선물이다. 우리가 매일 살아가는 기쁨의 선물이다. 우리가 우리 형제자매들과 우리의 믿음도 하나요 우리의 희망도 하나라는 통교의 호흡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선물이다. 우리가 모든 피조물의 이름으로 창조주요 주님이신 분을 찬양하고 고백하게 하는 선물이다.

떠나시기 전에 “받아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모두 이 잔을 마셔라. 이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태 26,27) 하셨던 예수님께서 이제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 하신다. 두 말씀 모두 은총의 선물을 받으라는 초대이시다.

그리스도의 몸이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먹으라 하신다. 성령으로 숨을 쉬라고 성령을 받으라 하신다.

이렇게 거룩한 숨으로 사는 새로운 생명에는 항상 죄의 용서가 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죄지은 이를 우리가 용서하듯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다.(참조. 마태 6,12 루카 11,4) 죄로부터, 악으로부터, 그리고 죽음으로부터 해방이 아니라면 그것은 진정한 해방이 아니다. 성령 강림은 파스카(해방)가 우리에게 주는 해방을 기념하는 축제이다. 이 해방은 우리의 고달프고 자꾸만 넘어지며 죄에 빠지는 매일매일의 인생살이 안에서 이루어지는 해방이 아니면 안 된다. 진정 우리가 이런 해방을 산다면, 참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성령, 하느님의 거룩한 성령을 호흡하는 사람이라고 정말 고백할 수 있게 된다. 이 성령께 감사하면서 우리는 성화되고 주님께 기도하며 우리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

성령 강림 대축일에 우리는 부활 제2주일에 들었던 요한복음의 말씀(요한 20,19-23)을 다시 듣는다. 짧지만 그 깊이가 짧지 않은 오늘 복음에는 그리스도교의 핵심 주제어인 평화, 용서, 기쁨이 모두 담겨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받으라 하신 그 성령으로 제자들은 성령의 사람들이 된다.

성령의 사람들은 평화의 사람이어야 하고, 용서의 사람이어야 하며, 기쁨의 사람이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성령의 사람들이 되게 하시고,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21)” 하시며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신다. 예수님께서 우리 제자들에게 주신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 안에 평화를 복원하여 주시고, 죄와 죄의 얼룩까지도 용서하여 주시며, 기쁨을 부어주신다.

평화의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은, 내 안의 집착과 분노, 이기심을 버리고 타인의 생명에 생명을 더하는 마음을 키워가는 것을 뜻한다. 예수님의 평화가 내 마음과 네 마음에 계시도록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용서의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자신의 상처를 내보여 주셨듯이 나의 상처를 예수님께 보여드리고 나의 상처를 낫게 해 주시도록 기도하며, 타인의 상처는 덮어주고 싸매어 주어 시간의 신비 속에서 예수님께서 그 사람도 치유해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나 자신의 약점과 장점을 파악하는 훈련을 통하여 내가 나를 용서하고, 타인이 나에게 해 온 온갖 못된 짓을 훌쩍 뛰어넘는 것을 말한다. 용서는 하느님 앞에 너도나도 모두 가련한 존재임을 알아가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기쁨의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은, 존재론적인 지상의 슬픔 속에서도 우리 인생의 전부가 이것만은 아닐 것이니 하늘에 그 끝이 있을 것임을 아는 것을 말한다. 기쁨의 사람은 이 세상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는 허무함과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절망감 속에서도 오직 그분께서 만큼은 한날 한시도 나를 결코 잊으신 적이 없다는 신뢰 속에서 조용한 기쁨을 산다. 그런 의미로 기쁨의 사람은 슬픔 속에서도 기쁨을 산다. 아멘!

2 thoughts on “요한 20,19-23(성령 강림 대축일 ‘가’해)

  1. …지금까지 감사하게도 여기까지 왔네… 부활은 내일 또 하루를 감사드릴 수 있게 해주시는 선물이며 성령의 은총은 평화와 기쁨의 영원함을 약속해주심. 신부님의 글을 읽으며 묵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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