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24,13-35(부활 제3주일 ‘가’해)

“우리는……기대하였습니다.”(루카 24,21)

루카 복음사가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만난 이야기를 자기가 기록한 복음의 마지막 장에 배치한다. 이는 이 이야기를 자기 복음의 결론으로 삼으면서 동시에 본인이 기록한 또 다른 책, 곧 사도행전의 도입으로 삼기 위한 의도가 다분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루카가 나자렛 예수를 두고 기록한 소위 복음 전체의 종합이요 예수님을 통한 구원 역사 전체의 결론을 대면한다.

루카는 자기 복음의 첫 장에서 “처음부터 목격자로서 말씀의 종이 된 이들이 우리에게 전해 준 것을 그대로 엮은 것”(루카 1,2)이라고 기록하고, 사도행전의 첫 장에서는 “주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시는 동안 줄곧 우리와 동행한 이들 가운데에서, 곧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시작하여 예수님께서 우리를 떠나 승천하신 날까지 그렇게 한 이들 가운데에서 한 사람이 우리와 함께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사도 1,21-22)라는 베드로의 증언을 수록하는데, 루카복음의 맨 마지막 장, 끝부분에서는 다시 한번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 24,48)라고 기술한다. 루카는 복음이건 사도행전이건 시종일관 “부활의 목격 증인”에 관한 내용을 적으면서 이 일이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루카 24,47)고 강조한다.

이를 위해 루카 복음사가는 자기 복음의 마지막 장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날을 단 하루로 기록하는데, 이 하루 안에 끝없는 주님의 날, 유일한 주님의 날, 하느님의 “첫날”(창세 1,5), 새로운 창조의 날, “주님만 아시는 그날”(즈카 14,7)을 기록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날”은 우리의 날이고, 이 시대의 날이며, 부활하신 주님을 우리가 영원한 왕국의 식탁에서 알아볼 수 있을 때까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걸으시는 세상의 날이기도 하다.

루카복음의 마지막 장은 ① 무덤가의 여인들(1-12절) ②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13-35절) ③ 예루살렘에 있던 열한 제자들(36-53절)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오늘 복음은 그 두 번째 부분이다.

1.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오늘 전례의 핵심이자 루카복음 마지막 장의 절정인 오늘 복음을 읽으며 그 말씀이 말씀을 읽는 이들 모두를 읽으시도록 청한다. 예수님께서 붙잡히셨을 때 제자들은 모두 두려움과 실의에 차서 도망을 쳤고, 그들 중 몇몇은 함께 지냈던 공동체를 떠나려고까지 하였다. 그렇게 두 제자는 예루살렘을 떠나 아마도 자기들의 집이 있었을 것이 확실시되는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루카 24,13) 낙담과 슬픔에 가득한 “침통한 표정”(루카 24,17)의 얼굴로, 그러나 함께 “그동안 일어난 일(곧 예수님의 체포와 사형선고, 그리고 십자가 처형)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루카 24,14)하고 “토론”하면서 길을 가고 있었다. 그동안 예수님께 걸었던 모든 희망이 무너진 것처럼 보였다. 오로지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만을 믿었지만, 그분의 죽음으로 예수님도 끝났고 공동체도 끝났으며 예수님을 따랐던 모든 제자도 끝장인 것처럼 보였다. 그동안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은 그야말로 예언자로서의 모든 것이었지만,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로마인들에게 넘겼고 결국 예수님은 그렇게 십자가형을 당하고 죽었다. 그렇게 예수님이 돌아가신 지 “벌써 사흘째”(루카 24,21), 이젠 모든 것이 완전히 끝났고 더는 살아야 할 의미도, 방향도, 그리고 근거도 없었다.

이런 상황은 우리 인생에도 곧잘 다가온다. 그런 각도에서 두 제자 중 한 제자의 이름이 드러나지 않는 것은 우리 각자의 이름을 대입시켜보라는 말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실망한다. 우리가 자신의 인생에 대하여 가졌던 환상들이 깨지는 때를 만난다. 우리도 “그분은 하느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넘쳤다.”(루카 24,19)라고 종종 믿었다가 언젠가 우리가 생각했던 모습이 깨지는 때를 만나면서 우리가 품었던 우리의 자화상이 깨진다. 그때 우리는 모든 것을 잃은 것처럼 느끼고, 우리 인생이 쓰레기더미 앞에 서는 것처럼 느낀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도피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우리의 인생 여정에서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우리가 함께 이야기하는 한 부활하신 분,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걸으실 것이고 그렇게 걷는 우리 인생의 의미를 알려주실 것이다.

2.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길을 가던 두 제자에게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시면서”(루카 24,15),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루카 24,17) 하고 물으신다. 예수님께서는 뭔가를 알려주고 전달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대화를 듣기 위하여, 그들 마음속에 있는 무엇인가를 이해하시기 위하여, 그들을 동반(동행)하기 위하여 가까이 다가가 함께 걸어가면서 다정하게 물으신다. 예수님의 물음에 클레오파스라는 제자를 통해 듣는 대답은 그동안 모셨던 스승이요 예언자이셨던 분에 대한 애정과 아쉬움이 담긴 내용이다. 예루살렘에서 며칠 동안 일어난 일, 그분을 두고 사람들이 하는 얘기들, 낙담, 여자들과 동료들의 전언과 확인에 관한 내용이었다. 이를 듣고 난 예수님께서도 안타까움이 가득 담긴 음성으로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루카 24,25) 하시며 성경 말씀을 왜 믿지 못하는지, 그리고 왜 읽지 못하는지 물으신다.

이어서 예수께서는 공생활 동안 수도 없이 제자들과 읽고 토론했을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당신 죽음의 필요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다시) 설명해 주셨다.”(루카 24,27) 성서 전체를 해석해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죽음과 부활이 성경 전체의 요약이라고 설명해 주신다. 세상이 불의하고 사악하여 의인을 거부하였고,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짐이 된다.”(지혜 2,14) 하는 말씀처럼 견딜 수 없어 치워야 할 대상으로 예수님을 대했다. 주님의 종이신 의로운 분께서 오로지 하느님의 뜻에 충실하시고 성공과 부, 그리고 권력의 유혹을 거부하시므로 모든 이가 그분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이 말은 많은 성서 구절들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했다는 것을 뜻하는 것만은 아니다. 루카는 이 말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 안에 성서의 전체 메시지가 요약되어 있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곧 예수님의 죽음이 운명적이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을 비추어주는 내용이었다는 것이다. 모든 성경 말씀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서 완성에 이른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셨다. 따라서 그분은 우리도 모든 어두움에서 빛으로, 무덤에서 삶으로, 굳어있는 삶에서 활기찬 삶으로, 구속에서 자유로, 눈먼 삶에서 눈뜬 삶으로, 마비된 삶에서 걸어가는 삶으로, 규칙과 법에서 사랑으로 끌어내실 것이다.

예수님의 삶은 인간적인 눈으로만 보자면 실패이고 허탈함이지만, 하느님께서 이를 은총으로 받아주실 때 전혀 다르게 비친다. 두 제자는 성경 말씀을 믿지 못하여 함께 길을 걸으시는 예수님마저 “눈이 가리어 알아보지 못하였다.”(루카 24,16)

3.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마침내 두 제자가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였다.”(루카 24,28)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길을 걸으면서 적어도 다른 이들을 경청하는 것 하나만은 배웠을 제자들이 예수님께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든다. 우리의 내면이 어두워질 때, 우리 마음에 밤이 엄습해 올 때, 우리도 부활하신 분께 우리와 함께 머무시자고 청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두 제자와 함께 집으로 들어가신다. 그분께서 그들의 손님이 되시어 그들과 함께 계신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루카 24,29-30) 이 모든 동작은 이미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 앞에서 의미심장하게 행하시던 바로 그 몸짓이었다.(참조. 루카 22,19) 사랑으로 내어주시고 선물하셨던 생명의 몸짓, 사랑의 성체성사요 미사이다. 예수님께서 빵을 나누신다. 미사성제에서 우리는 그분을 만나고, 그분은 볼 수 있는 분이 되신다. “그러자 (제자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즉시) (함께 길을 걸어주셨던, 알아보지 못했던, 나그네이셨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루카 24,31) 긴가민가했던 그분의 현존, 그러나 이제 두 제자에게는 차고도 넘친 분명한 예수님의 현존이었다. 그분의 말씀에 “마음이 타오르며”, 영원한 생명과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심으로 이루어진 현존이었다.

『루카는 부활을 본질적으로 ‘열림’으로 이해한다. 우리 마음이 열리고(사도 16,14), 우리의 정신과(루카 24,45) 우리 눈이(루카 24,31) 열린다. 그리고 부활하신 분께서는 우리에게 성서를 열어주시고, 성서의 의미를 풀어주신다.(루카 24,32) 이런 개방성에서 우리는 부활하신 분을 본다. 그러나 이 개방성은 우리가 그분을 놓아야 한다는 뜻도 포함한다. 그분은 늘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지신다. 하지만 부활하신 분께서 우리의 마음과 정신과 눈을 열어주시면 우리는 그분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오른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 가슴 깊이 감동하게 된다. 가슴이 뜨겁게 불타오르면 우리는 다시 사람들에게 돌아간다. 그렇게 가슴이 뜨거워진 제자들은 곧바로 일어나 다른 제자들에게 그들이 체험한 것을 전하려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 부활 체험을 하면 우리는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려고 길을 떠나게 된다.(안셀름 그륀, ‘예수, 인간의 이미지’, 분도, 2009년, 163쪽)』

감동적이고도 기적같은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함께 걷고, 함께 기억하며, 함께 생각하고, 우리에게 물어오시는 분께 함께 대답하면서, 부활하여 영원히 살아계신 예수님의 현존을 거행하라 한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 교회 안에서만 온전히 거행될 수 있다. 그래서 제자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함께 모여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루카 24,33-34) 이는 우리에게도 매 주일, 부활절, 그리고 오늘에도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 있는 곳에서 매번 일어나는 일이다. 성경에 담긴 말씀, 성체성사, 그리고 공동체는 “모든 것을 믿는 데에 어리석고 마음이 굼뜬”, 그러나 지극히 우리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며 당신과의 통교 안에 우리를 기꺼이 다시 모으시는,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을 기리는 특권을 누리는 표징이다.

머물고 기억하며 걷는 것….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 안에 머물기 위해 걸으면서 그분의 행위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걸어야 합니다. 그러나 어디서 왔는지 또 어디로 가고 있는지 유념하면서 걸어야 합니다. 우리는 기억 속에서 걸어야 하고 기억하면서 걸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끔 제대로 걷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끊고 자신 안에 틀어박혀…고독 속에서 갈기갈기 찢기며 그저 이곳에서 저곳으로 가기 때문입니다. 이와 달리, 주님 사랑에 대한 기억은 우리를 하느님의 충실한 백성으로 인식하게 하며 순례자로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걷게 합니다.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과 연대하고 특히 궁핍한 사람들을 돌보며, 가정과 조국의 안녕을 위해 창조적이고 풍요로운 계획들을 실현해 가면서 걷게 해 줍니다.

성모님은 그렇게 걸으셨습니다. 그분은 천사에게 예수님의 잉태 소식을 듣고 사촌인 엘리사벳을 만나기 위해 일어나 여정을 떠나셨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에 관한 모든 일을 마음속에 고이 간직하셨습니다. 성모님은 십자가의 길에서 아드님과 함께하셨고, 오늘 천상 아버지의 집을 향해 순례하는 현세 교회와도 함께 걷고 계십니다. 성모님은 사랑 안에 머무셨으며 하느님의 뜻을 기억하셨습니다. 성모님은 언제나 그분의 여정 가운데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성모님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하셨으며 우리 역시 그렇게 걷도록 우리를 파견하십니다. 그분은 사랑 자체이십니다. 그분은 언제나 여정 가운데 계십니다. 그분은 거리 한가운데에서 사람들 사이를 거니시며 일상의 삶 속에서 그들과 함께하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만나기 위한 여정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분과 함께 머물기 위해 거리로 나가야 합니다. 성체는 길을 걷는 자들을 위한 음식입니다.

…‘우리’라고 하는 작은 세계 속에 갇혀 개인적 이익만 생각하고 그 안에만 머물러서는 결코 예수님에 대한 기억을 되살릴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순례자이자 여정의 길 위에 있는 사람이고 길을 걷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길’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길이신 주님 안에 머물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저 가만히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그렇다고 좌충우돌하는 가운데 사람들을 짓밟으며 길을 가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저 조용히 머물러 있는 것도, 사람들을 짓밟는 것도, 또 월계수 위에서 잠자는 것도, 화들짝 놀라는 것도 원치 않으십니다.……그분은 우리에게 ‘결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희망’을 부어주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여정 중에 평화롭게 수고하는 이들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걷는 여정에 리듬을 부여해 주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함께 행렬을 이루며 걸어가야 할 길이십니다. 다른 사람들의 현존을 느끼고 찬미하며, 앞서 간 사람들 그리고 천상을 바라보며 지금 우리와 함께 있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천천히 이 길을 걸어가기로 합시다. 사랑이신 예수님은 그렇게 걸어가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당신이 사랑하시는 이들을 기억하고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위해 항상 중개 기도를 드리고 계십니다.(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교황 프란치스코, ‘프란치스코 자비’, 생활성서, 2014년, 88-91쪽,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2008년 5월 25일 행한 말씀)』 아멘!(*이미지-ilblogdienzobianchi.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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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오로 가다가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간 제자들

-루카 24,13-35의 거룩한 독서

복음서 저자들이 복음서를 쓴 출발점은 바로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라는 사실의 체험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담은 이 단락이야말로 모든 복음서들이 탄생한 출처가 되는 체험이 기록된 곳입니다.

우선 한두 번 천천히 읽으면서 문맥과 짜임새를 살펴봅니다.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엠마오라는 마을로 내려가는 것으로 장면이 시작됩니다. 예루살렘으로는 ‘올라간다[上京]’고 하기 때문에, 엠마오로는 ‘내려간다[落鄕]’는 표현이 맞을 겁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순간을 정점으로 본다면, 그 이전은 ‘오르막길’이었고 지금 제자들이 걷고 있는 길은 ‘내리막길’이라 하면 되겠군요. 이 내리막길에서 생긴 일은, 크게 보아 예수께서 낯선 이의 모습으로 나타나 제자들과 말씀을 나누시는 장면(13-29절)과 어떤 ‘집’에서 생긴 일(30절 이하), 이렇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겠습니다. 앞부분을 ‘듣기’(말씀 경청)라고 하면 뒷부분은 (쪼개지는 성체를 통해) ‘보기’(31절)에 관한 것이로군요. 그렇게 보면 우리 미사의 구조가 아닌가요? 앞부분은 말씀의 전례에 해당하고, 뒷부분은 성찬의 전례에 해당한다고 보아 무리가 없지요. 미사의 이런 구조는 우리 신앙의 근본 구조이기도 합니다. 각 부분은 또 좀 더 세분할 수 있겠는데, 특히 뒷부분은 30-32절과 33-35절로 나뉩니다. 33-35절은 제자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이 단락 전체를 ‘내려오다다(13-32절) 다시 올라간(33-35절) 이야기’라고 보아도 되겠습니다.

이제 내용을 찬찬히 살펴봅시다. 제자들이 여행길에 접어들었는데(13절), 그 며칠 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해서 서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14절). 그런 중에 예수께서 모르는 사람처럼 다가와 동행하시는데, 제자들이 처음에는 눈에 무엇이 씌어서 못 알아 뵈올 뿐 아니라 ‘침통한 표정’(17절)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말씀을 듣고서는 마음이 뜨거워지고, 그러다가 그분을 붙들고 함께 머물러 주십사 청하고, 마침내 빵을 쪼개어 주실 때 눈이 열려 주님을 알라 뵙고, 마지막으로 곧바로 일어나(33절) ‘유턴U-turn’을 감행합니다.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지요.

길에서 제자들이 겪은 이런 일들에서 그들 마음의 동선動線을 어렴풋이나마 눈치채게 됩니다. 못 알아뵙기(16절)에서 알아뵙기(31절)로, 어둡기(16-17절)에서 밝기(31-32절)로, 실의에 차 옛날로 되돌아가기에서 첫마음으로 되돌아가기로. 아하, 좌절과 시련의 체험이 그 바닥을 칠 때(13-24절) 부활하신 분의 ‘한 말씀’을 비로소 만나고(25-26절), 드디어 그분을 눈으로 뵙는구나(30-31절). 이렇게 우리는 서서히 본문 안으로 조금씩 깊이 들어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지요. 본문 내용에 대해 가능한 한 주의 깊고 정확하게 관찰하려고 노력하면, 본문에 기록된 내용이 지금 이 자리의 나에게 무엇인가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점차로 선명히 깨닫게 됩니다.

우선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17절) 하시는 주님의 첫 번째 개입은, 사실상 영원한 길손인 교회에게, 그리고 우리 각자에게 주시는 질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의기소침, 회의, 좌절…이것이 과연 나의 그것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하겠습니까. 제자들의 ‘실패’ 체험은 그들이 한때 모든 것을 걸었던 이상理想이었던 예수라는 인물이 며칠 사이에 어이없이 무너져 버린 사건에서 기인합니다. 그분의 십자가 처형과 함께 그들의 이상과 희망도 모조리 허물어져 버렸고, 그들은 거대한 공황 상태에 빠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상’이 무너지는 아픔을 체험하는 장소에서만 비로소 ‘실상實相’을 얻어 만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진면목은 이상이나 깃발(이데올로기) 아래서가 아니라 인격 대 인격의 일대일 만남에서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실패와 좌절의 모든 체험은 이런 의미에서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한 필수 과정이라고 할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개인이든 공동체든 현재의 질곡에서 벗어나 참으로 새로이 출발하고 싶다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신앙이라는 반석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부활하신 분을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신앙은 예나 지금이나 쉽기나 어렵기로 치자면 꼭 같습니다. 2000년 전 그날 저녁 엠마오로 내리막길을 걷던 제자들에게 지금의 우리보다 신앙이 더 쉬웠을 리가 결코 없었습니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나?”(25절). 예수께서는 지금 자신을 믿지 못한다고 해서가 아니라, 성경 곧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지 못한다고 꾸짖으십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26절)는 것입니다. 과연 제자들의 실패, 교회의 어둠, 나의 좌절…이 모든 것의 의미가 바로 이 말씀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살기 전에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말씀은 누구나 안다고 생각하는 얘기입니다만, 참으로 그렇게 죽어버린 분께서 살아 계신 당신의 영을 통해 내 안에 몸소 설명해 주시지 않으면(27절) 결코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는 그 설명을 듣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그분과 유사한 처지가 되어야만 합니다. 고통, 좌절, 망신 이런 것들은 바로 그래서 ‘몸에 좋은 것’입니다. 사실 온 성경을 딱 한 가지 말만 하고 있습니다: “죽어야만 산다.” 과연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아야만 했고, 죽어야만 했고, 그래서 다시 사셔야만 했습니다. 이것을 깨달아야 그리스도의 쓰라린 죽음의 의미가 밝아집니다. “아, 그분이 지금 살아 계시는구나! 그런 모습으로 돌아가셨던 분이, 바로 그랬기 때문에, 지금 참으로 살아계시는구나!” 이렇게 되어야 비로소 온 성경도 밝아집니다. 그리고 나면, 이제 세상 사람들의 아픔, 내 교회의 상처, 내 개인의 실패가 의미가 있음을 비로소 깨우치게 됩니다. 그러니 바로 이 지점이야말로 성경을 읽는 빛을 얻는 지점이요, 역사를 읽는 빛을 읽는 지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30절). 직접 이끌어 주시는 성경 해석의 순간이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마음이 뜨거워”(32절)지더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눈이 환히 열리지 않았습니다. 언제 눈이 열립니까? 빵을 쪼개어 주시는 순간입니다. ‘쪼갠다, 나눈다’는 말에 주의를 기울여 보십시오. 예수님의 한평생이 쪼개고 나누신 것이 아니었습니까. 스스로를 쪼개지 않고 이루어지는 사랑이 있던가요. 자신의 몸이 다 쪼개지고 갈기갈기 찢길 정도로 온전히 받아들여진 고통…우리 주님의 한평생이 그런 것이었거니와, 그 한평생의 요약이 바로 마지막 만찬(마르 14,22-24 1코린 11,23-26)이었다면, 이 만찬의 요약은 바로 십자가 사건이었습니다.

이런 생각으로 이 대목에 머물다 보면, 우리 마음속에 문득 다음과 같은 한 음성이 들려옵니다. “내가 너를 참으로 사랑한다. 내가 너를 죽음에 이르도록 사랑한다.” 나를 위해 망가지신 분, 쪼개지신 분, 넘겨지신 분의 이 음성에 마음을 맡긴 채 오래 머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랑의 고백을 참으로 듣게 될 때, 내 눈이, 내 마음이 열리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이 사랑의 고백으로 내 눈이 열리지 않기란 도무지 불가능할 것입니다. 내 살도 같이 쪼개지지 않기란 이제 불가능할 것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요한 6,56-57). 제자들이 이 순간에야 주님을 비로소 알아뵌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리고는 즉시 사라지시는 예수, 이것이 바로 그분께서 오늘 나와 우리 앞에 현존하시는 방식일까요. 스스로를 없이하면서 머무십니다. 안 계신 듯 계시는 것입니다. 내 안에 너무 깊이 들어와 숨으셔서 그런 것일까요. 내 현존으로 하여금 당신 현존이 되도록 하시기 위함일까요. 아, 이것이야말로 삼위일체의 현존 방식이요 십자가의 현존 방식이로군요.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낸 후 느보 산으로 올라가 자취를 영영 감추어버린 모세와도 같은 현존 방식(신명 34장), 낳았으되 자기 것이라 주장하지 않고, 공을 이루었으되 거기 머물지 않는다는 도道의 현존 방식입니다(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 <노자> 2). 주님께서 자취를 감추신 후 제자들은 당황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즉시 ‘일어나anastantes’(부활하여!) 예루살렘으로, 그 “참혹하도록 아름다운 첫마음으로”(박노해) 되돌아갑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정작 부활한 이는 제자들인 것입니다.

함께 산책하시면서 이미 기도하고 계셨으리라 믿습니다. 이제 혼자 계속 기도하시도록 저는 떠납니다. 되새김으로는, “그리스도는 반드시 죽었다가 자기 영광을 누리셔야만 했다”는 구절이나, 혹은 마음에 와닿는 다른 구절(미드라쉬를 통하여 끌려들어 온 다른 성경 구절도 괜찮습니다)을 사용하실 수 있겠지요. 이 되새김이 그분처럼 ‘즉시 사라지는 현존 방식’을 훈련하도록 우리 일상을 이끌어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이연학, 성경은 읽는 이와 함께 자란다-거룩한 독서의 원리와 실천, 성서와함께, 2010년 6쇄, 117-126쪽]

2 thoughts on “루카 24,13-35(부활 제3주일 ‘가’해)

  1. “우리는 사랑 안에 머물기 위해 걸으면서 그분의 행위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걸어야 합니다.” “어디서 왔는지 또 어디로 가고 있는지 유념하면서 걸어야 합니다.” “우리는 기억 속에서 걸어야 하고 기억하면서 걸어야 합니다.” 마음에 닿으며 새겨봅니다~

  2. 모든 말씀이 스폰지에 물이 포옥 적셔지듯 마음에 적셔질수 있는것 또한 특별한 은사라 생각합니다. 마음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행동전달되기위해 더 노력해야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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