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순교 성인들

우리 한국 순교자 가운데에는 놀라울 만큼 어린 나이에 신앙을 증거하고 순교한 이들이 있다. 103위 성인 가운데 가장 어린 순교자는 13세에 순교한 성 유대철 베드로(1826~1839)이고, 2014년에 시복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가운데에는 12세에 순교한 복자 이봉금 아나스타시아(1827?~1839)가 있다. 이들의 순교 이야기를 듣다 보면, 어린 나이에 어떻게 그러한 고통을 견디고 죽음 앞에서도 신앙을 지킬 수 있었을까 하는 놀라움과 함께 질문이 생긴다.
과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성 유대철은 13세의 나이로 체포되어 여러 차례 신문과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복자 이봉금 역시 12세를 넘기지 못한 어린 나이에 체포되어 회유와 위협을 받았지만,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았으며, 옥중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보아야 하는 고통까지 겪었다.
이러한 사실을 단순히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정신력과 의지를 지닌 아이들의 이야기로만 이해해서는 충분하지 않다. 심리학적·의학적 관점은 인간이 극한의 상황에서 어떻게 고통을 견디는지를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지만, 순교가 신앙 안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까지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교회는 순교를 무엇보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최고 증언으로 이해한다. <가톨릭교회교리서>는 순교자가 죽기까지 그리스도를 증언하며, 그리스도와 사랑으로 결합된 가운데 죽음을 견딘다고 가르친다. 또한 순교는 인간의 자연적인 용기만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굳셈의 덕을 통한 행위이며, 성령께서는 당신의 은사인 굳셈을 통하여 신자가 하느님의 뜻에 충실하도록 이끄신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831; 2473 참조)
그러므로 어린 순교자들의 용기는 단순한 인간적 강인함으로 환원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자유와 의지가 사라진 것도 아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은총은 인간의 자유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유를 움직이고 완성한다. 인간은 은총에 의해 강제로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라, 은총에 이끌려 자유롭게 하느님께 응답하는 존재이다. 교회가 인간을 이성적이며 자유로운 인격으로 이해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730-1734 참조)
이 점에서 어린 순교자들의 신앙은 더욱 놀랍다. 그들은 단순히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종교적 습관을 반복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나이와 능력 안에서 신앙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신의 삶의 선택으로 드러냈다. 복자 이봉금은 일곱 살 무렵부터 천주를 섬겨 왔다고 증언했으며, 성 유대철 역시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하다가 박해가 시작되자 스스로 자수하여 신앙을 증거하였다.
따라서 어린 순교자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단순히 “어린 나이에도 이렇게 강한 의지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만이 아니다. 그들의 삶은 인간의 힘이 얼마나 강한가를 보여주는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약함과 한계 안에서도 하느님의 은총이 한 사람의 자유로운 신앙의 응답을 통하여 얼마나 깊이 일하실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증언이다.
순교는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고통을 초월한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 안에서 인간이 자신의 자유를 하느님께 내어 맡기고, 성령의 은총에 힘입어 끝까지 신앙을 증언한 사건이다. 그래서 어린 순교자들의 죽음은 단순한 비극이나 영웅담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자유가 만나는 자리에서 이루어진 신앙의 증언이다.
어린이라고 해서 성덕을 향한 부르심이 늦게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성덕은 어른이 된 뒤에야 비로소 시작되는 삶의 단계가 아니다. 어린이와 청소년도 자신의 나이와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분께 자유롭게 응답할 수 있는 신앙의 주체이다.
어린 순교자들은 바로 그것을 보여준다. 신앙의 깊이가 반드시 나이와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만이 아니라, 주어진 삶 안에서 누구를 향하여 살았으며, 누구를 위하여 자신의 자유를 내어놓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들의 어린 나이는 신앙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은총이 인간의 삶 안에서 얼마나 일찍부터 일하실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표지가 된다.
※ 함께 읽기: 「청소년의 성덕聖德과 성화聖化의 가능성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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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읽기: 「(배교한 회장에게) “저와 같은 어린 사람에게 갖가지 고통을 굳세게 참아 내라고 권면해야 하실 텐데, 주객이 전도되었으니 이것이 웬일입니까? 빨리 회개하여 예수를 위해 죽으십시오.”(성 유대철 베드로)
“일곱 살 때부터는 천주를 섬겨 왔으니, 오늘 천주님을 배반하고 욕을 하라고 하시어도 그렇게 할 수 없어요. 천 번 죽어도 그렇게는 못 하겠어요.”(복자 이봉금 아나스타시아)
1839년 기해박해로 교수형을 받아 스러진 소년 성인과 소녀 복자 유대철과 이봉금. 사형 당시 그들의 나이는 겨우 13세와 12세(추정)였다. 성인과 복자는 각각 우포도청과 전주 감옥에서 모진 고문 끝에 하느님 품으로 돌아갔다.
성 유대철은 감옥에서 사도의 직분을 행해 배교한 회장을 직접 타이르거나 배교한 자를 회개케 하기도 했다. 복자 이봉금 또한 어머니의 옥중에서 인간적으로 의지할 데 없을 때도 어른스럽게 순교를 결심해 많은 이들을 감복게 했다.
남다르게 키워 낸 신앙
성 유대철은 서울의 유명한 역관 집안에서 태어났다. 성인은 외교를 고집한 어머니에게도 언제나 지극한 효성을 보였다. 박해가 시작되자 마음속에 순교하고자 하는 열렬한 욕망이 생겼다. 성 유대철이 옥에 갇히자 옥사장들은 ‘배교한다’는 말을 한마디만이라도 하게 하려고 갖은 혹형을 가했다.
하루는 포졸이 구리로 된 담배통으로 허벅지를 들이박아 살점을 한 점 떼어내면서 “이래도 천주교를 버리지 않겠느냐?”고 소리쳤다. 그러자 성인은 “그러믄요. 이것쯤으로 배교할 줄 아세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포졸은 벌건 숯덩이를 집어 들어 입을 벌리라고 했다. 성 유대철은 “자요” 하고 입을 크게 벌리자 포졸들은 놀라 물러나고 말았다.
고문을 당한 끝에 까무러친 유대철을 데려와 다른 죄수들이 정신이 들게 하느라고 허둥지둥할 때 정신이 든 성인의 첫마디는 “너무 수고를 하지 마시오. 이런 것으로 해서 죽지는 않을 거예요”였다. 이 말에 포졸들도 놀라워했다. 또 언제는 자기 몸에서 헤어져 매달려 있는 살점을 떼어서 재판관들 앞에 던지며 웃자 관원들은 모두 치를 떨었다.
복자 이봉금은 정해박해를 피해 피신한 부모에게서 태어나 기해박해 때 전라도 광주에서 귀양 중이던 복자 홍재영(프로타시오, 1780~1840년) 집으로 이주했다. 복자 이봉금은 열 살 무렵 교리문답과 아침·저녁 기도를 배운 뒤, 집을 방문한 프랑스 신부님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나이는 어렸지만, 소녀의 마음에 감동한 신부는 첫영성체를 허락했다.
하지만 이내 신자들과 체포돼 전주로 압송됐다. 포졸과 옥리들은 복자의 나이가 어린 데다 얌전했으므로 동정심이 들었고 배교해 목숨을 건지라고 간청했으나, 복자 이봉금은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 이후로도 복자를 여러 차례 관장 앞으로 끌어내 위협을 했지만, 결코 여기에 굴복하지 않자 끝내 고문을 가했다.
거룩한 부모를 닮아간 자녀
열절한 신앙을 지닌 그들에게는 성인·복자 부모가 있었다. 성 유대철의 아버지는 성 유진길(아우구스티노, 1791~1839), 복자 이봉금의 어머니는 복자 김조이(아나스타시아, 1789~1839년)이다.
성 유진길은 신부만큼 거룩한 생활을 하며 저명한 학자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을 개종시켰고 아들 성 유대철의 입교를 이끌었다. 유대철은 아버지 유진길이 옥에 갇히자 1839년 8월 자수해 아버지를 뒤따랐다.
복자 김조이는 남편 이성삼(바오로)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해 성가정을 이뤘으며, 박해 때 문초를 받고 돌아온 딸에게 “너는 고문을 당하면 꿋꿋하게 견디어 낼 힘이 없어 틀림없이 배교를 하게 될 거다”라고 훈계하며 딸의 신앙을 굳건히 했다. 오늘날 학업이나 휴식 때문에 미사나 주일학교 등 자녀의 신앙생활에 대한 관심과 참여를 소홀히 하는 부모 역할에 경종을 울리는 대목이다.
복자 이봉금의 순교 얼 서린 전주 옥터
복자 이봉금이 옥중에서 교수형을 당한 전주 옥터는 전북 전주시 완산구 현무2길 59-25 한국전통문화전당 뒤편에 자리하고 있다. 전주성 내에 가장 큰 옥이 있던 장소로 2014년 9월 3일 성지로 축복됐다.
조선 시대 전주는 전라도의 중심지로 각지에서 체포된 신자들이 전주 옥에 갇혀 고문당하고 순교했다. 신유박해(1801년) 때는 동정 부부로 유명한 복자 유중철(요한, 1779~1801년)과 그의 동생 복자 유문석(요한, 1784~1801년)이 교살됐다.
정해박해(1827년) 때는 240여 명의 신자들이 감금돼 고초를 겪었다. 복자 이순이(루갈다, 1782~1802년)의 동생 복자 이경언(바오로, 1792~1827년)도 이때 순교했다. 기해박해(1839년) 때는 복자 김조이(아나스타시아, 1789-1839년)와 복자 심조이(바르바라가, 1813~1839년)가 옥중 얻은 병과 형벌로 인한 상처로 옥사했다. 특히 복자 김조이는 그녀의 어린 딸 복자 이봉금이 바라보는 가운데 순교했다.
옥은 고통스러운 곳이기도 했지만 신자들에게는 기도할 수 있는 곳으로서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증언하는 곳이기도 했다. 기해박해 때 전주 숲정이 성지에서 순교한 복자 이일언(욥, 1767~1839년), 복자 신태보(베드로, 1769?~1839년), 복자 이태권(베드로, 1782~1839년), 복자 김대권(베드로, ?~1839년), 복자 정태봉(바오로, 1796~1839년)은 정해박해 때 이곳에 12년 동안 갇혀 있었다. 그들은 옥중에서도 밤마다 등불을 켜고 함께 성경을 읽으며 큰 소리로 기도했다.」(박효주 기자, 가톨릭신문, 2024년 5월 5일, 제3391호 11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