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팔일 축제 전례 말씀과 간단한 묵상

·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 사도 2,14.22-33 / 시편 15 / 마태 28,8-15 (천사의 월요일)

·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 사도 2,36-41 / 시편 32 / 요한 20,11-18

·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사도 3,1-10 / 시편 104 / 루카 24,13-35

· 부활 팔일 축제 목요일: 사도 3,11-26 / 시편 8 / 루카 24,35-48

·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사도 4,1-12 / 시편 117 / 요한 21,1-14

·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사도 4,13-21 / 시편 117 / 마르 16,9-15

·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사도 2,42-47 / 시편 117 / 1베드 1,3-9 / 요한 20,19-31 (부활 뒤 여드레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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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 28,10)

위대한 부활의 축제 뒤에 이어지는 주간의 첫날, 신앙의 일상이 시작된다. 이제 우리의 신앙은 주님 부활 이전의 삶과 같을 수가 없다. 우리가 부활 때 노래하고 말하는 것이 참되다면,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세상 끝날까지 당신의 사람들과 함께 머무르신다는 사실을 성령의 은총으로 알게 해 주실 때야 비로소 모든 인간은 삶의 의미를 재발견하게 된다.

복음사가들이 체험하고 기록한 부활의 사실들은 하나의 증언이다. 당시에도 그랬듯이 오늘날에도 이 증언은 도전을 받고 있다.

성 마태오는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가 동틀 녘 무덤 근처에서 천사를 만난 일을 전한다. 그들이 천사의 말에 따라 사실을 받아들이고 순명하며 무덤을 떠날 때,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마주 오시어 그들을 만나신다. 그리고 그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확인해 주신다.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빈 무덤 곁에서는 부활을 부정하고 믿기를 거부하는 새로운 반대 세력이 자라난다. 두 여인이 길을 가는 동안, 경비병들은 성안의 지도자들에게 간다. 그들은 예수님의 무덤을 봉인하고 감시한다는 것이 소용없음을 안다. 지상의 그 어떤 권력도 하느님의 사업에 저항하거나 맞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부활의 진실을 받아들일 수 없기에 세상에 하나의 구차한 ‘설명’을 내놓고자 한다. 하지만 그 설명은 주님을 만나기를 거부하는 이들만을 속일 수 있을 뿐이다.

이날은 온통 ‘잘못된 이해’로 꼬여 있는 듯이 보인다. 여인들은 시신에 향유를 바르러 갔다가 빈 무덤을 발견하고, 사도들은 당시의 관습에 따라 남성우월주의적인 태도로 여인들의 감정 섞인 증언을 믿지 않으며, 산헤드린은 나자렛 사람의 실종 앞에서 터무니없는 은폐 공작을 꾸며낸다. 주님의 실종 소식에 대한 모든 이의 반응에서 우리가 다시 발견하게 되는 주제는 거짓과 꾸며낸 이야기인 듯하다. 오늘날도 여전히 마찬가지이다! 많은 이가 예수님을 단순히 신화적 인물로 여기고, 부활 이야기를 교훈을 주기 위한 경건한 우화쯤으로 생각한다. 또 어떤 이들은 어떤 식으로든 바티칸이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면서 음모론을 상상하고 사건 전개에 관해 기상천외한 가설들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리스도인은 분명한 사실을 받아들인다. 예수님의 삶과 사명, 수난과 죽음, 그리스도인은 부활이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임을 알고, 이를 직접 겪은 이들의 증언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이는 그리스도인들을 믿음의 차원으로 이끈다. 빈 무덤 위에 우리 가톨릭 신앙 전체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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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요한 20,18)

네 번째 복음사가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부활 체험을 전한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고통과 죽음 앞에 홀로 남겨지셨을 때, 제자들과 함께 그분과의 이별과 소외의 아픔을 겪었다. 성금요일 저녁, 당국은 그분의 시신을 내주었고,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과 니코데모는 그분을 무덤에 모신다.

만일 무덤과 시신이 제자들에게 남은 전부였다면, 그것은 추억이나 기억의 징표나 기념의 장소, 유해를 중심으로 하나의 유물에 묶인 공동체에 머물렀을 것이다.

마리아가 무덤 곁에서 울고 있다. 그녀는 부활의 환희를 전혀 느끼지 못한다. 예수님의 머리맡과 발치에 앉아 있는 천사들도 거의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녀는 하느님의 사자使者들 사이에 있는 ‘텅 빈 공간’만을 본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그녀의 슬픔이다. 그녀는 그분을 어디에 모셨는지 알고 싶고 확인하고 싶어 하며, 그분을 붙들고 그분 곁에 머물고 싶어 한다. 그녀가 상상하는 이 미래는 무덤을 떠나는 순간 그녀를 무너뜨린다.

바로 그 순간 그녀의 눈이 열린다. 그녀는 익숙한 음성을 듣고 그분이 살아계심을 알아본다. 주님은 과거의 추억이 아니라, 그녀의 미래, 그리고 믿는 제자들의 미래가 될 미래를 말씀하신다. 당신의 아버지이자 우리의 하느님이시며 우리의 아버지이신 분께로 올라가신다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고통에 너무 눈이 멀어 간절히 부르짖고 있는 주님의 현존을 알아보지 못할 때가 있다. 성금요일에 너무 머물러 있는 나머지, 고개를 돌리고 눈을 들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 참으로 부활하셨음을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다. 스승의 시신이 사라진 데에 망연자실한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말이다. 그녀는 이미 겪고 있는 고통에 또 다른 고통을 더한다. 이제는 공경할 시신조차 남아 있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큰 착각이었다. 주님께서 그녀에게 다가와 이름을 부르신다. 이스라엘에서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 사람을 깊이 알고 믿는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사랑과 슬픔을 잘 알고 계시며, 그녀가 고통에서 벗어나 기쁨으로 돌아서도록 초대하신다.

우리도 역설적으로 고통 안에 머무를 수 있다. 고통을 극복하는 단 하나의 방법은 그 고통에 매달리지 않는 것이다. 너무도 자주 우리는 십자가의 고통에 우리 자신의 고통을 투사하며 성금요일에 머물러 있을 때가 많다. 부활 시기는 우리를 변화로 이끌고,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며, 위에 있는 것들을 찾고, 마침내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라고 우리를 재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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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루카 24,30)

복음사가들은 질문하는 이들에게 언제나 새로운 응답을 주는 파스카 체험을 하나의 이야기로 응축하여 전해준다.

성 루카는 부활하신 날, 길을 가던 두 제자를 그린다. 그들은 예루살렘과 다른 이들의 공동체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와 자신들을 묶고 있던 과거를 뒤로하고 싶어 했지만, 마음에 짊어진 무게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께서는 단죄되셨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 그분은 약속된 구원자일 수는 없다. 두 사람 모두 자기 생각에 잠겨, 절망의 길을 함께 걷고 있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다.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만으로는 죽음을 넘어설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세와 예언자들을 언급하실 때 그분이 무슨 뜻으로 말씀하시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저녁이 되어, 만찬의 시간에 그분이 빵을 떼어 나누시며 주님을 찬미하실 때, 그들의 눈과 마음이 열린다. 예수님을 더는 눈으로 보지는 못하지만, 그분이 살아 계시며 거기에 머물러 계심을 확신한다. 말씀과 식탁을 통하여 그분을 만날 수 있음을 깨닫는다. 이 확신으로 그들은 발길을 돌려 예루살렘, 제자들의 공동체로 되돌아간다. 바로 그곳에서 그들은 부활의 사건들을 모여 이야기하고 토론한다. 그 사건들 위에 신앙의 근본이 세워진다. “주님께서 참으로 되살아나시어 (사도들 가운데 첫째인) 시몬에게 나타나셨다”라는 말 안에,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파스카 체험도 자리를 잡고 있다.

엠마오의 제자들은 슬프다. 집으로 돌아가는 그들의 발걸음은 어둡고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하다. “우리가 희망을 걸었었다”라는 말은 복음 전체에서 가장 낙담한 고백이다. 그것은 더 이상 믿지 않는다는 뜻이며, 실패와 환상과 패배를 인정하는 말이다. 아니, 기대를 모았던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희망이 아니었다. 그분도 그 이전의 다른 이들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다. 어떤 구원도, 어떤 전망도 없다. 의로운 이조차 많은 이들처럼 죽임을 당했다.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제자들 역시 슬픔에 휩싸여 곁에서 함께 걷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다. 더구나 이 낯선 이가 자기들에게 일어난 일을 모르는 듯 보이자 거의 언짢아지기까지 한다. 하느님께서 언제나 한 걸음 앞서 계시다는 것을, 고통에 머물러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언제쯤 깨닫게 될까. 그러나 제자들은 마음을 돌이켜야 했고, 주님께서는 성경을 살피며 믿음의 빛으로 일어난 일을 다시 읽도록 그들을 초대하신다.

마침내 빵을 떼는 동작 앞에서 그들은 그분을 알아본다. 마치 복음사가가 오늘 우리에게, 말씀과 빵을 떼는 표징을 통해서만 부활하신 분을 알아보고, 그분을 체험하며, 그분과 함께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해 주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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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팔일 축제 목요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루카 24,46)

예수님을 알았던 남녀들이 그분의 부활을 증언한다. 그분이 살아계신 모습으로 다가오셨고, 자신들의 눈앞에 자신을 내보이셨다고 말한다. 부활은 세상의 모든 경험적 한계를 넘어서는 사건이기에, 그 실재를 전달할 수 있는 적절한 용어나 상투적인 문구가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제기될 질문들을 염두에 두면서 말과 이미지를 찾아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표현하려고 애쓴다.

루카복음이 마무리되는 마지막 부활의 만남 장면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사도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의 모습은 낯설면서도 친숙하다. 그분은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사도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여러 설명이 필요한 많은 사람들처럼 그분을 ‘유령’으로 생각한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당신의 몸을 만져보게 하시고, 그들의 눈앞에서 음식을 드신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은 모든 선포의 기초이기 때문에, 그 믿음에는 어떠한 의심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죽음과 부활의 도시 예루살렘이 이제 사도들이 약속된 성령을 받고, 모든 민족에게 증인이 되게 하는 전능한 힘을 받는 도시가 된다. 엠마오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분에 관해 이야기하자 주님께서 오신다. 그리고 평화를 주신다. 우리도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을 선포하고 이웃에게 그분에 관해 이야기할 때 주님께서 오신다. 그리고 평화를 주신다. 세상이 주는 평화나 일시적인 휴전, 체념에 가까운 우울한 평화가 아니라 오직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평화이다. 하지만 너무나 아름다워서 믿기 어려웠기에 사도들마저 의심한다. ‘예수님은 과연 실재하시는가, 아니면 유령인가?’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음식을 드신다. 그분은 실재하며 현존하신다. 우리는 역사의 주름 사이에서 길을 잃은 어떤 유령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나자렛 예수님을 선포한다. 우리의 믿음은 구체적이며, 신화가 아닌 사실 위에 세워져 있다. 우리가 주님의 현존을 받아들일 때 그분께서는 성경을 이해하는 지혜, 하느님의 말씀을 깨닫는 능력을 열어주신다. 그리하여 우리가 세상과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읽고 해석할 수 있도록 하신다. 그래야만 우리는 하느님 현존의 복음을 선포하고, 우리가 먼저 체험한 회개와 죄의 용서에 관한 신뢰할 만한 증인이 될 수 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여전히 우리를 놀라게 하시고, 말씀을 받아들이도록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어주시도록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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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제자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요한 21,13)

요한복음은 상징이 가득한 만남의 묘사로 끝을 맺는다. 베드로와 다른 여섯 제자가 티베리아스 호숫가에 있다. 그곳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시기 전 그들이 머물던 장소이다. 베드로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까마득히 잊은 채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라고 말하고, 다른 이들도 그와 함께한다.

어부들이 선호하는 밤에 그들은 호수로 나간다. 하지만 아침이 되어 빈 그물을 안고 돌아온다. 그때 호숫가에서 누군가 물고기가 좀 있느냐고 묻는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을 위해, 다른 이를 위해 나눌 것도, 아무것도 없다. 아침은 고기 잡기에 좋은 시간이 아닌데도, 아직 알아보지도 못한 누군가의 말에 의지하여 그물을 던지고 수많은 물고기가 잡힌다. 그때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의 마음이 열린다. “주님이시다!”라고 그가 외친다. 공동체 안에서의 위치에 걸맞게 요한은 주님을 가장 먼저 알아보고, 베드로는 가장 먼저 주님께 달려간다. 다른 이들은 153마리의 큰 물고기가 가득한 그물을 끌고 뒤따른다.

호숫가에서의 만남에는 묘한 두려움과 긴장이 가득하다. 아무도 “누구십니까?”라고 감히 묻지 않는다. 그분임을 알고 있지만, 동시에 낯설고 뭔가가 달라진 느낌을 받는다.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직접 드시지 않고 빵과 물고기를 집어 그들에게 주신다. 그들은 그분의 손에서 빵과 생선을 받아든다.

베드로는 제자 중 가장 나중에 회개한다. 그의 마음에는 너무나 큰 아픔이 있고, 그의 여정도 실패처럼 보인다. 하녀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한 일이 그를 깊은 절망에 빠뜨렸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이 사실이지만, 자신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다시 고기를 잡으러 간다. 3년 전 주님과 미친 듯한 모험을 시작하며 내려놓았던 그 그물을 다시 잡는다. 오랜 친구들도 그를 격려하기 위해 따라나선다.

하지만 흔히 그렇듯이 밤샘 실패에 조롱까지 더해진다. 밤새 아무것도 잡지 못했고, 모두의 기분은 참담했다. 하지만 인간의 열매 없는 공허한 밤이 끝날 때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 베드로를 기다리셨던 것처럼 우리가 바닥을 칠 때 주님은 우리를 다시 일으키시기 위해 그곳에 계신다. 낯선 이의 질문에 제자들은 겨우 짧게 대답한다. 그리고 곧 사건이 벌어진다. 3년 전 같은 장소에서 들었던 그 말씀, “깊은 데로 저어 나가라.” 하던 그 말씀이 울려 퍼진다. 그들은 놀라움과 침묵 속에 깊은 데로 노를 저어 나아가며 서로를 바라본다. 그물을 던지자 물고기가 그물에 가득 찬다. 예상치 못한 현실을 가리키는 새로운 표징, 바로 주님이시다. 베드로를 구렁텅이에서 끌어올리기 위해 주님께서 직접 오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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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마르코복음은 열한 사도의 증언에 대한 신뢰를 가르치는 교훈으로 끝을 맺는다. 그들의 증언은 교회의 믿음의 기초이다. 예수님께서 친히 그들을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부르셨다.

성금요일 이후 실망과 희망을 잃은 그들은 도시에 머물러 있었다. 기록에 따를 때 주님을 가장 먼저 만난 마리아 막달레나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맡기신 사명을 제자들에게 설명한다. 엠마오로 가던 길에 주님과 동행했던 두 제자도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사도들은 여인의 증언에도, 두 제자의 증언에도 슬픔과 탄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예수님께서 친히 그들 곁에 오시고 증인들의 말을 믿지 않는 그들의 불신을 꾸짖으실 때야 비로소 그들의 눈과 마음이 열린다. 그분을 뵙고 나서야 그들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셨고 이제 자신들의 사명이 된 하느님의 복음이 끝없는 미래를 가지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사명이 “온 세상”과 “모든 피조물”, 즉 살아있는 모든 생명의 공동체를 포함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마르코복음의 본래 결말은 부활 당일 여인들이 겁에 질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도망치는 것으로 갑작스럽게 끝난다. 그래서 후대 복음사가의 한 제자는 온 공동체가 알고 있던 부활 발현 사건들을 요약하고 결론을 덧붙일 필요를 느꼈다. 그 결론은 실로 걸작이다. 곧 제자들이 온 세상, 모든 피조물에게 가서 복음을 선포하라는 초대를 받는다는 말씀이다.

이를 위해 제자들 자신이 먼저 불신을 극복하고 자신의 의심과 마주해야 했다. 부활 팔일 축제의 끝자락에서 이 말씀은 부활을 직접 체험한 제자들조차 자신의 불확실성과 싸워야 했음을 상기시킨다. 우리 신앙에 의심이 생긴다고 해서 겁먹지 말아야 한다. 우리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은 건강한 일이며, 지성적으로 우리 신앙의 진리를 심화하기 위해 우리의 불안정함을 깨닫는 것은 꼭 필요한 과정이다. 주님은 깨지지 않고 변함이 없는 교리만 가득한 미라가 아니라, 역동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제자를 필요로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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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2일 부활 제2주일(하느님의 자비 주일)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요한 20,26)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 사도들은 홀로 남았다. 그들은 적대적인 이들이 두려워 문을 걸어 잠갔다. 스승과 3년이나 함께 지냈지만, 그분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엄하게 꾸짖으셔야만 했다.(참조. 루카 24,25) 그들의 사고방식이 지나치게 세속적이었기 때문이다. 십자가 위에서 무력하게 돌아가신 그리스도를 보며 그들은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아무도 너희 기쁨을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 하신 말씀을 잊은 채 겁에 질린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마침내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보고 기뻐했으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성령을 받아라!” 하신 말씀에 안도했다. 하지만 그들이 성령을 받아 정신과 마음이 정화되고, 하느님의 영광을 선포하며 이방인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할 용기를 얻기까지는 오순절을 기다려야 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하여 인간에게 다시 다시 오셨고, 인간은 그분의 손에 자신을 맡기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시며 말씀하신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하신 것처럼, 오늘날 주교는 서품받는 신부들에게 안수함으로써 성령의 힘을 전한다. 이 힘으로 사제들은 성사를 거행하고 죄를 사할 수 있게 된다. 모든 성사는 단순히 그리스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행동하시는 사건이다. 성사를 베풀 때 교회는 신자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기 위해 십자가 발치에 서 있는 셈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인간에게 강요하지 않으신다. 인간이 스스로 한 걸음을 내딛기를 기다리신다. 하느님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당신께 마음을 여는 이를 구원하신다. 하느님께서 가까이 오시니, 인간도 그분께 가까이 가야 한다. 그러면 하느님과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교회 안에서 같은 길 위에서 만나게 된다.

그리스도는 단지 인간만도, 단지 하느님만도 아니시다. 그분은 참 하느님이시며 참 인간이시다. 이 이중적 본성 덕분에, 그분은 인류와 하느님 사이에 놓인 다리와 같다. 그리스도께서 하느님께 바치신 희생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를 없애셨다. “그분은 단 한 번 자신을 바치심으로써 이 일을 이루셨다.”(히브 7,27) 그러므로 인간은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으며”, “그분은 언제나 살아 계시기” 때문에 확신을 가질 수 있다.“(히브 7,25 참조)

이처럼 그분의 놀라운 본성과 완전한 희생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는 유일한 중개자이시며 대사제이시다.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은 아버지께 돌아가고,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께서는 인간에게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신다.

아버지께서 인간에게 내미시는 자비로운 손을 붙잡고, 우리의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가장 쉬운 길이다. 이는 가난한 이의 부르짖음이 주님의 귀에 이르러, 그가 모든 고통에서 구원받았다는 시편의 의미이기도 하다.

하느님의 자비 주일이다. 오늘의 독서들은 모두 자비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입당송에서 시작하여 시편에서 되풀이되고,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에게 나타나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보여 주신 복음 말씀에서 절정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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