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11,1-45(사순 제5주일 ‘가’해)

이제 부활절이 가까운 시점에서 교회는 오늘 복음을 통하여 예수님 부활의 예표로서 라자로 부활의 표징을 묵상하도록 우리를 이끈다.(*이미지 출처-ilblogdienzobianchi.it)

“돌을 치워라!”(요한 11,39)

1. “마리아와 그 언니 마르타가 사는 베타니아 마을의 라자로

복음은 “어떤 이가 병을 앓고 있었는데, 그는 마리아와 그 언니 마르타가 사는 베타니아 마을의 라자로였다.”(요한 11,1)라고 시작한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체류하시는 동안 사랑하는 이 친구들을 자주 찾으셨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근교 베타니아라는 마을에 사는 이 남매들의 가정에서 마르타의 따뜻한 환영과 마리아의 세심한 경청, 그리고 라자로의 진지한 우애를 즐기곤 하셨다.(참조. 루카 10,38-42) 라자로의 누이들은 오빠 라자로가 병이 들어 앓게 되자 당시 멀리 계시던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병을 앓고 있습니다.’ 하고”(요한 11,3) 소식을 전하였다. 친구가 아파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데 이를 모른 체하실 수 없는 예수님이었다. 오늘날도 예수님과 우정을 나누는 이들이 아픔을 겪을 때, 곧 인생의 고통 앞에서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과 우정이 흔들리는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이를 나 몰라라 하시는 분이 아니다.

소식을 접하신 예수님께서는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 병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요한 11,4) 하신다. 그런 인생고人生苦를 통해 인간사 안에 개입하시어 인간을끝까지”(요한 13,1)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 영광을 드러내시리라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죽을 병”과 “하느님의 영광”을 대비하듯 말씀하시면서 질병이 죽음의 승리를 의미하지는 않으며, 죽음이 결코 승리할 수 없음을 밝히신다. 예수님께서는 남매들을 “사랑하셨으나” 소식을 접하시고도 “계시던 곳(요르단 강 건너편)에 이틀을 더 머무르셨다.”(요한 11,5-6) 예수님께서는 사흘째가 되어서(부활에 대한 암시?) 제자들에게 “다시 유다로 가자.”(요한 11,8) 하신다. 이에 제자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스승님, 바로 얼마 전에 유다인들이 스승님께 돌을 던지려고 하였는데, 다시 그리로 가시렵니까?”(요한 11,8) 한다.

예수님께서는 “낮은 열두 시간이나 되지 않느냐? 사람이 낮에 걸어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어디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밤에 걸어 다니면 그 사람 안에 빛이 없으므로 걸려 넘어진다.”(요한 11,9-10) 하시며 주님의 때, 더는 어찌할 수 없는 어둠의 때가 오기 전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어서 아버지께서 요청하신 대로 당신이 해야 할 바를 하시겠다는 강한 의지를 피력하시고, “우리의 친구 라자로가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요한 11,11) 하신다. 죽은 것이 아니라 실제 잠이 든 것처럼 오해한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님, 그가 잠들었다면 곧 일어나겠지요.”(요한 11,12) 하면서 그쪽으로 가지 않고 싶어 하는 내색을 내비친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라자로는 죽었다. 내가 거기에 없었으므로 너희가 믿게 될 터이니, 나는 너희 때문에 기쁘다. 이제 라자로에게 가자.”(요한 11,15) 하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열두 제자 중에서 유일하게)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가 (충동적이고도 도발적으로 반응하면서) 동료 제자들에게,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 하고 말하였다.”(요한 11,16) 토마스가 순간적으로 ‘욱’하여 말한 듯이 보이지만 토마스의 말에는 의외로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요한 12,26)이라는 뜻깊은 명제가 담겨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 설령 죽음에 이를지라도-오늘 복음의 끝에 드러날 것이다-끝까지 예수님을 따라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2.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예수님께서도 눈물을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베타니아로 돌아가셨을 때는 “라자로가 무덤에 묻힌 지 벌써 나흘이나 지나 있었다.”(요한 11,17)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요한 11,21-22) 하면서 예수님을 향한 신뢰가 담긴 말을 원망 조로 쏟아낸다.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에는 죽음이 지배할 수 없으므로 오빠가 죽은 것은 예수님이 멀리 계셨기 때문이라는 믿음을 고백한다. 그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는 예수님 말씀에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요한 11,23-24)라면서 마지막 날의 ‘몸의 부활에 관한 신앙’까지 고백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25) 하시면서 마르타가 한 걸음 더 나아가도록 초대하신다. 마르타는 마침내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요한 11,27) 하고 최종적인 고백을 한다.

마르타를 만나신 예수님께서 “가만히” 마리아를 찾으시자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계신 곳으로 가서 그분을 뵙고 그 발 앞에 엎드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요한 11,32) 하고 마르타와 같은 내용으로 예수님께 외친다. “그 발 앞에 엎드려”, 이어지는 구절에서 “마리아도 울고…”(요한 11,33)에서 보듯이 분위기는 마르타의 경우보다 훨씬 더 감정적이고 슬프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어서 “그분 발 앞에 엎드리지만” 슬픔이 앞서 그 슬픔을 이겨낼 믿음의 표시가 보이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마리아의 눈물은 전염성이 있어서 “마리아도 울고” 함께 있는 “유다인들도 울며”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지신” “예수님께서도 눈물을 흘리셨다.”(요한 11,35) 인간의 진실한 눈물은 하느님도 울릴 수 있는 전염성을 지닌다.

잠시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을 표출하시는 예수님을 두고 멈출 필요가 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북받치시고 산란해지신다.” 내적인 공감이다. 당신께서 무척 사랑하신 한 친구의 죽음 앞에서 어찌 죽음이 사랑을 이길 수 있다는 말인가 하는, 억울해하시는듯한 떨림이다. 도대체 죽음이 뭐라고 이 사랑과 관계를 부수는가 하는 반응이다. 떨림이 북받쳐 올라 상처가 되고 상처는 슬픔이 되며 분노가 된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임박한 죽음 앞에서(요한 12,27), 그리고 제자들에게 유다가 배신할 것을 예고하실 때(요한 13,21)도 “마음이 산란해지셨다”라고 같은 표현을 통해 같은 감정을 보이신다고 기록한다. 라자로의 무덤 앞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눈물을 보고 사람들은 “보시오, 저분이 라자로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요한 11,36) 하면서 그 눈물을 라자로에 대한 예수님의 크나큰 사랑의 표시로 읽어낸다.

3.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이어서 우리는 예수님과 다시 살아난 라자로와의 만남이라는 오늘 복음의 정점에 다다른다. 라자로의 “무덤으로 가신” 예수님께서는 동굴 무덤 입구에 돌이 놓여있음을 보시고, “생명이신 분(요한 14,1)과 죽음의 대결이 시작한다. 이 부분은 예수님과 하느님 사이의 깊은 일치를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예수님께서 “돌을 치워라” 하심에 따라 사람들이 무덤 앞의 돌을 치운 다음,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보시며…‘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 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 주신다는 것-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요한 5,30>-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드린 것은, 여기 둘러선 군중이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1,41-42) 하고 아주 다정다감한 어조로 아버지께 기도하신다. 예수님께서 어떤 표징을 이루시기 전에 먼저 기도하시는 유일한 경우이다. 예수님의 기도는 “감사”로 시작하고 “믿게 하려는 것”, 곧 모든 선의 근원이 아버지이심을 사람들이 믿게 하시려는 기도이다.

기도를 마치신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하고 외치시자 죽었던 이가 손과 발은 천으로 감기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싸인 채 나왔다.”(요한 11,43)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응답은 군더더기 설명이 필요 없이 즉각적으로 효력을 발생한다. 예수님께서는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 때가 온다.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요한 5,28-29) 하고 말씀하신 바가 있다. 그렇게 무덤 속에 있던 라자로가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예수님의 무덤 안장 때의 모습처럼 천으로 감기고 수건으로 감싸인 채 예수님의 부활을 미리 보여주듯이 무덤에서 나온다. 라자로의 부활이라는 이 장면은 예수님께서 “끝까지 사랑하신많은 이들을 하느님께서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리라는 예표이며, 또한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그렇게 하시리라는 이유를 밝혀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죽음과 생명, 죽음과 사랑의 대결에서 예수님께서 살아내신 사랑이 승리한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아무도 그들은 내 손에서 빼앗아가지 못할 것이다.”(요한 10,28-29) 한 그대로 사랑이요 생명이신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물리치시고 당신의 양들을 결코 죽음에 빼앗기지 않으신다. 예수님을 믿어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친구가 되면 그 누구도, 심지어 죽음이라 할지라도 그를 예수님으로부터 빼앗아가지 못할 것이다.

일단 표징이 주어지면 그것을 읽어내는 것은 그 표징을 본 사람들의 몫이다. “마리아에게 갔다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다인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요한 11,45)라고 오늘 복음은 끝난다. 믿음 역시 육체적인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모든 이가 죽음을 거쳐야만 한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이들에게 죽음은 더 이상 최종적인 끝이 아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분과 우정을 맺는 이라면 영원히 살고, 자신 안에 질병과 죽음을 넘어선 승리를 안고 산다.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아가 8,6)에서 보듯이 단지 표현상의 문제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살아내시고 가르치신 사랑은 실제 죽음보다 강하고, 부활로 나아가는 주님의 모든 친구를 위한 예언이자 기다림이며, 이미 지상 생활에서 앞당겨 사는 생명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영광이며 사랑의 영광이다. 라자로의 부활 이후에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 의회의 소집과 논란 끝에 대사제인 카야파가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더 낫다는 사실”(요한 11,46-53)로 결론지으며 실제적인 예수님의 죽음과 사형을 언도하여 예수님이 패배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코 그들이 범접할 수 없는 예수님의 영광이요 승리이다. 라자로가 부활한다. 라자로가 예수님의 생명을 얻는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하는 말씀에 따를 때 부활한 라자로의 생명은 예수님의 생명이다.

예수님의 사랑과 우정은 죽음을 이긴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만일 예수님을 믿고 우리의 믿음을 그분에게 둘 수만 있다면 우리는 혼자가 아니며, 심지어 우리가 죽음에 이른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불확실하고 어둡게만 보이는 그 죽음의 문턱을 넘는 우리 곁에 당신 사랑으로 결정적인 생명 안에 우리를 맞이하여 안아주실 누군가가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당신의 삶에 참여하는 이들에게 궁극적으로 주시고자 하시는 선물이다. 예수님의 삶에 참여하고자 하는 이에게 죽음은 마지막 말이 아니다. 누구나 예수님을 따르고 그분을 사랑하며 그분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이라면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나찌안즈의 성 그레고리오께서는 『주 예수님, 당신의 말씀에 세 죽음이 빛을 보았습니다. 야이로의 딸이 그랬고(마태 9,18-26), 나인에 살던 과부의 아들이 그랬으며(루카 7,11-17),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무덤에서 나온 라자로(요한 11,1-45)가 그러했습니다. 부디 제가 그 네 번째이게 하소서!』 한다.

***

『…복음에서 우리는 인간의 믿음, 그리고 하느님과 하느님 사랑의 전능하심이 서로를 찾고 마침내 서로 조우하는 것을 봅니다. 이는 마치 두 개의 길과 같습니다. 곧, 인간의 믿음과 하느님 사랑의 전능하심이 서로 찾고 결국 서로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마르타와 마리아의 절규에서, 그리고 그들과 함께 부르짖는 우리의 절규에서 봅니다.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하느님의 대답은 연설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죽음의 문제에 대한 하느님의 답변은 예수님이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 믿음을 지녀라! 비록 죽음이 이긴 것처럼 보이더라도, 눈물 흘리는 가운데 계속 믿음을 지녀라. 너희 마음에서 돌을 치워라! 하느님의 말씀이 죽음이 있는 곳에 생명을 다시 가져가게 하여라.”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 말씀을 되풀이하십니다. “돌을 치워라.”(요한 11,39) 하느님은 무덤을 위해 우리를 창조하신 게 아니라, 아름답고, 좋고, 기쁜 생명을 위해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하지만 “악마의 시기로 세상에 죽음이 들어왔다.”(지혜 2,24)라고 지혜서는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악마의 올가미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려고 오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죽음이라고 할 수 있는 모든 돌을 치우라고 부르심 받았습니다. 예를 들면, 위선으로 신앙을 살아가는 것은 죽음입니다. 타인을 파멸시키는 비난은 죽음입니다. 모욕과 중상모략은 죽음입니다. 가난한 이를 소외시키는 것은 죽음입니다. 주님은 마음에서 이러한 돌들을 치우라고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그럴 때 생명은 다시 한번 우리 주변에 꽃을 피울 겁니다. 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분과 일치하는 사람은 생명과의 만남에 들어갑니다. 그리스도 없이, 혹은 그리스도를 벗어나면, 생명이 없을 뿐 아니라 죽음으로 다시 떨어집니다.…(교황 프란치스코, 2020년 3월 29일 삼종기도 훈화-출처. 바티칸 뉴스 한국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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