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9,1-41(사순 제4주일 ‘가’해)

부활로 가는 여정에서 교회는 지난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믿는 이들에게 주시는 생수에 관해 묵상하도록 초대한 뒤, 오늘 복음을 통해서는 빛에 관해서 아니 더욱 엄밀하게는 어둠을 뚫고 우리를 헤쳐나오게 하신 예수님의 행적에 대해서 묵상하도록 초대한다.(*이미지 출처-ilblogdienzobianchi.it)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요한 9,39)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의 치유에 관한 긴 이야기는 실제로 예수님께 맞서 예수님을 대적하는 여러 단계의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온 빛, 곧 모든 사람을 비추시는 “세상의 빛”(요한 8,12)이신 분, “사람들의 빛”으로서 사람들의 생명이신 분(요한 1,4)이시며,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와서”(요한 1,9)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한”(요한 1,5) 바로 그분이시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는 대단히 역설적이다. 눈이 멀어 보지 못하는 사람은 세상의 빛이신 분을 만나 “보게 되었다는 것은 압니다.”(요한 9,25) 하면서 “그분이 제 눈을 뜨게 해 주셨다”라는 사실을 증언하는 반면 멀쩡한 눈으로 모든 것을 볼 수 있다고 하는 이들은 예수님을 만나서도 “그자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우리가 알지 못하오.”(요한 9,29) 하면서 스스로 볼 수 없는 존재임을 드러내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 대목은 예수님에 대한 여러 호칭이 등장하므로 다른 한편으로 대단히 그리스도론적인 복음이라 할 것이다. 예수님에 관한 칭호는 눈멂에서 봄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무지에서 믿음의 증거로 점진적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각각 달리 묘사된다. 겸손한 마음으로 말씀에 순명하며 복음 구절들을 음미하고 묵상해야 한다.

1.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누가 죄를 지었기에나는 세상의 빛

문맥으로 보아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초막절(수꼿 축제, סֻכּוֹת, Sukkot. 참조-레위 23,33-44 신명 16,13-15)을 지내러 형제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머무르시는 것으로 보인다.(참조. 요한 7,10) 여름 내내 비가 오지 않는 건기乾期를 지내고 가을 초막절 축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이 풍부한 우기雨期에 들어간다. 만물의 충만한 생명을 위한 하느님의 선물이요 은총인 물을 생각하는 축제를 지내시며 “축제의 가장 중요한 날인 마지막 날…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요한 7,37-38)라는 말씀을 주신 주님께서는 “실로암 못”(요한 9,7)에서 그리 멀지 않은 쪽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요한 9,1) 다른 많은 치유 이야기들에서 병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치유를 청하는 것과는 달리 오늘 복음의 장면은 설정이 약간 다르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보신다.” 그에게 치유와 구원이 필요하시다는 사실을 보신다. 그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요한 9,2) 예수님께서 보시는 것과 제자들이 보는 것이 다르고 차이가 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달리 전통적 관습이나 사고방식에 따라 질병이나 장애를 죄와 동일시한다. 그 사람이 안고 있는 아픔을 보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죄나 가족 내력까지 염탐하려고 예수님께 묻는다.

예수님께서는 “저 사람이 지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요한 9,3) 하고 제자들에게 대답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보시지 않고 그 사람 안에 있는 고통과 도움을 청하는 외침을 보신다. 그 사람이 처한 처지나 질병이 인간의 삶에 개입하시고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느님을 드러내는 기회라고 천명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죄책감을 조장하려는 제자들과는 정반대의 시선으로 인간의 고통 자체에 관심을 가지시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 고통을 돌보시겠다는 의지를 피력하신다. 악을 대하면서 우리 신앙인들은 어떤 설명을 찾고자 하며 탓을 돌릴 수 있는 대상이나 희생양을 찾으려고 시도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이러한 관점을 배격하시고 눈먼 사람이 처한 상황에 대해 어떤 설명도 하지 않으시면서, 그 눈멂으로 받는 그 사람의 고통에 대한 연민과 공감으로 반응하시면서 그 악을 치워주시고 생명의 승리를 보여 주고자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우리는 낮 동안에 해야 한다. 이제 밤이 올 터인데 그때에는 아무도 일하지 못한다.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9,4-5)라고 말씀을 이어가신다. 예수님을 “보내신 분” 곧 하느님의 일을 “낮 동안”, 곧 지상에 계시는 동안 사람들 사이에서 하셔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5) 한 그대로 결코 어둠이 이길 수 없는 빛이신 주님이시다. 말씀을 마치신 주님께서는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에 바르신 다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 하고 그에게 이르셨다. 실로암은 ‘파견된 이’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그가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다.”(요한 9,7) 예수님께서는 마치 땅이요 흙의 인간을 하느님께서 창조하실 때처럼 “흙의 먼지로”(창세 2,7) 일련의 치료 동작을 하신다. 마술적인 행동이라기보다는 지극히 인간적인 동작이다. 앞을 못 보는 이는 예수님의 손가락과 어루만짐을 피부로 느끼고, 닫힌 눈에 진흙이 발라지는 것을 느끼면서 정말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신뢰를 두게 되었을 것이다.

엘리사에게 찾아갔던 나아만과는 달리(참조. 2열왕 5,10-12) 예수님의 말씀을 강력하고 효력이 있는 말씀으로 믿은 소경은 그때까지 생각지도 못했던 시력을 되찾게 된다. 제4복음은 그 소경의 치유를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간결하게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다”라고만 묘사한다. 사실 이 치유는 기적(δύναμις, dýnamis, 영어의 miracle=strength, power, ability)이라기보다는 하나의 표징(σημεῖον, semeîon=sign, mark, token)이다. 눈을 떴느냐 뜨지 않았느냐 하는 사실 자체를 뛰어넘어 그 사실이 지닌 의미와 그러한 사실이 누구 때문에,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2. “바리사이들부모눈이 멀었던 그 사람

그렇지만 소경이 눈을 뜨게 되었다는 사실로 예수님에 대한 일련의 반대 과정이 시작하고 만다. 예수님께서 눈을 뜨게 된 소경의 곁에 더는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은 총 4개의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끝에 가서는 결국 예수님께서 과연 누가 보는 자이고, 또 누가 눈먼 자인지를 계시하신다. 첫째 장면은 8-12절이다. “이웃 사람”들, 전에 소경이 “거지였던 것을 보아온 이들”이 눈을 뜬 소경을 보고 옥신각신하며 그 사람이 맞느니 안 맞느니 한다. 사람들은 서로 질문들을 주고받으면서 정말 그 사람인지 아닌지를 따진다. 이에 눈을 뜨게 된 소경이 나서서 “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하며 전에는 보지 못하였으나 이제 보게 된 사람이라 한다. 이에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소?”라고 궁금해하니 “예수님이라는 분이…” 하면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담아 자초지종을 알려 준다. 그러자 사람들이 호기심에 가득 차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예수님이 “어디 있소?” 하고 묻지만 소경은 “모르겠습니다.” 하고 대답한다.

둘째 장면은 13-17절이다. 사람들은 소경에게 벌어진 일을 두고 예수님이라는 분에 대한 판단을 구하고자 소경을 율법 전문가들인 “바리사이들에게 데리고 갔다.” 예수님께서 “진흙을 개어”, 곧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하여 소경의 “눈을 뜨게 해주신 날은 (공교롭게도) 안식일이었다.” 그래서 논란은 엉뚱하게 예수님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므로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요.” 하고, 안식일에 관한 율법도 지키지 않은 “죄인이 어떻게 그런 표징을 일으킬 수 있겠소?” 하는 율법 준수와 죄인이니 아니니 하는 논쟁으로 옮겨간다. 그렇지만 바리사이들의 예수님에 관한 판단은 이미 명백해지는 듯하다. 바리사이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대답을 당사자인 눈이 멀었던 이에게서 확인하고자 “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오?” 하고 묻는데, 소경은 “그분은 예언자이십니다.” 하고 대답하면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단계에서 진일보한다.

세 번째 장면은 18-23절이다. 눈이 멀었던 이의 대답에 만족하지 못한 율법 전문가요 종교인들이 소경의 부모를 소환하여 아들에 관해 질문을 이어간다. 부모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아들에게 벌어진 일을 이해하거나 해석하려 하지 않는다. 부모는 아들이 정말 자기들의 “아들이고”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다”라는 사실은 알지만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 “누가 눈을 뜨게 해주었는지” 모른다고 답하면서 아들에게 직접 “물어보십시오” 한다. 그렇게 부모는 아들에 관한 사건과 무관하다며 아들이 “나이를 먹었으니” 모든 것이 아들 책임이며 “제 일은 스스로 이야기할 것”이라 한다.

네 번째이자 마지막 장면은 24-34절이다. “바리사이들은 눈이 멀었던 그 사람을 다시 불러” 소경을 낫게 해준 예수님이 “죄인임을 알고 있소.”(죄인 주제에 그런 좋은 일을 할 리가 없다는 뜻으로) 말하며 자기들이 “죄인”을 식별할 수 있다는 식의 권위를 지녔으니 그러한 자기들의 판단에 동조할 것을 회유한다. 그렇지만 소경은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이 한 가지, 제가 눈이 멀었는데 이제는 보게 되었다는 것은 압니다.” 하고 대답한다. 바리사이들의 ‘알고 있소’ 하는 말에 소경도 ‘압니다’ 하고 대답한다. 소경이 쉽게 동조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엉뚱한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리사이들은 소경에게 “그가(예수님이 도대체)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소?” 하고 끈질기게 질문을 퍼붓는다. 그렇지만 소경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미 말한 것을 “어째서 다시 들으려고 하십니까? 여러분도 그분의 제자가 되고 싶다는 말씀입니까?” 하면서 바리사이들의 염장을 지르는 듯이 발언을 한다. 이에 바리사이들은 소경에게 “욕설을 퍼붓는다.” 소경을 심문하듯 다그치던 종교인들이 소경에게 분개하며 그를 다그친다.

성경의 전문가들이라고 자처하는 바리사이들이 소위 ‘안다’라고 하는 것은 자기들 식대로 자기들이 ‘안다’라는 것을 고수하려는 것으로 안식일을 거슬러서는 좋은 일이 이루어질 수도 없고 이루어져서도 안 된다는 사실이다. 바리사이들이 자기들만이 알고 있다는 식의 이러한 ‘앎’은 ‘새로운 앎’을 용납하지 못한다. 그러나 진정한 새로운 앎은 좋은 일, “하느님의 일”로써 밝혀지고 드러나게 마련이다. 바리사이들은 기존에 자기들이 과거로부터 안다고 생각해온 틀과 권위에 갇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눈이 멀었던 이가 이제 본다. 즉 죄인이 누구인지, 예수님이 어디서 오신 분이신지, 또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시는 분이 누구이신지를 안다. 그래서 그는 바리사이들을 향하여 당당하게 “그분이 제 눈을 뜨게 해 주셨는데 여러분은 그분이 어디에서 오셨는지 모르신다니, 그것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의 말을 들어 주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누가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면, 그 사람의 말은 들어주십니다.…그분이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으셨으며 아무것도 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요한 9,30-33) 하고 역설한다. 화가 치민 바리사이들은 눈멀었던 이를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요한 9,34) 율법을 철저히 지킨다고 하는 공동체의 밖에 있었던 이가 “누구든지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면 회당에서 내쫓기로 유다인들이 이미 합의”(요한 9,22)한 내용에 따라 역설적으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는” 그곳으로 내쫓긴다.

3.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주님, 저는 믿습니다

“그가 (회당) 밖으로 내쫓겼다는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그를 (다시 찾아가) 만나시자,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 하고 물으셨다.”(요한 9,35) 비로소 긴 이야기의 정점이 열린다.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라는 예수님의 물음에 이어, “선생님, 그분이 누구이십니까? 제가 그분을 믿을 수 있도록 말씀해 주십시오.”(요한 9,36)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요한 9,37) “주님, 저는 믿습니다.”(요한 9,38) 하는 대화가 오가고 믿음을 고백한 뒤 눈이 멀었던 이는 “예수님께 (엎드려) 경배하였다.”

복음에서는 “예수님이라는 분”(11절)→“예언자”(17절)→“하느님에게서 오신 분”(33절)→“사람의 아들”(35절)→“주님(Κύριος, Kýrios)”(38절) 이처럼 예수님의 호칭이 점진적으로 심화되어 전개된다. 눈이 멀었던 이의 믿음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9,39) 하시며 바리사이들을 포함하여 주변에 있던 많은 이가 듣도록 큰소리로 말씀하신다. 이에 “예수님과 함께 있던 몇몇 바리사이가 이 말씀을 듣고 (설마 자기들을 두고 한 말이겠느냐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뜻으로 보면 자기들에게 해당하는 말이 아닐까 하며 짐짓) 예수님께, ‘우리도 눈먼 자라는 말은 아니겠지요?’ 하고 말하였다.”(요한 9,40) 이에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41) 하시며 엄중하게 꾸짖으신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징을 보고도 그 표징 안에서 하느님의 일을 보지 못하고, 그 표징이 하느님에게서 왔음을 깨닫지 못하면, 참으로 밖에 내쫓길 것이고, 어둠에 던져질 것이며, 영영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우리도 우리가 믿음 안의 소경은 아닌지 물어야 한다. 우리가 보고 알아 믿는다면서도 진정 누가 빛이시고,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아 모시지 못하고 있지나 않을까 묻고 또 물어야만 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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