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미국에 거주하다가 우리나라에 돌아왔을 때 눈에 띄게 늘어난 상점 브랜드 하나가 있었다. 바로 ‘다이소’라고 하는 브랜드이다. 과거에는 뜨문뜨문 보이던 가게였는데, 이제는 전국 어디를 가나 주변을 둘러보면 웬만한 곳에는 반드시 있다. 그곳에서는 비교적 가성비가 좋은 헤아릴 수 없는 상품들이 넘쳐나고 사람들이 북적인다. 온라인이건 오프라인이건 여느 곳이거나 제품이나 상품의 종류를 불문하고 ‘365일 세일’을 표방하며 말도 안 되는 싼값에 사야 할 상품을 놓치면 큰 손해라는 듯이 현란하면서도 공격적인 유혹으로 솔깃한 광고들을 쏟아낸다. 어느새 우리는 소비가 곧 미덕인 세상, 아니 소비하지 않는 이는 여지없이 도태되고 말 것 같은 초조함마저 자아내는 세상을 산다.(*이미지-구글)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라는 레오 13세의 회칙 반포 백 주년을 기념하여 1991년에 반포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백주년(Centesimus annus)」은 소비자들이 구매하기 전 생각해야 할 내용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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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교황은 어떤 사회가 재화를 사용하는 방식을 보면 그 개인이나 사회가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고 있는지를 보여준다면서, 그러한 선택이 사람들의 삶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드러낸다는 점을 지적한다. 교황님은 개개 소비자들 역시 자신의 구매를 인간 전체, 곧 몸과 영혼의 통합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고 촉구한다.
새로운 필요에 따라 이를 충족할 새로운 수단을 선택할 때, 인간 존재 전체의 차원을 고려하면서 물질적이고 본능적인 차원을 내적이면서도 영적인 차원에 종속시키도록 하는 큰 그림 안에서 이를 행동에 옮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 필요에 따라 그것을 충족하기 위해 그저 구매하고 소비하는 패턴에 종속되거나 본능적인 욕구 충족에만 매달리게 되면 ‘소비주의’라는 함정에 빠지게 되고, 부적절할 뿐만 아니라 종종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영적으로 건강에 해를 끼치는 소비자 태도와 생활 방식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점을 교황님께서는 분명히 한다. (*현 교황 프란치스코 역시 이를 그저 ‘쓰고 버리는 문화throw-away culture’라고 누누이 개탄한다.
선택의 능력
무엇보다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구매할 때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선택’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만 한다. 우리의 선택은 우리 사회와 자신의 영혼에 도움이 될 수도 있고 해가 될 수도 있다. 문제의 핵심은 올바른 정보에 입각한 소비자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소비자의 선택권을 책임감 있게 사용할 수 있도록 어렸을 때부터 교육적·문화적 노력이 절실히 필요하다.
성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누구나 추구하고자 하는 더 나은 삶에 대한 욕구를 비난하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현명한 소비자로서 무엇인가를 더 가지려고 하는 ‘소유’에 대한 욕구를 참되고 아름다우며 선한 것을 추구하려는(진선미眞善美) 욕구로 바꾸어나갈 수 있어야만 한다.
더 나은 삶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존재’가 아닌 ‘소유’를 지향하는 것이 더 나은 삶이라는 사고방식, 더 많이 가져야만 더 행복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 더 많이 가져 그저 삶을 누리고 즐기고자 하는 사고방식이 문제라는 것이다. 참되고 아름다우며 선함을 추구하고, 타인과 함께 공동의 성장을 도모하는 생활 양식을 가질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현명한 소비자로서 올바로 선택할 수 있고, 저축할 수 있으며, 재투자할 수 있게 된다.
무엇인가를 구매할 때마다 그 구매가 나의 영혼뿐만이 아니라 그 구매와 관련된 누군가와도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우리의 구매는 공동선과 거룩함의 추구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 사회에 해를 끼치는 소비주의 모델에 나도 모르게 참여하고 이바지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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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백주년(Centesimus annus)」에서 발췌한 몇 구절
「시장 경제: …자유 시장은 재원을 배치하고 다행하게도 욕구에 대응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지불 능력이 있는”, 구매력을 가진 욕구에 대해서만 그리고 “시장에 판매될 수 있는”, 정당한 가격을 받을 수 있는 재원에 대해서만 그렇다. 그러나 시장으로 충족되지 않는 인간 욕구들이 있다. 인간의 기본 욕구가 충족되지 않은 채 남아 있지 않고 그 결핍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멸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사랑과 정의의 엄격한 의무이다. 그 외에 궁핍한 사람들이 지식을 얻고, 상호 관계를 맺고 자신들의 재원과 능력의 힘을 증가할 수 있는 재질과 적성을 발전시키도록 도와줄 필요가 있다. 동등한 상품들의 교환 논리에 앞서 그리고 정의의 고유한 종류들의 논리에 앞서, 그 존엄성을 근거로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귀속하는 어떤 것이 있다. 이렇게 귀속하는 어떤 것은 존속하면서 실지로 온 인류의 공동선으로 이끌어갈 가능성을 요청한다.…(34항)
이윤의 역할과 한계: …교회는 이윤의 정당한 역할을 기업체의 번영 지표처럼 인정한다. 하나의 기업체가 이윤을 남기면, 재화 생산 방법이 적합하게 사용되었으며, 그 대상이 되는 인간 욕구들이 정당하게 충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윤이 기업 조건의 유일한 지표는 아니다. 경제적 계산이 제대로 되어 있으며, 동시에 기업체의 가장 고귀한 자산인 사람들은 그들의 품위에 손상을 받을 수 있다. 그것은 윤리적 이유로써만 배척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의 경제적 효율성에도 확실히 손상을 끼칠 것이라는 것을 예측할 수 있다. 사실 기업의 목적은 이윤을 남기는 것만이 아니라, 기업체 자체가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들의 기본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노력하며, 전체 사회에 봉사할 특별한 집단을 형성하는 인간들의 공동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윤이 기업 생활의 한 가지 조절의 역할을 하지만 유일한 것은 아니며, 그 외에도 장기적으로는 기업 생활을 위하여 적어도 같은 정도로 중요한, 다른 인간적이고 윤리적인 요소들을 고려해야 한다.…(35항)
소비 사회의 과도: 더욱 발전한 경제들이 존재하며, 그들의 고유한 특징들과 결부된 특별한 문제들과 위협으로 주의를 돌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초기 발전 단계에서 인간은 항상 필요성에 얽매여 살았다. 그의 욕구는 적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그의 육체적 구조에 의하여 정의되었다. 그리고 경제 활동은 그러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 문제는 충분한 양의 물품들을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것뿐 아니라, 품질의 요청에 대응하는 것이다: 생산하고 소비할 물품들의 품질, 인간이 받아야 할 공공 봉사의 품성, 환경과 일반적 생활의 품격.
자연적으로 더욱 만족스럽고 부유한 생활의 요청 자체는 정당하지만, 이 역사적 시간과 결부되는 새로운 책임과 위험은 강조되지 않을 수 없다. 새로운 욕구들이 생기고 정의되는 양식에는, 항상 인간과 인간의 진정한 선에 어느 정도 부합하는 개념이 잠재한다. 생산하고 소비할 재화의 선택에서 일정한 문화가 일반 생활의 개념과 함께 나타난다. 여기에서 소비주의 현상이 나오는 것이다.
새로운 욕구들과 이것들을 충족시킬 새로운 방법을 파악하려면, 인간의 모든 차원을 존중하고 인간의 물질적이고 본능적인 차원을 내적이고 정신적인 차원에 종속시키는, 인간의 전체적 모습에 의하여 인도되어야 한다. 그러나 만일 누가 직접 자기 본능에 따르며 의식적이고 자유로운 자기 인격의 본질을 소홀히 한다면, 그 자체로써 타락하며 인간의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건강에 해로운 소비 관습과 생활 양식이 생겨날 수 있다. 경제 체제 자체는 새로운 방법들을 올바로 구별할 수 있고, 더욱 고차적인 인간의 욕구를 성숙한 인격 형성에 방해되는, 인위적으로 조장된 새로운 욕구들로부터 구별할 규범을 갖고 있지 않다. 이렇게 공권력의 필요한 개입은 논하지 않고도, 선택할 자기 능력의 현명한 사용을 위한 구매인들의 교육과 예민한 책임 의식을 위한 생산자들 자신의, 특히 매스컴의 기술직에 종사하는 이들의 교육을 포함하는, 교육적이고 문화적인 거대한 노력이 필요하며 요청된다.
인간의 건강과 존엄성에 반대되는 인위적 소비의 현저한 예가, 물론 통제하기가 어렵지만, 마약의 경우이다. 이 확산은 사회 질서의 심각한 악 기능의 표시이다. 마약에는 인간 욕구의 물질주의적인,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적 사용의 파괴적인 “해석”이 종속된다. 이렇게 자유 경제의 능력은 일방적이고 적합하지 않은 결과에 도달한다. 마약과 외설 그리고 다른 과소비 형태 또한 약자들의 결점을 남용하면서 그동안에 생긴 정신적 공허를 채우려고 한다.
더욱 잘 살기를 원하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 존재보다는 소유로 향할 때, 더욱 (인간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향락을 목적으로 살기 위하여 더 많이 소유하려고 할 때, 이것을 나은 것이라고 여기는 생활 양식이 잘못이다. 따라서 진리와 미와 선의 추구와 공동 발전을 위한 다른 사람들과의 친교가 소비, 절약 그리고 투자의 선택을 결정하는 생활 양식을 만들 필요가 있다. 이 점에 있어서, 가난한 이들의 생활을 위하여 필요한 것을 제공하기 위해서 나온 사랑의 의무에만, 즉 “남는 것”으로 도와줄 의무에 호소하지 않고 어떨 때는 “필요한 것”으로 도와야 할 의무에 호소한다.
저기보다는 여기에, 저 분야보다는 풍족한 이 분야에 투자하는 결정이 항상 윤리적이고 문화적인 선택이라고 본인은 생각한다. 일정한 경제적 현실과 정치적 안정의 도외시할 수 없는 조건들이 이루어진다면, 투자의 목적, 즉 어떤 국민에게 자신들의 노동으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목적은, 이러한 결정을 하는 이의 인간적 품격을 드러내 보여주는, 섭리에 대한 공감과 신뢰에서 오는 것이다.(36항)
생태계의 요구: 소비 문제 외에 이것과 밀접하게 관련된 생태학적 문제도 염려된다. 인간은 존재와 성장보다 소유와 향락을 더 누리려고 하기 때문에, 과도하게 그리고 무절제하게 땅의 재원과 자신의 생활을 남용한다. 자연적 환경의 무모한 파괴의 원인에는, 우리 시대에 널리 퍼져 있는 인간학적 오류가 잠재한다. 자신의 노동으로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고 어떤 의미에서는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고 알아듣는 인간은, 그 노동이 언제나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사물들의 원초적 선물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망각한다. 마치 땅에는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원초적인 형태나 목적이 없는 것처럼, 인간은 발전시킬 수는 있어도 배반하면 안 되는, 그 땅을 인간이 제한 없이 자의로 사용하고 자신의 의지에 종속시키면서 향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세계에서 하느님의 협조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대신, 부당하게 하느님의 자리에 자신을 올려놓으며, 이렇게 인간은 자연의 반항을 자극하고, 자연을 다스리기보다는 학대한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인간의 전망의 빈곤 또는 편협을 주의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인간은 무엇보다도 먼저 사물들을 진리와의 관계에서 생각하기보다는 소유하려고 하며, 존재하는 사물들의 그리고 사물들을 창조한 불가시적 하느님의 메시지를 가시적 사물 안에서 볼 수 있도록 해주는 미의 감탄에서 나오는, 이해관계에 매이지 않는, 무상적인 심미적인 태도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류는 오늘날 미래의 세대들을 위한 직무와 의무를 의식해야 한다.(37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