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 9,30-37(연중 제25주일 ‘나’해)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마르 9,35) by Georges Rouault, Christ et pêcheurs, 1937년

※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오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을 옮겨와 미사를 지내는 곳에서는 http://benjikim.com/?p=11529에서 자료를 참조할 수 있다.

지난주 복음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마르 8,29)한 이후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신 주님께서 오늘 두 번째로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신다. 그러나 제자들이 서로 “가장 큰 사람”이 누구일 것인가를 두고 논쟁하자, 예수께서는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종이 되어야 한다” 하시고,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라 하신다.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서 제자들은 조금씩 예수님을 알아가는 한편, 더더욱 자신들의 몰이해와 무지함을 드러낸다.

지난주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한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의 공생활에서, 그리고 이를 묘사하는 마르코복음에서 복음의 한가운데인 제8장에 위치하면서 일대 전환점이 된다. 이전까지는 예수님의 치유와 구마, 그리고 가르침으로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내는 행적을 보이신 주님께서 이후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예고하시고 예루살렘으로 오르는 여정, 곧 헤르몬 산기슭을 벗어나 카파르나움을 거쳐 갈릴래아를 가로질러 가시는 여정을 시작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그 일행이 “그곳을 떠나 갈릴래아를 가로질러 갔는데…”(마르 9,30)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1. “넘겨져죽을 것다시 살아날 것

요한복음이 묘사하는 것과는 달리 마르코복음은 공관복음의 전형대로 이른바 예수님의 예루살렘 상경기를 일회성으로 기록하면서 예루살렘에 오르시는 여정 동안 당신과 함께 이동하는 제자들의 공동체를 집중적으로 가르치고 양성하시며 거듭하여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예고하신 것으로 기록한다. 지난주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에서 첫 번째로 이를 예고하신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두 번째로 이를 예고하시고, 곧바로 뒤이어 세 번째로 이를 예고하실 것이다.(참조. 마르 10,33-34)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두 번째 예고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마르 9,31) 하시며 제자들을 가르치신다. “넘겨져”(파라디도미, παραδίδωμι, paradídomi)라는 동사는 누군가의 권한에 의해서 좌지우지될 수 있는 처지로 전락한다는 강한 의미를 담는다. 이러한 상황이 발생할 것이며 당신의 뜻대로는 할 수 없는 수동적인 대상이 되신다고 한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같은 말을 “유다 이스카리옷이 예수님을 수석 사제들에게 팔아넘기려고…”(마르 14,10), 빌라도가 “군중을 만족시키려고…예수님을…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넘겨주었다.”(마르 15,15) 할 때 사용한다.

처음과 두 번째의 예고에서는 모두 ‘(예수님께서 예고를 제자들에게) 가르치신다’(마르 8,31;9,31) 하고, 두 번째와 세 번째 예고에서는 ‘넘겨지다’라는 말이 사용되며, 세 번의 예고 모두 ‘수동태’의 상황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수동태의 묘사는 스스로 자기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들이 못된 행실을 자행하는데, 이것이 그저 예수님이 재수가 없어서 당하게 된 단순 사건이거나 어쩔 수 없는 숙명적 사건이 아니며, 사람들이 배척하고 미워하며, 박해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는 사악함을 벌이지만, 의로운 이는 그 사악함에 맞서지 않으며 이를 참아 받는다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렇게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이미 앞선 ‘강해’에서 누차 이를 언급하였지만, 짧게라도 이를 다시 언급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복음과 예수님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불의하고 사악한 이 인간 세상에서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그러하며, 시간과 장소를 막론하고 언제나 의인은 고통을 당하고 죄인이라는 낙인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죽음을 원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의로운 분이신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요한 13,1) 하신 나머지 죽음에 넘겨지기까지 그렇게 사시기를 바라셨다. 의로운 이는 다른 이를 결코 죽음에 넘기지는 않으며 악을 행하지도 않고 오히려 자신이 죽음에 넘겨지도록 한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필요한 거룩한 이유이다.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요한 13,1)하고자 하신 분, 아버지의 뜻에 따라 원수들까지 사랑하고자 하신 분, 바로 그분께서 오직 당신께로부터만 솟구칠 수 있는 그런 사랑의 가능성을 인간의 마음에 두시고자 하신다.

이러한 사랑이 어렵고 비싼 값을 치러야만 한다는 사실은 예수님과 동고동락을 함께 하며 마땅히 예수님의 가르침에 전폭적으로 지지를 보내야만 했던 공동체의 반응으로 증명된다. 첫 번째 예고 뒤에 예수님께서는 이를 “가르치기 시작” 하셨는데. 베드로는 “반박하기 시작”(마르 8,32) 하였다고 하는 반응처럼 제자들의 공동체 역시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알아들으려고 하지 않고, 못 알아듣겠으면 당연히 질문이라도 할 법한데 질문조차도 없이 심지어 거부하면서 맹목적인 자기들의 가치관에 갇혀 있다. 오늘 두 번째 예고 뒤에도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마르 9,32) 한다.

2.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그렇게 예수님과 제자들은 “카파르나움에 (있는 그들의 집에) 이르렀다.”(마르 9,33) 그리고 함께 잠시 휴식을 취하시던 중이었다. “집 안에 계실 때” 편안한 분위기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마르 9,33) 하고 물으신다.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당황스럽고도 부끄러운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마르 9,34) 예수님께서 수난과 죽음을 말씀하시며 가르치시는 중이었는데, 제자들은 어이없게도 자기들의 그릇된 욕망으로 논쟁하였다는 사실을 스스로 느낀다. 사실 이러한 논쟁은 제자들이 예수님과 지내던 내내 각자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던 유혹이며 욕망에서 터져 나온 것이었을 것이다. ‘누가 1번’인가 하는 물음이었을 것이다. 인정받고 싶은 욕구, 사랑받고 싶은 욕구를 감추며 은근히 경쟁하고, 겉으로는 진정한 형제애를 사는 척했던 결과였을 것이다. 처참한 죽음을 향하여 나아가시는 고난의 메시아라는 계시에 제자들은 ‘나도 예수님을 따라 죽겠다’라고는 못할망정 ‘누가 1번?’이라는 논쟁으로 답을 한다.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에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에서 옵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야고 4,1) 하는 오늘 제2독서의 말씀처럼 제자들이 1번과 첫 자리, 높은 자리와 영향력, 주도권을 쥐는 자리인 “가장 큰 사람”에 집착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는 다가올 십자가를 말씀하고 계셨다. 스승은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아를 말하는데 제자들은 영광의 메시아를 꿈꾸고 있었다. 스승은 자기 생명을 내어줄 것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제자들은 스스로 스승이 되거나 높은 사람이 될 것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스승은 섬김을 말하고 있는데, 제자들은 지배와 통치를 생각하고 있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큰 사람”이 되어 주도권과 힘, 영향력을 손에 쥐기 위해 분주한 존재이다. 그러나 우리는 실패와 수난, 죽음의 상징인 십자가와 십자가에 달린 죽음을 경배하면서 그 죽음 너머에 부활이 있음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다.

예수님의 어록을 중심으로 쓰인 일명 ‘토마스복음’ 12항은 마르코 복음서의 이 장면을 『제자들이 예수님께 여쭈었다. “저희는 당신께서 곧 우리를 떠나시리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면 그다음에는 저희 중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라고 기록한다. 제자들의 입장을 고려해서 ‘예수께서 수난하고 돌아가신다니 그러면 그 후에 누가 주도권을 쥐고 다음을 이어갈 것인가?’ 하고 토론하였다 하더라도, 상황적으로 보아서 그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은 논쟁이었다. 차라리 스승이신 예수께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만,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다음 후사를 누가 이어가야 합니까?’하고 여쭤보아야 했지만, ‘내가 더 잘났다라고 서로 우기는 꼴을 연출하고 말았다.

우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가 예수님의 파스카 논리를 공동체의 원리로 삼아 이를 살지 않으면, 곧바로 세속적인 경쟁과 다툼의 사고방식이 그 공동체를 지배하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교회라는 공간에서 힘의 논리가 팽배해질 것이며, 섬김과 봉사는 권위와 영광의 기회로 인식되고 말 것이다.

3.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모든 이의 꼴찌어린이

모처럼 좀 쉬시려던 참에 “예수님께서는 (다시) 자리에 앉으셔서 (교회의 첫 번째 책임자들이 되어야 할) 열두 제자를 불러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마르 9,35) “그러고 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마르 9,36) “어린이”라고 번역하는 말은 ‘파이디온, παιδίον, paidíon’이다. 사랑스럽고 귀여운 애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불쌍하고 초라하며 작아서 누군가에게 의존해야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존재라는 뜻이다. 그를 제자들 “가운데에 세우시고 껴안으시며”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마르 9,37) 하신다. “어린이”, 미소한 이, 불쌍한 이, 소외된 이, 버려진 이가 ‘누가 1번?’인가를 찾는 이들의 중심에 선다. 공동체의 1번이 되어 공동체를 다스릴 사람은 과연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만) 한다.”

당시 어린이는 사회적으로 가사를 돌볼 수도 없고 노역이나 전쟁에 동원될 수 없었으므로 가장 별 볼 일 없고 가치 없는 존재였다. 한 마디로 ‘useless guys’에 불과했다. 그런 의미에서 가난하고 병든 이들처럼 사회적으로 가장 보호받지 못하는 신분에 처한 존재들이 아이들이었다. 가난한 자들이 가진 자들의 보호에 의존해야 하는 것처럼 어린이들도 생존을 위해 누군가 다른 이에게 철저히 의존해야만 하는 존재였다. 예수님은 천진난만한 미소와 아름다움을 지녔으나 ‘철저한 의존성’을 지닌 어린이를 “꼴찌와 종”의 본보기로 내세우신다.

마르코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 다소 극단적인 듯한 태도를 보이시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공동체의 첫째에 이르고 싶은 사람은 단순하게 모든 이의 뒤에 쳐져야 하며 모든 이의 종이 되는 길을 가야만 한다. 열둘 중에서 누가 첫째라고 말씀하시지 않으면서 예수님께서는 몸소 꼴찌의 길, 종의 길을 가신다. 얼마 안 가 제자들은 그들 공동체의 첫째를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모든 이의 꼴찌”요 “모든 이의 종”이며 적어도 그것을 살려는 사람을 공동체의 첫째 자리에 놓아 그의 인도를 받게 될 것이다. 세 번째의 수난과 죽음의 예고 뒤에 예수님께서는 다시 당신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민족들의 통치자”와 “고관들”의 “군림”과 “세도”를 구체적으로 거론하시며 좀 더 직설적으로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사람의 아들은…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2-45) 하신다.

우리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에서 좀 더 뛰어나고, 좀 더 영리하며, 좀 더 눈에 잘 띄고, 어쩌면 지적으로 더욱 잘 무장된 사람이나 강한 사람, 이른바 ‘통솔력(리더십)’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이를 괴롭히기까지 하는 이들이 선택되고 첫째가 되는 현실을 종종 목격한다. 이는 교회의 역사와 수도원 공동체에서 벌어지는 안타깝고 서글픈 현실이기도 하다. 같은 대목을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 누가 더 높으냐? 식탁에 앉은 이냐, 아니면 시중들며 섬기는 이냐? 식탁에 앉은 이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22,26-27) 하셨다고 기록한다. 루카복음이 되었든 마르코복음이 되었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시고자 했던 본래 뜻은 군더더기 말이 필요 없이 자명하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공동체의 사목자들스스로 첫째 자리에 앉고자 하는지, 그렇다면 인간적인 권모술수나 패거리를 만들고 조직적인 세를 만들어보려는 조작이나 시도와 욕망이 없이 기꺼이 모든 형제자매의 꼴찌가 되고 종이 되어 있는지 자문해야만 한다. 타인에 대한 힘의 과시나 추구가 없이 꼴찌가 되고 섬기려는 진실성이 없다면 그 누구도 “착한 목자”(요한 10,11.14)일 수 없고, 이어서도 안 된다. 사목자로서 많은 허물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가장 근본적인 허물이요 죄종이 되지 않고 타인을 부리는 주인이 되어 다른 이를 위협하여 지배하려 드는 것이다. 이러한 죄는 금방 눈에 띈다. 꼴찌와 종이 되려 하지 않는 권위는 사람들 사이에 현존하는 법을 모를 뿐만 아니라, 타인에 대한 경청을 모르며, 타인을 섬기기보다 자기를 섬기면서 자기만 알고 자기만족과 제멋에 겨워 살며, 미소하고 약하며 소외되고 숨겨진 그리스도의 지체들을 아랑곳하지 않아서 그들 곁에 설 줄 모르는 폭력적 권위가 된다.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라는 것…아무도 가고 싶지 않은 곳, 아무도 다다르지 않는 곳, 가장 멀리 떨어진 변방에 머무는 것…그리고 보잘것없는 이들과 버림받은 이들과 만남의 공간을 조성하면서 (그들을) 섬기는 것…(교황 프란치스코, 2018년 9월 23일 주일 리투아니아 카우나스에서 행한 삼종기도)』 아멘!”

2 thoughts on “마르 9,30-37(연중 제25주일 ‘나’해)

  1. 섬기는
    사람.

    섬김을 받고 싶은 욕망.
    자꾸 맘 속의 우쭐함, 지배하려는
    욕심과 싸웠음을 고백합니다.

    이 복음은 저를 돌아보게 합니다.

    가장
    낮은 곳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섬김을 다 하였나?

  2.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만) 한다.” —참 어려운 일이네요. 실행은 못하지만 오늘도 마음속에 새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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