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9,23-26(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9월 20일

(*직접 저술이 아니라 인터넷 검색을 바탕으로 편집한 내용임. 9월 20일 대축일 미사를 드릴 수 없는 많은 이민 교회의 특성을 고려하고, 주일로 옮겨 대축일을 지낼 수 있다는 지침에 따라 참고자료를 수록함)

전례배경

1583년에 중국에 들어온 선교사 마태오 리치 신부의 저서 『천주실의』 등을 조선으로 들여와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한 학자들은 성호星湖 이익李瀷과 그 문하생들이다. 그들 가운데 특히 농은 홍유한(1726-1785)은 천주학에 관심이 깊어, 세례를 받지 않았으면서도 소백산 자락에 은거하며 신앙생활을 하였다. 이에 권철신, 홍낙민, 이기경 등의 제자들이 약속된 강학회를 개최하고, 특히 이벽은 이승훈을 북경으로 보내어 세례를 받도록 함으로써 비로소 1784년 이 땅에 천주교 공동체가 창설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1791년 신해박해를 시작으로, 신유박해(1801), 을해박해(1815), 정해박해(1827), 기해박해(1839), 병오박해(1846), 경신박해(1860), 병인박해(1866) 등 크고 작은 박해가 1백여 년 동안 조선을 휩쓸어 1만여 명의 신자들이 순교하였다. 이들 가운데 103위는 1984년 5월 성인 반열에 들었다. 이를 계기로, 과거 9월 26일에 지내던 ‘한국 순교 복자 대축일’을 9월 20일로 옮겨,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로 지낸다.

이날을 축일로 지내는 이유는, 1839년 9월 22일이 성 정하상 바오로의 순교일이고, 7년 뒤인 1846년 9월 16일이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의 순교일이기 때문에 이날을 기해 1839년, 1846년, 1866년의 박해 때 순교한 103위 성인들을 기념하는 것이다. 103위는 한국 선교 200주년이 되던 1984년 5월 6일 여의도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인품에 오르신 103위 순교 성인들을 기억하며, 동시에 이름 없이 박해의 칼날에 스러져 간 모든 순교자를 기리는 날이다. 성 김대건 사제는 새남터에서 26세로, 성 정하상은 서소문 밖 형장터에서 45세로 각각 순교하였다.

말씀 전례와 복음구절

제1독서에서 지혜서는 ‘의인들의 운명’을 알려준다.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고통도 없고 파멸도 없으며 벌도 없이 평화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고 설파한다. 주님께 신뢰하는 의인들은 주님의 보살핌을 받고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산다. 이 독서에서 말하는 “의인”은 분명 순교 성인들이 틀림없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시니 그 무엇도 우리를 대적할 수 없고, 또한 그 무엇도 우리를 하느님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것이 없다 한다. 순교 성인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구절이라 아니할 수 없다. 오늘 복음은 공관복음이 모두 전하는 복음으로서 십자가를 졌던 순교 성인들을 암시하며 그들이 예수님 때문에 목숨을 잃어 목숨을 구했던 사람들로서 사람의 아드님이 누리시는 영광과 천사들의 영광에 함께 할 것임을 알려준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루카는 “날마다”라는 말을 집어넣어(루카 11,3 참조), 이 말씀이 그리스도인 생활의 항구한 법칙임을 나타낸다. 즉, 일상생활 가운데서 나날이 당하는 어려움을 극복하라는 명령이다. “제 십자가를 지다”라는 말의 뜻은, 참된 제자의 실존이 예수님의 실존으로 정의된다는 것이다. 곧 “자신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름은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이는 또한 마르 8,35-37에 따라,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이다. 다른 말로, 제자가 걸어가야 할 길은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계속하여 가는 것이 된다. 그 길에는 스승님의 길이 그러하였듯이 반드시 고통이 뒤따른다. 그러나 그 고통은 고통으로 끝나지 않고 영광이 주어지는(루카 24,26 참조) 길이다. 이러한 현실 안에서 “십자가”는 중요한 중심 상징이다.(참조. 1코린 1,17-18.23 갈라 2,19-20) “따르다”라는 말은 단순히 신체적인 행동을 뜻하지만은 않는다. 오히려 제자로서의 영적인 충실과 성실, 그리고 믿음직스러운 충성을 뜻한다.(참조. 루카 5,27-28;9,23.49.57.61;18,22.28.43;22,39.54)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4)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이라 한다. 이렇게 목숨을 잃는 것은 생명을 소홀히 하거나 단순한 증거를 위한 자기 학대의 차원이 아니다. “구원”을 위해 목숨을 잃는 것이다. 구원과 관련되지 않는 인간의 생명은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루카 9,25) 루카의 경우 “온 세상을 얻다”는 재산이나 경제적인 부의 축적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구절을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라는 구절과 함께 읽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루카 9,26) 마태 16,27과 마르 8,38에서는 “아버지의 영광”만 언급된다. 그러나 루카는 “천사들의 영광”과 함께 예수님 부활의 영광을 예고하며(루카 24,26), 거룩한 변모 때에 그분께서 드러내실(루카 9,32) ‘사람의 아들의 개인적인 영광’도 덧붙인다. 마태오와 루카는 마르코와 달리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의 앞에 붙어 있는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마르 8,37)라는 말을 생략한다.

독서자료

*<성 김대건 신부님의 삶과 신앙>에 관하여 2006년 9월 3일부터 24일까지 총 4회에 걸쳐 평화신문 리길재 기자가 김대건 신부님의 1인칭 화법으로 작성하여 연재한 기사 중 3~4회 기사를 부분 발췌한 내용, 김광만 님의 <광화문에서 절두산까지-순결한 순례의 길>이라는 글, 그리고 <천주교 서울 순례길> 관련 사이트를 수록 소개한다.

<성 김대건 신부의 삶과 신앙>

(3) 사제품을 받고 – ‘저를 조선교회 희생 제물로 봉헌합니다.’

어영청 군사들의 칼이 벌써 6차례나 내 목을 내리쳤습니다. 목뼈 으스러지는 소리가 너무나도 크게 들려 잠시 놓쳤던 정신을 추슬러봅니다. 사제품을 받고자 조선 신자들과 함께 쪽배를 타고 서해를 항해할 때도 잠시 정신을 놓친 적이 있었습니다. 거센 폭풍우로 배의 키가 부러지고 돛이 찢어져 표류할 때였습니다. 심한 뱃멀미와 허기로 모두 정신을 잃었습니다. 저와 운명을 함께한 일행은 현석문(가롤로), 이재의(토마스), 최형(베드로), 임치화, 노언익, 임성실, 김인원 등 12명으로 모두 순교자 가족입니다. 정신을 차린 신자들은 배가 침몰할까 봐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저는 바다의 위험으로부터 보호받으려고 품고 왔던 ‘바다의 별’ 성모 마리아 상본을 높이 들어 보이며 ‘여기에 우리를 보호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상하이에 도착할 것이고, 우리 주교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라며 이들을 안심시켰습니다. 성모님의 도우심으로 저희는 1845년 6월 4일 무사히 상하이에 도착했습니다. 바다에서 생활한 지 한 달여 만입니다.…

제3대 조선 교구장이신 페레올 주교님께서 긴 여정을 마치고 마침내 상하이에 도착하셨습니다. 주교님은 저의 사제서품식을 서둘러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1845년 8월 17일, 상하이 진쟈강(金家港) 성당에서 저의 사제서품식이 거행됐습니다.…신학생으로 선발된 지 꼭 9년 만이었습니다. 성인 호칭기도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제단에 엎드린 저는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안배라고 믿습니다. 하느님의 특별한 안배 하심이 아니고선 3명의 신학생 가운데 가장 부족했던 제가 조선인 첫 사제로 맏배가 된 것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느님께서 조선인 성직자의 맏배로 저를 선택하신 이유를 잘 압니다. 하느님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당신 외아들을 십자가의 희생 제물로 삼았듯이, 아브라함이 맏배를 번제물로 봉헌했듯이 조선교회를 위한 맏배의 희생을 원하신 것입니다. 저는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제가 하느님 뜻대로 조선교회를 위한 흠 없는 희생 제물이 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그리고 성모님께 의탁했습니다. 제가 해야 할 도리를 다할 수 있도록 어머니께서 늘 함께해 주시기를….

저는 조선인 성직자 맏배로 조선의 뭇 백성들을 향해 걸음을 재촉할 것입니다. 차가운 밤 속에 빠져 진리도, 하느님도, 희망도 없이 살아가는 불행한 이들을 위해 숭고한 빛을 조선 산하에 밝힐 것입니다. 열의를 다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성스러운 사제직을 수행할 것입니다. 죽어야 한다면 죽을 것입니다. 죽음이 나의 거룩한 미래이며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입니다. 제 사제직의 열망은 하느님 뜻대로 죽음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두의 승리자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서품식을 마치자 조선 신자들이 저를 둘러싸고 덩실덩실 춤을 추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느님께서 보잘것없는 우리를 축복하시어 조선인 사제를 탄생시키셨다’라며 목이 터지라 노래하며 저를 얼싸안고 강강술래를 했습니다. 서양 선교사들도, 중국 신자들도 함께 어울려 원무를 그리며 저를 축하해주었습니다. 이날은 제가 순교를 눈앞에 두고 있는 오늘처럼 천국의 기쁨을 맛본 날이었습니다.…저는 조선 신자들에게 주님 안에서 용기와 힘을 얻고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데 열과 성을 다하자고 권고했습니다. 첫 미사 후 8월 31일 저는 페레올 주교님과 다블뤼 신부님을 모시고 조선인 교우 12명과 함께 조선 입국을 위해 ‘라파엘 호’라 명명한 쪽배에 다시 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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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교우 여러분,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

이제 마지막인가 봅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온 백성에게 전하지 못하고 교우들보다 먼저 떠남이 미안할 따름입니다. 내 나이 25살. 짧지도 길지도 않은 4반세기 나의 인생은 모두 은총의 시간이었습니다. 하느님의 특별한 안배로 순교자 집안에 태어나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받았고, 조선인 첫 사제가 되어 이제 순교자 반열에 들어 하느님 나라를 눈앞에 두고 있으니 말입니다. 어영청 군사가 내려친 일곱 번째 칼날이 희미해진 마지막 저의 정신을 깨웁니다. 아직 저의 마지막 고해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평생을 하늘을 향해 꿇었던 무릎도 이젠 세상 사람들을 향해 꿇을 것입니다. 임종을 앞두면 누구나 선해지는가 봅니다. 저같이 보잘것없는 사람도 원수를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니 말입니다. 저의 정신이 또렷한 지금 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욕했던 모든 사람, 그리고 저와 조선교회를 박해해온 모든 사람을 용서합니다.

사실 저는 사제로서 사목할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사제품을 받은 직후 상하이를 떠나 1845년 11월 서울에 도착한 다음 올해 5월까지 6개월간 사목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처음 서울 소공동 돌우물골에 은신하며 교우들을 사목했습니다. 그러던 중 페레올 주교님으로부터 성직자 영입을 위한 해로 개척 지시를 받고 돈 400냥을 지불하고 임성룡의 배를 구입했습니다. 이후 저는 무쇠막과 서빙고, 수원 샘골, 용인을 거쳐 어머니가 거처하시는 은이에서 1846년 부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이날이 어머니와 함께했던 마지막 미사요 마지막 식사였습니다. 어머니와 교우들은 궁핍한 살림에도 예수님 부활과 사제품을 받고 귀향한 저를 축하하려고 조촐한 잔치를 열어주셨습니다. 그날 막걸리를 제게 권하던 어머니의 눈빛을 잊을 수 없습니다.

저는 부활 8부를 지내고 바로 서해안 해로 개척을 위해 마포나루를 출발해 강화, 연평도, 장연 터진목을 거쳐 황해도 작은 섬마을인 순위도에 도착했습니다. 저는 이곳까지 항해하면서 상하이에 머물고 계신 메스트르 신부님께 보낼 해도를 그려 중국인 선원들에게 전해주었습니다. 그런데 불운하게도 순위도 등산나루에서 우리 배를 징발하려는 포졸들에게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그날이 1846년 6월 5일이었습니다. 포졸들은 내 짐 보따리에서 예수성심상과 성모자상, 언문으로 된 기도서를 발견하고는 저희 일행을 곧장 해주 감영으로 압송했습니다. 황해 감사는 저의 체포 사실을 곧바로 의금부에 보고했고, 의금부는 다시 국왕에게 보고했습니다.

저는 체포된 이후 교우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중국인이라고 거짓 증언을 했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제가 중국인 선원들에게 전달했던 해도와 편지가 발각, 압수돼 정체가 탄로나고 말았습니다.…사형선고 다음 날인 오늘(1846년 9월 16일) 저는 지금 형장인 새남터에 있습니다. 박해자들이 예수님께 갖은 모욕을 다 했듯이 군사들은 제 속바지까지 벗기고 두 손을 등 뒤로 묶은 채 얼굴에 횟가루를 뿌리고 갖은 희롱을 했습니다.

저는 군중들에게 ‘내가 외국인들과 교섭한 것은 내 종교와 내 하느님을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천주를 위해 죽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내게 시작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죽은 뒤에 행복하기를 원하면 천주교를 믿으십시오. 천주께서는 당신을 무시한 자들에게는 영원한 벌을 주시는 까닭입니다.’라며 마지막 유언을 남겼습니다. 진실로 저는 우리 민족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천주교 신앙을 고백하길 간절히 희망합니다. 제가 기쁘게 죽을 수 있는 것도 이전의 순교자들처럼 저의 희생이 조선교회의 초석이 되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는 25년간의 삶을 마감하고 하느님 나라에서 새로이 태어나려 합니다.

‘교우 여러분, 부디 우애를 잊지 말고 서로 돕고 큰 사랑을 이뤄 이 환난을 이겨내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 아멘!(2006년 9월 3일부터 24일까지 총 4회에 걸쳐 평화신문 리길재 기자가 김대건 신부님의 1인칭 화법으로 작성하여 연재한 기사 중 3~4회 기사를 부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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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 절두산까지순결한 순례의 길>

210년 전 통한의 피를 부른 순교와 한국 가톨릭 100년 박해의 역사는 광화문 앞 사거리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범인 체포와 취조, 선고가 모두 이 근방에서 이뤄졌기 때문이다. 좌포도청(현재의 단성사와 소방서)과 우포도청(현재의 광화문 우체국과 동아일보사)에서 범인을 체포하면 형조 소관의 전옥서(현재의 세종로 전화국, KT 건물)에 갇혀 있다가 의금부(현재 종로 1가 사거리 근처)에서 고문을 받으며 취조당하고 마침내 사형선고를 받으면 광화문 황토 마루를 떠나 서소문 밖 사거리 형장으로 향했다. 소가 끄는 달구지에 실려 현재의 시청 앞 광장을 지나 오른쪽으로 꺾어 대한항공 건물 앞길을 지나 올라가면 서소문(서대문과 숭례문 사이, 현재 서소문동 큰길이 고가도로와 만나는 곳에 있었다.)에 닿고 그 길을 내려가면 의주로 즉, 국도1호(목포에서 신의주까지)와 만나고 그 길을 건너면 서소문 사거리 형장 또는 서소문 밖 형장(현재의 중앙일보 건너편 철길 옆 공원)에 이른다.

본래 한양에는 4대문과 4소문이 있었다. 서소문은 현재의 동대문 운동장 곁에 있는 광희문(일명 시구문)과 함께 도성의 시체가 나가는 ‘죽음의 문’이었는데 본래 이름은 소의문이었다. 서소문은 아현과 남대문 밖의 칠패 시장으로 통하던 문으로 용산 나루나 마포 나루에서 한양으로 들어오던 길목이라 일찍이 사람들이 붐비던 곳이었다. 조선 왕조는 많은 사람이 운집하는 데서 사형을 집행함으로써 경각심을 주어 범죄를 예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시장이나 사거리에서 사형을 집행하고 큰 길가나 교차로에 효수한 머리를 내걸었다.

이러한 이유로 서소문 밖 사거리 형장은 태종 16년(1416년)에 서울의 주요 형장으로 일찍이 지정되었다. 당시 서소문 내리막길 끝 흙다리(이교) 백사장 형장의 풍경을 샤를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는 이렇게 전한다.(아마 성인으로 추존된 조신철의 증언을 다시 기록한 듯하다) ‘처형이 결정된 신자들은 옥에서 끌려 나와 수레 한가운데 세워진 십자가에 매달렸다. 십자가의 높이는 여섯 자 정도로, 신자들은 양팔과 머리칼만 잡아 매인 채 발은 발판 위에 놓이게 된다. 수레가 광화문통을 옆으로 지나 서소문에 이르면 그다음은 가파른 비탈길이다. 이때 사령들은 신자의 발이 놓인 발판을 갑자기 빼내고 소를 채찍질하여 울퉁불퉁한 내리막길을 내달리게 하였다. 수레는 무섭게 흔들리고 신자들의 몸은 머리칼과 팔만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으므로 극도의 고통을 받게 된다. 혼절한 상태로 형장에 이르면 옷을 벗기고 꿇어 앉힌 뒤 턱 밑에 나무토막을 받쳐놓고 머리를 잘랐다.’

이렇게 하여 서소문 밖 사거리 형장으로 불리던 이곳에서만 1801년 신유 大 박해 이후 100여 명이 순교하고 그중 44명이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새남터에서는 11명, 당고개에서는 9명이 시성되었다.

한국 가톨릭 사상 가장 큰 순교 성지인 이곳에서 순교한 이들의 면면을 보면, 이승훈, 정약종, 그의 아들 정하상, 그의 딸 정정혜,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 김제준, 황사영, 조신철, 남종삼, 초대 여신도 회장이었으며 주문모 신부를 숨겨주었던 강완숙, 그리고 이름 없는 수많은 한아기, 박아기, 이소사(당시는 과부를 소사라 불렀다)들이 있다. 기해박해(1839년)를 기록해 놓은 ‘기해일기’를 보면 그 당시 치명(순교) 당한 이가 114명이고 그중 참수된 순교자가 54명으로 이들 대부분이 이 서소문 밖 형장에서 처형되었다. 가히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래서 주변에 있던 시전 상인들이 ‘제발 돌아오는 음력 설 대목에는 처형을 중지해 달라’고 조정에 진정하기까지 했다. 이것이 받아들여져 섣달그믐께 이틀간 서소문 밖에서 한강 가로 더 나아가 처형토록 결정했는데 이곳이 바로 당고개 형장이다.

당고개 순교지(현재 용산구 신계동1의 57번지)에서는 1840년 1월 31일과 2월 1일 이틀간에 남녀 10명이 순교했는데 여기에는 한국 최초의 신부 중 한 사람인 최양업 신부의 아버지 최용환과 어머니 이성례가 포함되었다. 이성례는 젖먹이가 옥에서 굶주려 죽자 나머지 아이들을 위해 배교를 하고 나왔다가 다시 배교를 취소하고 감옥에 들어가 순교했다. 어머니가 다시 감옥에 들어간 사실을 안 아이들이 찾아와 목메어 울자 이성례는 돌아 앉아버렸다. 이 광경을 헤아린 둘째 아들 희정이가 어린 동생들을 달래어 다시 거지 생활로 돌아갔다. 언젠가 부잣집에서 먹으라고 준 인절미가 있어서 식지 말라고 품 안에 품고는 빠른 걸음으로 감옥을 찾아갔다. 옥리에게 약간 떼어준 다음 부모님께 인절미를 전했다. 인절미에는 아들의 손때 묻은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었고 부부는 오랫동안 그 인절미를 먹지 못했다고 한다. 처형당하기 전 그녀는 감옥으로 찾아온 둘째 아들 희정의 머리를 빗겨주면서 ‘어린 동생들을 각별히 사랑하고 보호하고 친척 집에 각각 데려다주고 지내자면 중국 마카오에 가 있는 형이 나와 자연히 안배할 것’이라고 말하고 요 며칠 동안에는 찾아오지 말라고 일렀다. 처형 전날 저녁 네 형제는 온종일 동냥한 쌀자루를 메고 수소문 끝에 희광이(망나니) 집을 찾아와 ‘우리 어머니가 아프지 않게 단칼에 하늘나라로 갈 수 있게 해주십시오.’ 하면 쌀자루를 내려놓았다 한다. 이 눈물겨운 청탁은 희광이들의 마음을 움직였다.(이충우의 ‘우리 신앙 유산 역사 기행’에서)

당고개에서 순교한 이들의 면면을 보면 서로서로 순교 가족들로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최경환과 이성례, 손소벽과 최영이 모녀, 홍병주·홍영주 형제 등이다.

새남터 형장은 당고개 형장에서도 한강 강가로 더 나아간 곳에 있다. 이곳이 외국인 선교사들의 처형지로 선택된 이유는 한강이 가까워 이양선에도 보여줘 경각심을 고취케 한다는 목적이 있었다. 그래서 일반 평신도들을 서소문 밖 사거리 형장에서 주로 처형했다면 새남터 형장은 지도자급 양반층이나 국사범, 외국인 신부들을 처형하는 곳으로 사용했다.

본래 새남터는 억새가 많은 ‘노들’ 혹은 모래밭이 있는 터전이라는 뜻의 사남기라고 불렸던 곳이다. 조선 초기부터 연무장으로 사용되고 단종 복위 운동과 관련되어 사육신의 피가 뿌려지고 남이 장군도 이곳에서 처형된, 국사범 중죄인 처형장이었다. 사형장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의견이 분분하다. 현재 철도청 기관고 부지일 것이라는 의견과 원효로 4가 부근일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새남터를 순교의 피로 크게 물들인 사건은 신유박해(1801년) 때 중국인 주문모 신부의 군문효수로 시작된다. 군문효수는 죄인의 목을 벤 후 그 머리를 군문에 높이 매달아두는 형벌이다. 주문모 신부의 순교 30년 후인 1831년 조선교구가 설정되고 뒤를 이어 모방, 샤스탕 신부와 앵베르 주교가 입국하게 된다. 이 세 신부 또한 1839년 기해박해 때 이곳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한다. 다시 1846년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 김대건이 조선에 들어온 지 1년도 못 되어 이곳 새남터에서 순교한다. 또 20년의 세월이 흘러 1866년 제4대 교구장 베르뇌 주교가 군문효시 되고 배론 신학당을 지키고 있던 푸르티에, 프타니콜라 두 신부도 새남터에서 참수된다. 이곳에서 순교한 것으로 확인되는 14명 가운데 11명이 1984년 5월 6일 시성되면서(이날 시성된 한국 순교자는 103인이다) 한국 가톨릭 교회사의 중요한 성지로 자리매김하였다.

새남터 형장과 연관되어 잊히지 않을 기록은 순교자의 시신 수습과 안장 과정이다. ‘죽임을 당하지 않은 순교자’로 불리는 박순집 성도와 아버지는 목숨을 걸고 수많은 순교자의 시신을 찾아내 매장했고, 성직자들을 영입해 들이고 뒷바라지했으며 순교자들의 행적을 증언하는 귀중한 자료를 남겼다. 아마 가톨릭교회의 초기 교회사를 생각할 때 한국 가톨릭교회는 그에게 빚진 것이 너무 많다.

1839년 기해박해 때 훈련도감의 포수였던 순집의 아버지 박바오로는 새남터 형장을 지키던 군사들이 잠든 틈을 이용해 순교자들의 시신을 수습해 노고산에 안장했다.(순교의 자리에 성소를 짓는 전통에 따라 많은 성지가 생겨났고 예수회 계열의 서강대도 이곳에 터를 잡았다.) 당시 국사범인 천주교인의 시신을 수습한다는 것은 곧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 바로 죽음을 무릅쓴 장렬함이었다. 박바오로는 이때 시신을 찾아내 두 손과 옆구리에는 머리 없는 몸통을 끼고 입으로는 죽은 이의 수염을 물고 어둠속을 나왔다고 한다. 25세에 아버지처럼 훈련도감의 군인이 된 박순집도 병인박해 때 베르뇌 주교와 교우들이 순교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그는 교우들과 함께 시신을 찾아 새남터 부근에 가매장했다가 다시 왜고개(기와를 굽던 와서가 있던 곳)로 모두 이장하는 일을 했다.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남종삼, 최형의 시신도 찾아 왜고개로 옮겼는가 하면 전장운, 정의배 순교자의 시신은 노고산에 안장했다. 이런 연유로 현재의 삼각지 천주교 국군 중앙 성당 근방이 왜고개 성지가 되었다.

아무래도 절두산 성지는 그 이름처럼 절통함과 애절함이 있는 곳이다. 이곳은 그 어느 곳보다 이름 없는 성도들이 집단으로 순교한 곳이다. ‘선참후계, 먼저 죽여 놓고 이유는 나중’이라는 말 그대로 수천의 유명, 무명 신자들의 목이 베어졌다. 그러나 이름이 알려진 사람은 30여 명에 불과하다. 새남터에서 이곳으로 옮기게 된 것은 1866년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입한 병인양요 때문이었다. 강화도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낸 대원군은 천주학쟁이들을 꿇어 앉히고 목을 강 쪽으로 내밀게 한 뒤 칼로 목을 쳐서 발길로 물속에 차 던지라는 영을 내렸다. 거기에는 ‘양이로 더럽혀진 한강 물을 서학 무리들의 피로 씻어야 한다’라는 광기가 담겨 있었다. 천주교 박해 100년간 순교자는 1만 명이라는 기록이 있다.

역사적으로 그리스도교를 ‘피의 종교’라 함은 이유가 있다. 우선 예수가 이미 십자가에서 피 흘린 대속의 순교가 그렇고 그 피 보혈의 힘을 믿는 것과 성찬례에서 행한 순결한 포도주 의식이 그렇다. 그 전통은 땅끝까지로 뻗어나가야 하는 선교의 당위성이 필연코 부딪히게 되는 문화적 갈등 속에 이미 이러한 피가 잉태되어 있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교의 순교는 신앙의 수호를 위해 바치는 더 큰 믿음이자 증거다. 그러나 또한 순교란 죽음 자체가 아니고 죽음에서 드러나는 고결한 사랑이자 순종이다.

결국 이 모든 순교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와서 우리의 부정한 나날에 대해 속죄케 하고 내 삶과 그 삶이 펼쳐나갈 내일을 눈 부릅뜨고 지켜주는 청원의 한 모습이 된다. 그리고 지금 이만큼의 자유라도 확보되어있는 우리의 신앙이 이 수많은 선조의 순교로부터 빚지고 있음을 알리는 징표로 서 있는 것이기도 하다.

서울의 8월 초는 온 도시가 비었으되 광화문으로부터 시작된 서소문 밖, 새남터, 당고개, 왜고개, 절두산 처형지의 순교의 길은 오히려 충만한 푸른색으로 가득 차 있다. 그 비었으되 가득 찬 이유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이제 그 내밀한 비밀을 알기 위해서 가을이 오기 전에 서둘러 그곳을 찾아가 묵상하며 천천히 걸어야 할 듯싶다. 그럴 때 나의 모든 자존은 한낱 낙엽 같은 것이요 더는 내려갈 수 없는 넝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제 그 길에 서서 몇 걸음이라도 순종하는 마음으로 나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겠다.(김광만, ‘문화 + 서울 2012 8월호’, 52-55쪽; 이외에도 관련 내용을 ‘천주교 서울대교구 순교자 현양위원회’ 사이트의 ‘천주교 서울 순례길’에서 지도와 함께 확인할 수 있다. *관련 링크 https://martyrs.or.kr/_web/mpilgrims/about.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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