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24,13-35(부활 제3주일 ‘가’해)

루카 복음사가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만난 이야기를 자기가 기록한 복음의 마지막 장에 배치한다. 이는 이 이야기를 자기 복음의 결론으로 삼으면서 동시에 본인이 기록한 또 다른 책, 곧 사도행전의 도입으로 삼기 위한 의도가 다분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루카가 나자렛 예수를 두고 기록한 소위 복음 전체의 종합이요 예수님을 통한 구원 역사 전체의 결론을 대면한다.

게으름

게으름이라는 개념은 이 세상과 우리 자신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중요한 개념이다. 게으름은 얼핏 보기에 악도 아니고 선도 아니고 그저 무기력한 무관심처럼 보인다. 어떤 사람에게 뭔가 얘기를 하려고 할 때 무척 어렵고 아예 불가능하게까지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이는 많은 경우에 게으른 사람을 만난 탓이다. 게으른 사람들은 아름다운 생각, 기막힌 구상, 고무적인 전망…그 어느 것에도 관심이

하느님의 자비 주일

부활 제2주일에 교회는 ‘가, 나, 다 해’ 모두 같은 복음(요한 20,19-31)을 읽으면서 ‘하느님의 자비 주일’을 지낸다. 이날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이라 하게 된 것은 직접적으로 성녀 마리아 파우스티나(St. Faustina Kowalska, 1905~1938년)와 관련이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2000년 4월 30일 부활 제2주일에 폴란드 출신의 성녀 파우스티나 수녀의 시성식을 거행하면서 부활 제2주일마다 하느님의 자비를 기릴 것을 당부함에

막판의 실수

어떤 경기에서든지 막판의 결정적인 실수라는 것이 종종 벌어진다. 더는 기회가 없고 어찌할 도리가 없는 이 막판의 실수(the last minute mistake), 한 번의 실수라는 것을 우리 인생에 견주어 본다면 성실하고도 훌륭하게 많은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았던 사람이 단 한 번의 불행했던 사건, 한 번의 실수, 한 번의 실패, 한 번의 격정, 한 번의 잘못과 죄로 헤어날

우리 사회에서 교육이란 무엇인가

교육 1990년대 중반쯤 필자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함 안에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 대개 3가지 열쇳말(키워드)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것이고, 청소년들과 살아가는 살레시오회라면 이러한 화두들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라고 예언 아닌 예언을 한 적이 있다. 세 가지 열쇳말은 남북, 인터넷 그리고 교육이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이 말은 아직 유효하다. 이는 전 세계의 유일무이한 분단 국가로서 우리만의 아픔을 안고

미안未安

‘나무 목木’이라는 글자가 땅 밑에 세 가닥으로 뻗어나간 뿌리 모양과 땅 위로 솟아오른 줄기나 가지의 모양이라는 것쯤은 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들도 안다. 그 ‘나무 목木’의 땅 위로 솟아오른 줄기에 어린 가지 하나를 가로로 걸쳐 놓으면 ‘아닐, 혹은 끝 미未’가 된다. 아직 튼튼한 가지가 되지 않았고 가지 끝에 돋아난 또 다른 가지이기 때문이다. 그 어린 가지를

달리는 발의 축제

부활하신 예수님은 세상의 심장입니다. 그분께서는 온 우주에 생명을 주시며, 어제, 오늘, 그리고 언제까지나 인류라는 빈 무덤에서 터져 나오는 빛이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특별하고 독특하며 유일한 사건입니다. 죽음에 대한 생명의 승리, 죄에 대한 사랑의 선포입니다. 부활절은 “달리는 발의 축제”입니다. 모두가 지치고 슬퍼하며, 실망에 가득 차, 무덤에 도착합니다.…그랬던 그들이 다시 달려 나갑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승리를 알리는 역동적인 열정을

부활은,

시신屍身 소생이 아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우화가 아니다. 유령이나 영혼의 유체 이탈이 아니다. 죽었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다시 살아난다는 것도 아니다. 『죽었다가 살아났다가 다시 죽어야 할 몸으로 사는 라자로(C.S.루이스)』가 아니다. 두려움에 싸여 있던 제자들이 갑자기 설쳐대는 것이 부활의 증거가 아니냐는 들이댐만으론 현대인에게 설득력이 약하다. “하느님은 사랑”(1요한 4,8.16)이시라 했으니, “서로 사랑”(요한 15,12.17) 해야 한다고

“여드레”

“여드레가 차서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 때가 되자”(루카 2,21), “여드레쯤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루카 9,28),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요한 20,26) 등에서 보듯이 성경에는 “여드레”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마지막의 요한복음에서 보는 “여드레 뒤”는 안식일이 7일째이므로 안식일 다음날, 곧 새로운 주간의 첫째 날이다. 부활하신

입 구口

‘입 구口’는 본래 구멍의 형상이다. 그러나 한문에서 ‘입 구口’가 글자의 부분을 차지할 때는 입이나 구멍만의 뜻은 아니다. 예를 들자면, ‘물건 품品’처럼 물건이 쌓여있는 모양이기도 하고, ‘따로따로, 각각 각各(뒤져올/머뭇거릴 치夂 더하기 입 구口)’처럼 앞 사람과 뒷사람 말이 서로 다르다는 뜻으로 「각각」을 뜻하기도 하고, ‘돌 석石’처럼 바위에서 떼어낸 돌이 생긴 형체를 나타내기도 하며, ‘합할 합合’처럼 셋이 딱